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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192화 (192/488)
  • 192화

    이엘이 의도한 건 아니겠지만, 황자의 이름이 나온 순간부터 노아에겐 더 이상 말할 자격이 주어지지 않았다. 오누이 사이가 제법 애틋했다는 로빈의 말이 이명처럼 귀에 메아리쳤다. 결국 노아는 잡은 손을 그대로 쭉 당겨 이엘을 끌어안고는 그녀의 붉은 입술 위에 짧게 입을 맞췄다.

    “금방 데리러 올게.”

    “네.”

    “그때까지 뱀에게 잘해 주지 말고.”

    “질투라도 하세요?”

    “어. 난 네 눈에 다른 종족 놈들이 담기는 것조차 싫거든.”

    그의 말에 긴장이 풀린 이엘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노아는 아쉬운 듯 이엘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다시 진득하게 입술을 붙였다. 어느새 이엘은 홀린 것처럼 노아의 목 뒤로 제 팔을 감은 채 쉴 틈 없이 몰아치는 키스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가볍게 머물렀던 레온과는 상이하게 거칠고 집요했다.

    “이제 그만……!”

    헐떡이는 숨을 몰아쉬고 간신히 노아에게서 벗어났다. 붉어진 뺨을 감추려 고개를 숙였지만 남자는 그녀의 뺨을 잡아 저를 보게끔 했다.

    “사랑해.”

    낮게 울린 목소리가 듣는 사람의 가슴을 설레게 만들었다. 노아의 입술은 동그란 이엘의 이마에 짧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누구보다 널 아껴 줄 테니까.”

    “폐하.”

    “하루빨리 돌아와.”

    피로한 얼굴인데도 여전히 잘생긴 그가 웃었다. 짙은 흑안에 다정함이 머물러 자신을 올곧게 담고 있다. 이엘은 부끄러워진 뺨을 그대로 둔 채 고개를 끄덕였다.

    “곧 다시 만나요.”

    그 사랑스러움을 못 이긴 노아는 그녀의 뺨에 잘게 여러 번 입을 맞추고 나서야 자리를 떠날 수 있었다.

    *

    “황녀는?”

    “많이 회복하셨습니다. 끼니도 거르지 않으시고, 다과 시간도 매번 잊지 않으십니다.”

    “이상한 점은?”

    최근 들어 왕께서 예민해지셨으니 쓸데없는 이야기는 덧붙이지 않는 편이 좋다. 이틀 전 지하 연구소의 입구를 열어 두고 퇴근한 우논 하나 때문에 소란이 있었으나, 시종장의 권한으로 그를 처벌하는 선에서 끝냈다. 끝까지 자신이 그런 게 아니라며 억울해하는 모습에 가중처벌을 내렸다.

    그러나 전에도 간혹 있던 일이었고, 왕께서 연구 쪽에서 관심을 완전히 거두셨으니 따로 아뢸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왕의 관심은 오로지 탑의 황녀뿐이었으니까.

    “달리 없습니다.”

    “알겠어. 나가 봐라.”

    시종장은 허리를 깊게 숙였다가 몸을 돌렸다. 가만히 서류를 보던 로빈은 문득 불쾌한 생각이 들어, 시종장을 다시 불러 세웠다.

    “도미닉은 아직도 황녀 곁에 있나?”

    “예, 폐하. 아가씨께서 굳게 신임하시는 모양인지, 매번 경을 부르십니다.”

    “알겠다.”

    로빈은 시종장이 나가자마자 보고 있던 서류 다발을 바닥에 집어 던졌다. 찻잔까지 깨뜨린 로빈은 씨근거리는 숨을 가까스로 안정시켰다.

    늑대들이 돌아간 뒤로 이엘은 이틀을 방에서 앓아누웠다. 아닌 척하더니 자신이 얘기한 진실에 꽤 큰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로빈은 만사를 제쳐 두고 그녀를 간호하는 것에 몰두했다. 또다시 극단적인 선택을 할까, 그는 그녀의 방에서 날카로운 것들을 전부 치워 버렸다.

    그렇게 가벼운 감기를 앓고 병석에서 일어난 이엘은 날을 세우던 모습을 차차 죽여 갔다. 여전히 자신이 닿는 걸 끔찍이 싫어했지만, 로빈의 대화에 곧잘 응하며 농담을 건네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왕성에 마련된 홀에서 피아노를 치는 모습도 종종 보여 주었다. 소질이 없는 모양인지 대부분 건반을 조금 눌러 보는 것에서 그치긴 했지만, 그녀의 소소한 일상들은 로빈에게 커다란 기쁨을 안겨 주었다. 제게 천천히 마음을 열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그런데 중간에서 쏙 빼먹으려 해?”

    도미닉은 로빈의 방계 조카쯤 되는 자였다. 뱀들은 다른 종족과는 달리 방계도 승계권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에 선대 후작이 돌연사했을 때 적잖은 파장이 있었다. 승계권을 가진 개체가 많았던 것이다. 물론 리플이 죄다 죽여 버려서 깔끔하게 끝났지만.

    그 난리 통에서 살아남은 놈이 도미닉이었다. 유일한 직계인 로빈. 그리고 살아남은 방계인 리플과 도미닉, 두 사람은 로빈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자신의 권한을 모두 포기하겠다고 맹세했다.

    제 식솔이 처참하게 죽는 꼴을 봤으면서도 분노하기는커녕, 처세를 완전히 뒤바꾸고 로빈의 편에 섰다. 도미닉은 그만큼 약삭빠른 놈이었다.

    그러니 그녀와 친밀해질 수 있는 기회를 놓칠 리 없지.

    로빈은 빠르게 집무실을 빠져나와 이엘이 거하는 탑 쪽으로 향했다. 높은 계단을 단숨에 올라 그녀의 방문 앞에 다다라 문고리를 잡았을 때였다.

    “제법 잘 어울리네.”

    “그렇습니까? 아가씨께 드린 꽃인데, 제가 받아도 될까요?”

    “물론. 경에게 더 잘 어울리는걸.”

    다정한 목소리에 언뜻 웃음이 담겨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에 속이 뒤집힌 로빈이 무례하게 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갑작스런 그의 등장에 놀란 이엘이 눈을 휘둥그레 떴고,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그녀의 앞에 앉아 있던 도미닉은 우아하게 일어나 예의를 취했다.

    “폐하를 뵙습니다.”

    “네가 왜 여기 있지?”

    “아가씨께서 찾으셔서 왔습니다.”

    귀에 하얀 수선화를 꽂고 깔끔한 귀족식 인사를 마친 도미닉은 기사라기보다는 황녀의 남자처럼 보였다. 배알이 꼴려, 있는 대로 열이 받은 로빈은 도미닉의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그의 귀에 꽂힌 꽃을 홱 잡아 뺐다. 그러곤 바닥에 떨어뜨려 구둣발로 거세게 짓이겼다.

    “감히 네가, 그녀의 꽃을 받아?”

    “아가씨께서 주셨으니 받았습니다.”

    “내가 황녀에게 준 꽃이다.”

    “…….”

    “언제부터 네 충성의 대상이 내가 아닌 황녀였지?”

    “죄송합니다, 폐하.”

    “내가 다시 내 손에 피를 묻혀야겠나?”

    살벌한 로빈의 목소리에 도미닉은 고개를 숙이고 그의 힐난을 묵묵히 들었다. 침대에 반쯤 걸터앉아 사태를 관망하던 이엘이 하품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곤 로빈의 바로 옆으로 다가가 그의 팔에 슬그머니 제 팔을 끼워 넣었다.

    “그냥 꽃이 예뻐서 줬어요.”

    “…….”

    “도미닉도 예쁘잖아요. 꽃과 잘 어울리기에 준 것뿐인데요. 화나셨어요?”

    어느 날 불쑥 흰 수선화가 갖고 싶다며 저를 졸랐다. 선호하는 것을 말하는 일이 극히 드물기에, 로빈은 온갖 수족을 부려 다른 영지에서 꽃을 구해 왔다. 그 꽃을 받고 환하게 웃던 게 바로 어제인데 하루 만에 그 꽃을 겨우 저딴 놈에게 줘?

    “죄송해요. 폐하께 받은 선물인데……. 제가 잘못했어요.”

    꼬리를 내리고 주눅이 들어 물러나려는 이엘의 팔을 서둘러 붙잡았다. 로빈은 미간을 좁힌 채 도미닉을 보지도 않고 턱짓만 했다.

    “그만 나가.”

    “예, 폐하.”

    도미닉은 모처럼 얻은 여자와의 시간을 빼앗긴 것에 짜증이 났지만 왕의 앞에 무례한 표정을 보일 순 없었다. 그는 선한 얼굴로 공손히 방을 나갔다. 로빈은 그녀의 방 근처에 은신해 있던 뱀들에게 명령해 모조리 쫓아냈다.

    “폐하께서 이렇게 싫어하실 줄 알았다면 안 했을 텐데.”

    이엘은 사뿐사뿐 걸어가 엉망으로 짓눌린 꽃을 제 손에 가만히 담으며 중얼거렸다. 로빈은 그녀의 작은 등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엘은 고개만 그를 향해 쏙 돌리더니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폐하께서 도미닉 경과 잘 지내라고 하셨잖아요. 저는 괜찮은 줄 알았어요. 싫어하신다면 안 했을 거예요, 정말.”

    “네가 내 말을 들었을 거라고?”

    “저를 받아 주셨잖아요.”

    “…….”

    “저는 이제 정말 갈 데가 없는걸요.”

    씁쓸하게 웃는 얼굴에 마음이 쓰렸다. 빌어먹을……. 이런 쓸데없는 감정은 왜 드는 건지 모르겠다. 그냥 도구로 이용하고 버리면 되는데, 왜 나는.

    “어떻게 하면 폐하의 화가 누그러지실까요?”

    예전이었다면 그녀의 저 말을 환영했을 테지만, 지금의 로빈은 이엘이 저런 생각을 한다는 게 몹시 불쾌했다. 그녀는 제 비위를 맞춰 줄 필요가 없다.

    그건 내 역할이니까.

    “됐다. 화난 적 없으니 마음 쓸 필요 없어.”

    “정말요?”

    “늑대 말인데.”

    뜬금없이 튀어나온 늑대 이야기에 이엘이 조잘거리던 입을 다물었다. 로빈은 딱딱하게 굳은 이엘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그녀의 손을 끌어 침대 끝에 앉혔다. 그러곤 자신도 그 옆에 함께 앉았다.

    “네가 원한다면 전부 박살 내 줄 수 있다.”

    “늑대를요?”

    “네 비밀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으니까.”

    그는 그렇게 말하며 이엘의 콧등을 검지로 톡 건드렸다. 간지러움에 그녀가 작은 웃음을 터뜨리다가 로빈의 어깨 위에 제 고개를 기울여 얹었다.

    “그러다 제가 모두에게 잊히면요?”

    “더 좋잖아.”

    “…….”

    “넌 내 기억에만 살면 돼. 다른 종족은 필요 없어.”

    로빈이 모로 고개를 틀어 이엘의 얼굴 가까이 다가가자, 그녀가 푸스스 웃으며 고개를 뒤로 쏙 뺐다.

    “로빈 님께선 제가 원하는 건 다 해 주실 거예요?”

    “물론.”

    “왕의 자리를 달라고 해도요?”

    “그런 걸 원해?”

    “그냥 말해 본 거예요. 폐하께서 갖고 있는 것 중에 가장 좋은 거니까.”

    “날 떠보는 건가?”

    “그럴 수도 있죠.”

    호를 그리며 올라간 붉은 입술을 보며 타오르는 갈증을 억눌렀다. 마른침을 삼킨 로빈은 자제력을 발휘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를 따라 위로 향한 녹색 눈동자를 마주 보며 왕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네가 원한다는데 그깟 왕의 자리가 뭐라고.”

    “…….”

    “그리고 뭔가 착각하나 보군.”

    순수한 황족의 눈동자를 볼수록 욕망은 사그라들지 않고, 도리어 커져만 갔다. 그러니 그런 것쯤은.

    “내가 가진 것 중 가장 좋은 건 왕의 자리가 아니라 너야.”

    “…….”

    “내 옆에 너만 있다면, 나는 네게 뭐든 갖다 바칠 거다.”

    공국이 아니라, 내 나라라도 네게 주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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