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그런데 황녀는 정말 몰랐던 모양이더군?”
“…….”
“네 동맹이 황실을 박살 냈다는 걸.”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뭐, 독수리의 왕은 직접 마주쳤을 테니 이미 알고 있었던 모양이고.”
“…….”
“사자 쪽은, 그녀에게도 썩 좋은 아비는 아니었던 모양이니 그냥 그런 모양인데.”
“…….”
“내가 알기론 황자와 황녀의 사이가 꽤, 애틋했다고 들었거든.”
이엘에게 이온이 어떤 존재였는지, 노아도 알고 있다. 의도를 갖고 떠봤던 것은 아니지만, 황자를 언급할 때마다 드러나는 그녀의 표정만 봐도…… 알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제 오라비를 죽인 너에게 아직도 미련을 갖고 있다는 게.”
“……로빈.”
“내 기분을 더럽게 하더군.”
나는 내 존재만으로도 병균 취급받는데 말이야. 이어진 로빈의 말을 들으며 노아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결국 알았구나. 내가 말했어야 했는데……. 말할 기회는 충분히 있었다. 그녀에게 신뢰를 바라면서, 의지하기를 바라면서, 정작 자신은 숨겨 왔다. 말할 수 있었는데도. 그 생각에 마음을 납덩이가 짓누르는 것처럼 숨을 쉬기가 버거워졌다.
“돌아가, 노아. 난 너와 그녀를 사이에 두고 협상할 마음이 없다.”
“…….”
“그녀는 나의 영지에서, 나의 암컷이 되어, 너희 따윈 꿈도 꿀 수 없는 존재로 살아갈 테니까.”
로빈은 그 말을 남겨 두고 우아한 걸음으로 만찬실을 나갔다. 홀로 남겨진 노아는 여전히 지켜보고 있을 뱀들 때문에 제 감정을 꼭꼭 숨기며 이를 악물었다.
조금 전까지 이곳에 있었던 그녀가, 너무 보고 싶었다.
*
떠나기 전에 어떻게든 이엘과 만나려고 틈을 엿봤지만 헛수고였다. 로빈은 그에게 조금의 시간도 허락하지 않았고, 석찬이 끝나기 무섭게 축출했다. 노아는 늑대들과 함께 영지를 나가며 왕성의 탑을 가만히 쳐다봤다.
저기에 있는데. 바로 지척에 있는데…….
도중에 무리가 갈라져 레온과 만나기로 한 늑대들이 먼저 영지를 빠져나갔다. 노아는 후발대와 함께 뱀의 꺼림칙한 배웅을 받으며 이동했다. 성벽이 가까워질수록 스스로에 대한 무능함과 자책감에 가슴이 타들어 갈 것 같았다.
젠장. 작전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그녀와 만났어야 했다. 이대로라면 그녀가 우릴 버릴지도 몰라. 나를, 버릴 거다. 내게 실망해서……. 주먹을 바르쥐며 탄식을 삼켰다. 후회가 막심했다. 이엘의 존재를 알아챘을 때, 그래…… 그때 털어놨어야 했다. 적어도 나는 그녀에게 숨기는 게 없었어야 했다.
두려웠나? 미움을 받을까 봐? 엘은…… 제 오라비를 죽인 나를 미워했을까?
아니. 자신이 아는 그녀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다만 마음 아파했겠지. 혼란스러워했을지도 모른다. 제 얼굴을 볼 때마다 죽은 오라비가 떠올라 자신을 피하려고 했을지도 몰라.
노아는 그게 두려웠던 것 같다. 완벽한 관계를 바란 건 아니었지만, 이엘과 자신 사이에 더 이상 조금의 금도 생기지 않기를 바랐던 것일지도.
네게 어울리지 않는 남자라는 열등감이 빚어낸 헛된 욕심이었다. 존귀한 네 신분을 추락시켰다는 자책감이 만든 눈가림이었다. 애초에 타인과의 관계에서 완전함이란 없는 건데.
“그럼,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뱀들은 성벽을 코앞에 둔 숲의 끝에서 늑대들에게 인사하며 다시 왕성으로 돌아갔다. 노아는 말없이 늑대들을 이끌어 성문으로 향했다. 무능력한 왕이라, 이엘에겐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다.
노아는 체념하듯 미련을 거두고 계속해서 걸었다. 그래도 위로할 만한 건, 생각보다 뱀들이 그녀에게 정성을 다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르네에게서 들은 것보다 더 과할 정도로 애지중지하는 모습이 다행이면서도 못내 불쾌했다.
나무가 무성한 숲의 끝이 완전히 보일 때쯤 노아는 걸음을 멈췄다. 늑대의 모습으로 돌아가기 위해 멈췄지만, 일순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와 그의 코끝을 간지럽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늑대들의 시선이 일제히 왼쪽으로 돌아갔다.
“폐하!”
노아도 냄새를 맡았다. 그는 놀란 늑대들을 그 자리에 두고 홀로 냄새가 나는 곳으로 뛰어갔다. 분명 여기서……!
“여기예요.”
아…….
노아는 탄식을 내뱉으며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역시 냄새를 잘 맡네.”
제게 장난치듯 웃는 모습에 가슴이 찌르르 울렸다. 아까 전의 그 낯선 모습은 어디 가고, 늘 자신과 마주하던 다정한 그녀가 그곳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었다.
“경비가 삼엄해서 뚫고 나오는 데 조금 애를 먹었어요.”
“어떻게…….”
“어떻게는요. 줄 타고 내려왔죠.”
“…….”
“줄 타고 탈출하는 게 한두 번도 아니고.”
어깨를 으스대며 농담하는 이엘을 지켜보던 노아는 그녀의 앞까지 성큼성큼 걸어가, 단숨에 이엘을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바스라질 것처럼 억세게 안는 손길에도 이엘은 가만히 있었다. 노아는 밭은 숨을 쉬며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미안해.”
“…….”
“말하려고 했어. 말하고 사죄하려고 했어…….”
그 마음이 뭔지 알고 있다. 이엘은 말없이 그의 등을 마주 안아 주었다.
“네게 네 오라비가 어떤 존재인지 알고 있어. 그러니 나를 용서해 달라는 말을…… 감히 할 수가 없다.”
“제가 누굴 용서할 위치가 되나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잖아요.”
비록 그 일로 인하여 자신이 이런 가시밭길을 걷게 되었지만.
돌이켜 보면 참 희한하고, 참 지독한 과제다. 자신에게 필요했던 늑대의 기름, 타이곤의 갈기, 독수리의 눈알은 그들의 희생을 요구했고, 그 종족의 왕은 이온과, 아비와, 자신을 죽였다. 이렇게나 절망스러운 관계가 또 어디 있을까.
노아는 혹 이엘이 제 품을 떠날까, 전전긍긍하며 다시금 품으로 꽉 끌어당겼다. 이전에 안았을 때보다 더 작아진 체구에 속이 상했고, 마음이 아팠다. 그녀의 건강이 회복되도록 그간 얼마나 노력했는데 그 모든 게 허사가 되어 버렸네. 이엘은 처음 만났을 때만큼 상태가 나빠져 있었다.
“식사는 제대로 하고 있는 건가?”
“그럼요. 잘 하고 있어요.”
“그런데 살이 왜 또 빠졌어.”
“글쎄요, 체질이 원래 이런 거 아닐까요.”
“엘. 이대로 나갈까?”
“…….”
“네가 허락만 하면 그냥 나갈 수 있어.”
노아는 품에서 그녀를 떼어 놓고 진지하게 물었다.
“나와 같이 여길 나가자.”
“폐하.”
“왜 네가 책임을 져야 하는 건데.”
“…….”
“네가 황제가 되려는 게 권력욕이 아니란 것쯤은 나도 알아.”
그래서 이해할 수 없다. 너란 존재는 왜 이기적인 인간을 닮지 않아서……. 네게 조금이라도 인간의 악함이 묻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엘. 한마디만 해 줘. 데리고 나가 달라고, 제발 한마디만.”
“죄송해요.”
“…….”
“저는 해야 할 일이 있어요.”
이엘은 그의 손을 놔주었다. 그러곤 쓰고 있던 후드를 벗어 말끔한 얼굴로 노아를 마주 봤다. 오랜만에 보는 남자의 얼굴은 피곤함에 절어 엉망이었다. 거기에 조금 전엔 보지 못했던 불안함까지 얹어져, 저가 알던 노아가 아닌 것 같았다. 자신이 아는 늑대들의 왕은 위엄 있고 단단하며, 오만할 정도로 자신이 넘치는 사람이었는데.
눈앞의 남자는 무리에게 버려진 초라한 짐승과 다를 바 없었다.
“노아. 많이 힘들어요?”
“어. 힘들어. 많이 힘들어, 나.”
그녀의 앞에서만 위엄을 벗어 던진다. 그녀의 앞에서 자신의 위치는 한 종족의 왕이 아니라, 그저 인정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은 한 남자에 불과하다. 그래서 간절히 매달렸다.
“너를 못 보는 것도 힘들고, 너를 이런 곳에 두고 가는 것도 너무 힘들어.”
“폐하.”
“네가 나 없는 곳에서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
“너무 힘들어서 목이 막혔어.”
그의 손이 이엘의 목덜미에 닿았다. 천으로 가려진 곳에 멍청하게 손을 대며 노아가 피곤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스완이 내 앞에서 숨을 멈췄어.”
“…….”
“내가 그때 얼마나…… 얼마나 무서웠는지 넌 모르겠지.”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피가 마르는 기분이다. 그날 이후로 불면증이 더 심해져서 아예 눈을 뜬 채로 밤하늘을 쳐다보는 게 일상이 되었다. 어머니처럼, 1차 전쟁 때처럼 자신이 없는 새에 벌어진 일에 무력함을 느껴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아무것도 묻지 않을 테니, 제발 나와 함께 돌아가자.”
“노아 님.”
“미안해. 다 미안하다, 내가. 내가 네 오라비를 죽여서 널 더 괴롭게 만들었어. 그라도 살아 있었다면 이렇게 네가 황위에 연연하지 않았을 텐데. 적어도 너 혼자 짐을 지진 않았을 텐데……. 날 미워해도 좋아. 그런 건 내가 감당할 수 있어.”
사실이다. 황자라도 살아 있었다면 이엘은 저렇게 혼자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됐다. 적어도 혼자 책임질 생각은 하지 않았겠지.
“오빠는.”
“…….”
“아르세니온 황자는 언제나 제게 빛이었어요.”
나를 위한 나라. 나를 위한 정치. 나를 위한 규율. 제 오라비는 자신의 학대를 외면해야 했던 과거에 대한 자책감을 늘 안고 살았다. 이온은 날 때부터 황제로 내정되어, 완벽한 군주가 되기 위해 몸부림쳤다. 그러나 그중 대부분은 그녀에 대한 부채감 때문이었다.
이엘이 이온의 황위를 위해 길러졌듯, 이온은 이엘을 위해 황위에 오르려 했다. 두 사람은 같은 날, 같은 배 속에서 태어나 한 몸처럼 의지했다. 한 사람이 살아 있기에 다른 한 사람이 살 수 있었던 셈이다.
“오빠가 약속을 했어요.”
“…….”
“저를 구해 주겠다고요.”
아무도 자신을 구해 주지 못하던 어린 날의 유일한 구원자였다. 그 말 하나로 버텼다. 컴컴한 옷장에서도 이온의 말 한마디로 견뎠다. 이온이 실제로 해 준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 말 한마디로 어린 시절을 지나올 수 있었다.
그래서 놓을 수가 없다. 지금도, 자신에겐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혈육이고 가족이다. 이온은 아무것도 없던 이엘에게 유일하게 허락된 존재였다.
미래에 있을지도 모를 자신의 아이를 버렸다. 물론 두려움에 택한 결과이기도 했다.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자신이 좋은 부모가 될 거란 생각은 애초에 하지도 않았으니까. 아이를 가질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러나 사랑이란 단어를 누군가에게 배우고, 느끼고, 주면서 차츰 깨달았다.
언젠가 내게도 나를 닮은 아이가 있으면 좋겠다. 레온이 말했던 것처럼 그 숭고한 사랑이란 감정을 마음껏 쏟아부을 수 있는 존재가, 내게도 있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런 미래의 아이를 버렸다. 버리면서까지 택한 게 이온이었다.
이엘이 버린 건 이온이 아니었다.
“그래서 저도 오빠를 구해야 해요.”
“나와 같이 나가지 않겠다는 소리군.”
“며칠 내로 신호를 보낼게요.”
“…….”
“그때 다시 만나요, 폐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