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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190화 (190/488)

190화

차라리 한시도 눈을 감지 않고 너를 지켜보고 있는 게 낫지. 네 마음이 늑대에게 흘러가는 꼴을 더는 보지 못하겠다. 그녀를 단순한 도구로 보고 있는 것이라기엔 불필요한 감정이었다. 질투? 그럼 이게 질투인 걸까.

나는 네게 사랑이라도 하고 있는 걸까. 로빈은 코웃음 쳤다. 아니. 단순한 소유욕에 불과한 것이겠지.

“늑대는 널 사랑하지 않아, 황녀. 그리고 너 역시. 그를 사랑하는 게 말이나 되겠나?”

“…….”

“그는 네 원수야, 엘.”

미워하지 않는다. 원망하지도 않는다. 노아를, 이해한다. 당시 그에겐 당연한 일이었을 테니까. 황위 계승권을 가진 황족을 죽이는 건 이종족의 가장 큰 목표였을 테니까.

하지만 이해하는 것과 받아들이는 것엔 명백한 차이가 존재한다.

……왜 말하지 않았던 걸까? 왜 노아는, 내게 이온에 관한 건 일절 말하지 않았던 거지? 물론 자신도 그에게 감추는 게 많으니, 진실되지 않았음에 화가 나는 건 아니다. 다만……. 다만 왜 말하지 않았을까 하는 서운함이.

아― 그때 당신도 이런 감정이었나?

내가 황녀였음을 알아챘을 때, 당신도 지금의 나와 같은 감정을 느꼈던 걸까? 말한다고 원망하지 않았을 텐데, 말한다고 우리가 달라질 관계는 아니었을 텐데. 말하는 순간 박살 날 정도로 가벼운 관계라고 생각해서 감췄다고 생각하니, 그간 주었던 감정이 너무 허탈하고 불쌍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때 노아도 이런 마음이었을까.

“보아하니 몰랐던 모양이군.”

이엘과 로빈은 변함없이 위태로운 줄다리기를 하고 있었다. 밀렸다가도 금세 당기는, 중심이 크게 흔들리지 않는 애매한 줄다리기를. 두 사람은 서로의 감정을 감추는 데 능통했고, 서로를 불신했다.

그러나 자살 사건으로 인하여 중심이 이엘 쪽으로 상당 부분 넘어간 지 오래였다.

로빈은 제 욕심에 이야기를 꺼냈지만 이엘의 표정이 점차 어두워지는 것을 지켜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젠장. 괜히 쓸데없는 이야기를 했군. 어차피 늑대와의 연결은 끊어졌는데 쓸데없는 내 오기로 황녀가 또 살기 싫어지면 어떡하나.

이토록 그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마음이 흔들렸다. 이건 뱀답지 않다.

“일단 나가지. 손님이 기다려.”

이엘은 아무렇지 않은 척, 또는 혼란스러운 척하며 그의 손을 잡았다.

아니. 사실 잘 모르겠다. 내가 지금 정말 아무렇지 않은 건지, 혼란스러운 건지. 연기를 하고 있는 건지, 속마음을 내비치는 건지. 이게 목적이었다면 로빈이 이긴 셈이다.

늘 사용하던 곳이 아닌 만찬실에 석찬이 준비됐다. 로빈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선 이엘은 먼저 와서 기다리던 노아와 눈이 마주쳤다. 노아는 그녀를 위해 시선을 금세 돌려 주었다. 연기를 못하는 건 아니었지만, 이엘을 계속 바라보면 속마음이 튀어나올 것만 같아서.

하지만 아주 짧은 시간 담았던 그녀의 모습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려 심장이 뛰는 것만은 막을 수 없었다. 참 우습게도…… 이런 상황에서도 낯선 네 모습이 숨 막힐 것처럼 아름다워서. 그렇게 있으니 너와 내 신분의 차이를 다시 한 번 절감하게 되니까. 여러 의미로 괴로움만 쌓여 가는 기분이었다.

싸한 분위기를 감지한 로빈이 만족스럽게 웃으며 노아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앉아.”

노아는 자리에 앉아 나이프를 들었다가 습관적으로 이엘을 쳐다봤다. 괜찮나? 그녀는 이런 분위기에서 식사하는 걸 어려워했다. 거대한 공간, 위압적인 존재와 함께 하는 식사를 부담스러워했다. 게다가 저 불편한 드레스만 봐도……. 혼자서는 입을 수 없는 드레스를 입고 있는 걸 보니 누군가 시중을 들었으리라.

목이 답답해 물을 몇 번이나 들이켰지만 갈증은 해소되지 않았다. 로빈은 보란 듯이 이엘을 살뜰히 챙겼고, 그녀 역시 익숙하게 그의 보살핌을 받았다. 겉으로 보기엔 이엘이 뱀들에게 완전히 녹아든 것 같았다. 뱀들은 왕의 명령 때문인지 아니면 자발적으로 행동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놀랄 만큼 온순히 굴었다.

그녀의 안전이 이렇게 확실해졌는데, 왜 갑갑한 걸까.

“폐하. 경계 지역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리플이 로빈의 귀에 은밀히 전했다. 경계 지역에 또다시 스라소니들이 출몰했다는 것이다. 전에 기웃거리던 놈들은 이엘의 존재를 감추기 위해 전부 죽여 버렸는데, 어디서 냄새를 맡은 건지 다시 또 이곳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로빈은 노아를 힐끔 보다가 리플을 따라 잠시 자리를 비웠다.

결국 식사 자리엔 노아와 이엘, 둘만 남겨졌다. 물론 온전히 두 사람만 있는 건 아니었다. 그녀의 뒤엔 도미닉이 호위를 자처하여 서 있었고, 그 외에도 은신하여 몸을 숨긴 우논과 테르가 상당했으니까.

“제 목숨이 보호석에 비할 만하다니, 영광이네요.”

이엘이 냅킨으로 입을 깔끔하게 닦으며 나긋하게 속삭였다. 그녀를 멍하니 쳐다보던 노아가 그제야 정신을 차리며 애써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뱀의 영지로 숨어들면 모를 줄 알았나?”

“숨어들었다고 생각해요?”

“…….”

“이곳으로 납치되었을 거란 생각은 전혀 안 해 주시는군요.”

씁쓸하게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노아는 제 가슴이 저미는 것을 느꼈다. 이런 연기 따위 하고 싶지 않다. 사실이든 아니든, 그녀가 저런 표정을 짓는 게 싫었다. 노아는 저도 모르게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던 손을 주먹 쥐듯 꾹 말아 쥐었다. 그를 가만히 쳐다보던 이엘은 다시 입을 열었다.

“……정말 제 목을 원하세요?”

그녀의 떨리는 목소리에 곁에 있던 뱀들이 매섭게 노아를 쏘아봤다. 특히 이엘의 뒤에 선 도미닉은 금방이라도 노아의 목을 찌를 것처럼 싸늘한 낯이었다. 노아는 뱀들의 반응에 기가 차서 헛웃음을 터뜨렸다. 정말로 뱀을 제 편으로 만들다니…….

네가 녹아든 게 아니라, 네게 녹아든 모양이었나.

“그럼 지금 당장 제 목을 가져가시겠어요?”

“아가씨.”

주제넘게 끼어든 도미닉의 목소리에 이엘은 그를 향해 빙긋 웃어 주는 걸로 무마했다. 노아는 그 꼴을 보고 있으니 또 열이 받아 속이 들끓었다. 젠장, 왜 저렇게 웃어 주는 거야. 그것도 뱀을 상대로.

“농담이에요.”

“오헬.”

“아마 로빈 님은 당신에게 제 목을 주지 않겠죠. 당신의 제안은 거절당할 거예요.”

“…….”

“그 사람은 내가 죽어도 살려 낼 사람이거든요.”

그러니 괜찮다는 뜻이다. 제 안전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다는 뜻을, 저렇게 에둘러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이런 곳에 널 두고 어떻게 걱정을 안 해. 왜 넌 그렇게까지 이기적이야.

그런데도 거짓말이나 하고 있어야 한다니.

“……로빈이 내놓지 않는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널 거두겠다.”

“불가합니다.”

도미닉이 검을 들고 이엘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와 동시에 볼일을 마친 로빈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세 사람을 훑어보다가 분위기를 대충 파악한 건지 피식 웃으며 도미닉을 뒤로 물렸다.

“그렇잖아도 네게 말하려고 했는데.”

“…….”

“네 거래를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어.”

“로빈.”

“지금의 내겐 보호석보다 황녀가 더 중요해.”

“…….”

“그녀가 쓸모없어지기 전까진 네게 줄 수 없다.”

로빈의 말에 노아는 주먹을 쥔 손에 힘을 더했다. 그녀의 쓸모 따위를 운운하는 교활한 뱀의 목을 당장이라도 따 버리고 싶단 생각밖엔 안 들었다.

“되게 재밌네요.”

가만히 두 사람을 지켜만 보던 이엘이 고개를 살짝 기울여 웃음을 터뜨렸다.

“저는 여기서 몇 번이나 죽으려고 했는데, 제 죽음을 노아 님은 원하시지만 로빈 님은 원치 않으시고.”

“…….”

“저는 어떻게든 늑대들과 함께 있고 싶었는데, 노아 님은 제가 쓸모없어서 버렸지만 로빈 님은 제 쓸모를 기어코 찾아내어 거뒀네요.”

알고 있다. 분명 연기일 텐데……. 그녀의 말은 전부 거짓일 텐데. 왜 이렇게 불안한 거지? 정말로 몇 번이나 죽으려고 했던 건 아니겠지? 정말로 내가 널 버렸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거짓이라기엔 다소 진지한 표정이었다. 언제나처럼 그녀의 눈동자를 살피며 의중을 살피려 했지만 지금만큼은 모르겠다. 전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네 원수가 아니지.”

덧붙여진 교활한 뱀의 말에 노아가 잠시 주춤했다.

“나는 적어도 네 가족을 죽이지는 않았거든.”

“…….”

“널 외롭게 홀로 남겨 두지도 않을 거고.”

무슨……. 노아는 로빈의 말을 곱씹다가 퍼뜩 드는 생각에 서둘러 이엘을 쳐다봤다. 그녀는 말없이 도미닉의 부축을 받으며 자리에서 일어서 있었다.

“오헬.”

“피차일반이네요.”

“…….”

“애초에 황족과 이종족은 같은 길을 걸어갈 수 없는 거였는데.”

“도미닉. 그녀를 방으로 데려다줘라.”

“예, 폐하.”

그렇게 제 시선을 무시하고 완전히 뒤돌아섰다. 어둠 속으로 빨려 가듯 이엘이 사라지고 나서야 노아는 미간을 일그러뜨리고 로빈을 향해 으르렁거렸다.

“로빈. 조금 전에 무슨 뜻으로 말한 거지?”

“몰라서 물어?”

“…….”

“그녀가 자꾸 네게 미련을 갖기에.”

“…….”

“정을 떨어뜨리려고 조금 골려 줬거든.”

그거 내 취미잖아, 고약한 취미. 그는 스스로를 조롱하듯 비웃으며 식사를 마저 이어 갔다. 노아는 예상치 못한 혼란스러움에 바짝 긴장했다. 이엘은 지금, 자신에게 화가 난 걸까? 연기가 아니라 정말로…… 정말로 뱀에게 돌아선 건 아니지?

너, 우리를…… 나를 버릴 생각은 아니지, 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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