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레온은 잔뜩 붉어진 얼굴을 하더니 이내 그녀를 향해 제 손을 뻗었다. 이엘은 그의 귀가 빨개진 것을 쳐다보며 눈을 둥글게 떴다. 언제나 예민하게 날을 세우던 남자가 대놓고 잔뜩 풀어진 표정을 하고 있다. 이엘은 그게 신기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해서 한참 말을 잇지 못하다가 머뭇거리던 손을 그의 손 위에 얹었다.
……영영 못 볼 사이도 아닌데. 그녀의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레온이 피식 웃었다. 그러곤 잡은 이엘의 손을 뒤집어, 그 손바닥 위에 입술을 깊게 묻었다가 뗐다. 이엘은 레온의 입술이 떨어진 제 손을 그의 뺨 위에 얹으며 속삭였다.
“작별 인사라고 하지 마요. 다시 볼 거니까.”
“다시 볼 땐 너도 내 감정과 같았으면 좋겠어.”
레온은 이엘의 따뜻한 손바닥 안에 제 뺨을 더 깊게 묻었다. 그녀에게서 좋은 향기가 흘러나왔다.
“비록 크기는 다르다 할지라도.”
아주 조금만 닮아도 나는 만족하겠지.
*
“들어와요.”
이엘의 허락이 떨어지고 나서야 문이 열렸다. 번듯한 정복 차림으로 들어선 로빈은 시중을 받고 있는 이엘을 발견하곤 잠시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다 죽어 가는 표정이로군.”
“그럼 웃어야 하나요?”
“웃으면 더 좋지.”
“당신에게 좋겠죠. 그럴싸한 인형이 될 테니.”
한 번쯤은 보고 싶다. 네가 진짜 기뻐서 짓는 미소를. 내게는 한순간도 보여 준 적 없는 그 미소를, 네가 죽기 전에 나는 볼 수 있을까. 그런 공연한 생각을 하며 성큼성큼 걸어갔다. 왕의 등장에 시중을 들던 우논들이 허리를 숙여 공손히 절하더니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자리를 비켜 주었다.
“폐하. 저희는 나가 있을까요?”
“됐어. 오늘은 너희가 그녀를 돕도록 해라.”
“예. 이전에 말씀하신 대로 아가씨의 드레스 룸을 채워 놓았습니다. 들어가셔서 확인하시겠습니까?”
로빈은 시종장의 안내를 받아 방 안에 마련된 드레스 룸으로 들어갔다. 또 시작이야. 벌써부터 진저리가 났다. 그녀의 예상대로 로빈의 뒤를 따라갔던 우논들이 각각 드레스를 한 벌씩 들고 다시 로빈과 함께 나타났다.
“오늘은 일일이 입어 보지 않아도 되니까 표정 풀어.”
“불편하지만 않으면 돼요. 아무거나……,”
“노아가 기다릴 텐데?”
“…….”
“석찬을 같이 하기로 했다. 손님에 대한 예우는 해야지.”
그는 진열된 액세서리를 갖고 온 드레스들과 일일이 비교하며 심혈을 기울여 선택하고 있었다. 이엘은 그때까지도 제 머리를 치장하던 시종의 손을 피하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럼 제가 고를게요.”
“별일이군. 그대가 나선 적은 처음인 것 같은데.”
“그러면 안 되나요? 폐하께서 제일 원하시던 일 아니었어요?”
“물론. 조금이라도 그대의 흥미를 당길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나는 기쁘지.”
“…….”
“다만 그게 늑대 때문이란 게 불쾌하지만.”
이엘은 로빈의 말을 반쯤 흘려들으며 제 앞에 줄을 지어 선 드레스들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의 취향은 지독할 정도로 일관적이라, 사실 색만 다를 뿐 대개 비슷한 종류였다. 이엘은 어느새 제 곁으로 바짝 다가선 남자를 힐끔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이걸로 할게요.”
“그럼 비슷한 색으로 반지도……,”
“도미닉이라고 했나?”
로빈의 말허리를 끊고 갑작스레 이엘이 물었다. 들려온 제 이름에, 그녀가 고른 드레스를 들고 있던 우논의 눈에 화색이 돌았다. 그는 시원하게 웃으며 한쪽 무릎을 꿇고 이엘의 앞에 제 손을 내밀었다.
“예, 아가씨. 제 이름을 알고 계실 줄 몰랐습니다.”
그는 로빈의 방계쯤 되는 혈통을 타고났다. 직계로 갈수록 화려해지는 종족 특성대로, 그녀의 침실에 모여든 뱀들 중 로빈을 제외하고 가장 아름답게 생긴 청년이었다.
도미닉은 그녀의 존재를 알아채고 태세를 완전히 뒤바꾼 우논 중 하나였다. 혐오하던 그녀에게 가까워지기 위해 자존심도 버리고 이엘의 시종을 자처했다.
이엘은 제 뒤에서 로빈이 노려보는 것을 알면서도 도미닉의 손 위에 제 손을 얹었다. 그는 그녀와 닿자마자 손등 위에 입술을 깊게 묻었다가 떨어졌다.
“가문의 영광입니다, 아가씨.”
“괜찮다면 당신이 내 호위를 맡아 줄 수 있을까?”
“폐하께서 허락하신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그래도 왕은 왕이다. 왕의 허락 없이는 움직일 수 없는 존재가 자신들이니. 도미닉은 은근한 눈웃음을 보내며 그녀의 제안에 응하듯 왕의 허락을 기다렸다. 이엘은 피식 웃으며 여전히 그에게 손을 맡긴 채 고개만 뒤로 돌려 로빈을 보았다.
“허락해 주실 거죠, 폐하?”
“…….”
“제가 원하는 건 뭐든 들어주신다면서요.”
저는 감히 닿지 못하게 만들었으면서. 제 속을 긁어 대는 이엘을 가만히 노려봤다. 그러나 이내 미소를 덧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꺼이.”
“어머, 감사해라.”
“도미닉.”
“예, 폐하.”
“네가 그녀의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군.”
“명심하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설설 기어서 그녀의 마음에 차도록 노력해. 기왕이면 황녀가 네 새끼를 배고 싶단 마음이 들도록 말이야.”
그러니 나 역시 이런 식으로 네 속을 긁어 놓을 것이다. 로빈이 조소를 담은 눈빛을 이엘에게 보냈다. 이엘은 기가 차 헛웃음을 터뜨렸다.
“아예 제 침실로 들이밀지 그래요?”
“그렇잖아도 그 생각을 했어.”
“…….”
“네가 마음에 들 법한 놈들로 고를까 했거든.”
“…….”
“원한다면 노아를 닮은 놈들로 준비해 보지.”
“그만하세요.”
제 조롱에 그녀는 정말 상처받은 얼굴을 했다.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며 울적하게 서 있다가, 살짝 떨리는 손으로 로빈의 소매 끝을 움켜쥐었다.
“당신이 그런 말을 할 때마다 화가 나요.”
“그대는 언제나 내게 화가 나 있지 않던가?”
“호감을 조금만 쌓으려 해도 금세 와르르 무너뜨려.”
“놀랍군. 쌓일 만큼의 호감이 있었다는 게.”
“아직도 저와 늑대의 사이를 의심하고 있어요?”
“인간은 믿지 말자는 주의라서.”
“…….”
“노아가 정말 내 앞에서 너를 향해 검을 뽑지 않는 이상, 믿을 리 없지.”
로빈은 그 말을 하며 제 소매를 잡고 있는 이엘의 손을 떨쳤다. 그러곤 말없이 고갯짓으로 그녀의 단장을 지시했다. 시종들은 침묵을 유지하며 빠르게 이엘을 끌어당겨 시중들기 시작했다. 이엘은 뒤에 선 로빈의 시선을 느끼며 한숨을 삼켰다. 역시 쉽지 않은 성격이다.
“왜 그 드레스로 고른 거지?”
“그것도 이유가 필요한가요?”
“난 그대와 관련된 건 무엇이든 알고 싶거든.”
“당신의 취향에 맞춰 골랐어요.”
“노아 때문이군.”
“…….”
“왜 너를 버린 늑대에 그렇게나 집착하는 거지?”
이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침묵을 긍정으로 알아들은 뱀은 차갑게 굳은 표정으로 이를 갈았다. 왕의 분노가 고스란히 느껴져, 시종들은 다른 때보다 빠르게 치장을 마치고 투왈렛 룸을 빠져나갔다.
“그를 사랑하기라도 하나?”
“그것도 대답해야 하나요?”
“늑대는 네 원수야. 그런데도 사랑한다고?”
“…….”
“2차 전쟁 때, 각 종족에게 맡은 역할이 있었다.”
이엘은 로빈이 고르지 않은 반지를 제 손에 끼우며 그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어차피 그가 하는 이야기는 다 거기서 거기일 테니까. 치고 빠질 틈을 찾는 편이 더 이롭다.
“독수리는 황녀를.”
그러나 그 순간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그녀를 찾아왔다. 본능적으로 듣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불쑥 저를 찾았다.
“사자는 황제를.”
“대체 그 이야기를 왜……,”
“황자는.”
“…….”
“늑대가.”
처음 르네를 만났을 때, 이엘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에게 말한 대로 원한은 갖지 않았다. 오히려 제 목숨이 그날 그의 손에서 바스러졌다면, 이런 일을 겪지 않아도 좋았을 테니 어느 면에선 고맙기까지 했다.
“그래도 황자가 널 제법 아꼈다는 소문이 있던데.”
“…….”
“우애 좋은 오누이는 아니었나?”
그래, 그러니까 이온을 죽인 누군가도…… 분명 어떤 종족이겠거니, 하고 생각했다. 이온이 혼자 자살했을 리는 없으니까. 누군가는 그를 죽였고, 그 상대는 황궁에 원한이 깊은 종족이겠거니 생각했다.
자신을 죽였던 르네를 미워하지 않았던 것처럼, 이온을 죽인 그 누군가도 미워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그 전쟁에서 숙청 대상 1순위는 자신들이었을 테니까.
설령 그로 인해 이온은 생사의 기로에서 11년이 넘게 돌아오지 못하고 있으며, 자신에겐 불행하고 불합리한 과제가 주어졌더라도. 살아 있지도 죽어 있지도 않은 하나뿐인 피붙이를 살리겠다고, 내 인생이 엉망이 되었다 하더라도. 신을 버리고, 알면서도 악의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하더라도.
나는 ‘그 누군가’를 미워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노아를 사랑해?”
“…….”
“그가 네 오라비를 죽였는데도?”
하지만 자신은 심약한 인간이라,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것엔 차이가 존재했다. 그의 말을 들은 이엘은 허망함에, 온몸에서 기운이 쭉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이전부터 다른 건 몰라도 이간질하는 것에 있어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종족이었다. 그만큼 사람의 심리를 간파하는 것에 능했고, 특히 약점을 쥐고 흔드는 것은 타고났다. 일단 약점을 포착하기만 하면 똬리를 틀어 목을 노리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었으니까.
“그대는 참 도량이 넓군.”
“…….”
“황실을 풍비박산 낸 종족과 함께하려 했다니.”
쯧. 로빈이 짧게 혀를 차며 얼이 나간 이엘의 손에서 반지를 쑥 뺐다. 그러곤 자신이 골랐던 반지를 대신 끼워 넣었다.
“곰곰이 생각하니 퍽 웃겼어.”
“…….”
“독수리의 영지에서 널 발견했을 때. 너는 대체 얼마나 우매하기에, 자신을 죽였던 종족에게 빌붙어 있는가.”
“…….”
“아무리 늑대와 동맹이라고는 해도, 레온은 네 아비를 죽인 자가 아닌가? 그래도 네 아비잖아. 너를 황녀로 낳아 준 네 아비.”
“…….”
“하긴 네 오라비를 죽인 노아와도 잘 붙어먹었는데, 선황의 죽음 따위 크게 신경 쓰지 않았을지도 모르겠군.”
로빈은 턱을 쓸며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미미하지만 순간적인 동요가 보였다. 이 사실을 아예 몰랐던 모양이다.
온전치 못한 정신으로 겨우 버티고 있는 인간에게 더는 정신적 충격을 주면 안 된다는 것을 확실히 깨달았다. 지난 자살 사건이 남긴 교훈이었다. 그래서 로빈은 어떻게 해서든 그녀의 마음을 녹이는 것에만 일주일이 넘는 시간을 들였다.
“그런데도 넌 늑대를 사랑하나?”
하지만 여전히 늑대에 연연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분노가 치밀어서.
“그는 네 가족을 죽였는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