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
“나와 같은 감정이 아니어도 좋아. 그런 감정을 바라고 온 게 아냐.”
“…….”
“그냥. 너도 내가 보고 싶었다는 사실만으로 족하니까, 난.”
이엘은 잠시 입을 벙긋거리다가 다물었다. 레온의 얼굴이 점차 가까워졌다. 툭툭. 금색 머리카락에서 빗물이 떨어져 제 발등 위에 고였다. 어딘지 모르게 서글픈 얼굴로 아무 말도 못 하는 이엘을 바라보던 레온은 눈을 감고 그녀의 뺨 위에 짧게 입을 맞췄다가 떨어졌다.
“이렇게 보니까, 너 정말 황녀 맞구나.”
로빈이 만들어 놓은 그녀의 모습에 화가 나고 못마땅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레온의 가슴에 저민 감정은 씁쓸함과 공허함이었다.
감히 우러러보면 안 되는 존재.
레온은 이종족이 인간을 그렇게 칭할 때마다 코웃음 쳤지만, 지금의 이엘을 바라보니 절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황족이다. 그것도 계승권을 갖고 있던 황녀. 그녀의 말대로 만일 지금 누군가 제국을 재건하고 황위에 올라야 한다면, 그건 단연 그녀가 될 것이다.
그가 사랑하게 된 여자는 그런 존재였다.
“그냥 겉치레인걸요. 원치도 않았고.”
이엘이 소매 끝에 달린 앙가장트를 만지작거리며 짧게 한숨을 쉬었다. 로빈의 인형 놀이에 장단을 맞춰 주는 것도 이젠 한계였다. 게다가 시중받는 것은 불우한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했기에 자신을 배로 괴롭혔다. 이엘의 불편한 표정을 바라보던 레온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만약에, 제국이 망하지 않았더라면.”
“네?”
“너와 내가…… 만날 수나 있었을까?”
그녀는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여자였을 것이고, 자신은 연구실에서 도망친 잡종에 불과했겠지. 그 생각을 하니 쥐고 있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이런 마음을 품는 것조차 대역죄처럼 취급됐으리라.
“만날 수 없었을 거예요.”
단호한 이엘의 목소리에 레온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래……. 감히 내가 너를 생각이나 할 수 있겠어? 씁쓸함에 한숨을 속으로 삼켰다.
“그래서 지금이 감사해요.”
“…….”
“그때의 저라면 이런 일은 꿈도 못 꿨을 테니까요.”
분명 자신은 황녀궁에 유폐되어 숨죽여 살다가 황자의 황권을 공고히 다지기 위해 팔려 가듯 혼인을 올렸으리라. 그나마도 한 번이면 다행이지, 제 아비의 성정을 생각하면 이혼과 성혼을 거듭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니 자신에겐 현재의 끔찍한 세계도 감사했다. 적어도 자신의 자유를 억압하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누군가의 그림자처럼 살지 않아도 되니까.
“나도.”
“네?”
“나도 네가 내 앞에 있는 지금이, 감사해.”
레온은 손을 뻗어 이엘의 뺨 위에 묻은 빗물을 닦아 주었다. 저를 빤히 바라보는 그녀의 예쁜 눈동자에, 그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그래도 지금만큼은 네 시선이 오롯이 내게로 향하는 듯해서. 지금 이 순간만큼은 너와 내 사이를 방해하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게 슬프면서도 기뻐서.
뒤늦게 정신을 차린 이엘은 타월을 꺼내 레온에게 건넸다.
“그런데 정말 어떻게 들어온 거예요? 노아 님이랑 같이 온 거예요?”
“아니. 늑대들이 뱀의 눈을 돌린 사이에 들어왔어.”
“혹시 스완과 연결이 끊어져서…….”
“그것도 맞아. 백조가 정신을 못 차려. 기절하고 깨어나기를 반복하고 있어. 약해 빠져서 그렇겠지만.”
확인이 필요해 저지른 일이었지만 스완의 상황을 고려하지 못한 건 제 잘못이다. 죽지 않는다고 해서 고통을 못 느끼는 건 아닌데. 분명 스완도 자신과 비슷할 정도의 통증을 느꼈을 것이다.
“그래도 우논이야. 인간보다 튼튼하니까 그런 걸로 안 죽어.”
레온은 이엘이 걱정할까 봐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그는 이엘에게 무슨 말을 더 하려다가 입을 꾹 다물고는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그녀의 목에는 하얀 천이 둘러져 있었다. 아마도 자상이 남아 있겠지. 이엘은 레온이 천을 푸는 것을 막지 않았다.
흉측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이엘 자신도 제 가슴에 남은 검 자국을 볼 때마다 끔찍하다는 생각을 했으니까. 부끄럽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보기 좋은 흔적은 아니었다. 목에 난 자상은 그보다 더할 것이다.
다름 아닌 스스로 찌른 상처니까.
오드는 부러 상처를 남겨 두었다. 물론 그는 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완벽한 성력을 쓸 수는 없다. 그러나 그가 이깟 상처 하나 치료하지 못할 리 없었다. 일부러 남겨 둔 것이다. 스스로가 저지른 일에 대한 책임을 지라는 의미에서. 평생, 기억하며 살라는 거겠지.
“죽었으면 어쩔 뻔했어.”
긴 천이 바닥에 떨어지고, 드디어 보기 흉한 상처가 제 눈에 들어왔다. 레온은 사실 그녀를 만나면 상처를 확인하고 잔소리를 퍼부을 생각이었다. 자신에겐 이엘의 안전이 제일 중요했고, 스스로 죽음의 길로 들어가려 했던 어리석음을 꾸짖을 요량으로 이곳에 온 셈이었다.
하지만 막상 환부를 보니 목구멍이 턱 막혔다. 아무리 작은 상처라 할지라도 자신의 몸에 생채기가 생기면 아픔을 느끼는 건 똑같다. 그건 평생을 상처로 얼룩진 채 살아온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러니, 네 그 상처는 얼마나 아팠을까.
“정말…… 정말 죽을 뻔했네.”
“레니.”
“네가 죽으면 난 어떡하라고.”
그의 손가락이 억지로 꿰매 놓은 상처에 닿았다. 따끔함에 앓는 소리가 터져 나오자, 레온은 한숨을 쉬며 손을 거뒀다.
“너 진짜 짜증 나.”
“죄송해요.”
“죄송하다는 말 하지 마.”
“…….”
“넌 진짜…….”
자학은, 자해는 자신도 해 본 적이 없는 일이다. 그는 처음 이엘을 만났을 때 그녀가 했던 말을 아직도 기억한다.
‘저는 살아야 할 이유가 있고, 살기 위해선 무엇이든 할 겁니다.’
살기 위해서라면 어떤 일도 불사하지 않을 거라고. 제 목숨이 무엇보다 중요하니, 나는 어떻게든 살아남을 거라고. 그 다짐을 아직도 기억한다.
“죽으려던 건 아니었지?”
축축하게 젖은 목소리에 이엘은 고개를 두 번이나 끄덕였다.
“절대요. 죽으려던 건 절대 아니었어요. 정말이에요.”
“…….”
“레니. 걱정 끼쳐서 죄송해요, 정말.”
“아팠어?”
“네?”
“여기. 많이 아팠어?”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은 안 되지만, 목숨이 위태로웠다면 꽤 깊게 박혔겠지. 레온은 마치 자신이 아픈 것처럼 미간을 좁히며 조심스럽게 이엘의 목덜미를 만졌다. 또 그가 걱정할까, 이엘은 아픔을 간신히 참으며 애써 웃었다.
“괜찮아요. 오드가 치료해 줘서 이젠 안 아픈걸요.”
“거짓말하지 마.”
“그보다 흉터가 징그러워서…… 레니의 눈을 위해 안 보는 게 좋은 것 같아요.”
지척으로 가까워진 레온의 눈이 슬퍼 보였다. 마치 자신의 상처에 그의 상처를 투영시키는 것처럼. 이엘은 그를 위해 뒤로 한 걸음 물러나려 했지만, 레온이 더 빨랐다.
그의 뜨거운 입술이 제 목덜미에 닿았다가 떨어진 것이다.
“징그럽지 않아.”
“…….”
“단지 마음이 아플 뿐이야.”
자신의 갈기를 곱게 갈아 환부에 대면 이런 흉터쯤 금세 나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처음으로, 본체로 돌아가려 했다. 하지만 이엘이 그의 손을 덥석 잡아챘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러지 마세요.”
“오헬.”
“치료할 수 있었지만 일부러 남겨 둔 거예요.”
“…….”
“다신…… 다시는 이러지 않겠다고. 제 잘못을 기억하려고요.”
책임질 수 없는 말에, 갈수록 목소리가 흐려졌다.
“그러니까 갈기 주지 마세요. 전 괜찮아요.”
“왜?”
“갈기는 당신의 수명이니까……,”
“어차피 나는 이미 수명을 잃었어.”
“…….”
“내 안에 있는 영존의 빛은 꺼져 가고 있어. 언젠간 죽어, 나도.”
“…….”
“전에 내가 말했잖아. 내 갈기는, 언제든 네게 줄 수 있어.”
“폐하.”
“너는 내게 그만한 존재니까.”
이엘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겨우 이깟 상처 때문에 받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보기 흉측하시면 오드에게 부탁할게요. 차라리 그게 낫겠어요.”
“흉측한 게 아니라니까.”
“아무튼요. 받을 수 없어요.”
어차피 이제 갈기는 자신에게 필요하지 않다. 굳이 필요를 따지자면 밀로에게나 있겠지. 완고하게 거절하는 이엘을 보며 레온은 미간을 찌푸렸다. 네 고집을 어떻게 꺾겠어. 그는 한숨 끝에 천을 들어 그녀의 목 위로 둘러 주었다.
“흉측하지 않아.”
“……네.”
“내 눈에 네가 흉측할 리 없잖아.”
“…….”
“넌…… 그 누구보다 빛나, 내겐.”
그 말을 하며 레온은 아주 잠깐,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그가 유일하게 다정해지는 상대 앞에서.
“원래는 널 데리고 갈 생각으로 왔는데.”
“…….”
“내가 가자고 해도 넌 안 갈 것 같고.”
무작정 영지에 쳐들어가면 뱀들로부터 이엘을 보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늑대가 뱀의 눈과 코를 막는 사이, 자신이 왕성으로 침입해 이엘을 대피시키려 했다. 그게 레온이 온 큰 목적이었다.
“뱀의 왕이…… 네게 허튼짓은 안 했어?”
그의 걱정 어린 말투에 이엘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레온은 크게 안도했다. 그래, 네가 안전하면 됐어. 마음 같아선 등에 들쳐 업어서라도 여길 빠져나가고 싶지만 네가 싫어할 테니까. 대신 희소식을 전해 주었다.
“지원군이 오고 있어.”
“지원군이요?”
“어. 상당한 수가 올 테니까 우리 쪽은 걱정하지 마.”
“그 얘기는……,”
“그래. 언제든 쳐들어올 수 있단 소리야.”
사실 지금 당장 그녀를 데리고 빠져나가도 뱀은 반격할 수 없을 것이다. 뱀 역시 동맹 종족이 상당하겠지만, 지금 당장의 모인 개체수로 따지자면 이쪽이 더 우세하니까. 게다가 전쟁이 일어나는 곳은 뱀의 영지이니, 피해 정도는 뱀 쪽이 몇 배는 심할 터라 곧바로 추격하진 않겠지.
그러나 뱀을 적으로 돌리거나 멸족시켜서는 안 된다. 그녀가 원하는 미래는 완벽하진 않아도, 지금 이상으로 균형이 무너져서는 안 되는 곳이었다. 서로 간의 피해는 최소한으로만. 그 말을 곱씹으며 레온이 아쉬움에 한숨을 쉬었다.
“네가 준비가 되는 대로 신호를 보내 줘. 언제든 달려올게.”
“네. 알겠습니다.”
“오헬.”
“네.”
“방심하지 마. 뱀의 왕은 비열한 놈이야. 그자는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선 무엇이든 할 테니까.”
“명심할게요.”
발길이 떨어지질 않아서, 레온은 붙박이라도 된 양 그 자리에 한참이나 어물거렸다. 그나마 왕성에 늑대들이 들어와 있어서 제 냄새가 가려졌겠지만 오래 머무를 순 없다. 노아에겐 그녀를 데려오겠다며 큰소리까지 쳤는데……. 막상 저 얼굴을 보니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
“……다치지 마.”
“레니도요. 다치지 마세요.”
“…….”
“만나러 와 줘서 고마워요. 레온 님 얼굴을 보니까 불안했던 게 사라졌어요.”
너도 우리만큼이나 불안했겠지. 아니. 비교조차 못할 정도로 더했겠지. 의연한 척하는 건 어릴 때부터 배워 온 습관인 걸까. 레온은 그녀를 대신해 한숨을 삼켰다. 아쉽지만 이만 떠나야 할 시간이다. 늑대와 이엘의 사이가 의심받아서는 안 되니까. 이제 자신은 빠질 타이밍이었다.
레온은 들어왔던 창틀 위에 올라섰다. 일라이저와는 달리 우논이니 벽쯤은 가볍게 타고 내려갈 텐데도 이엘은 걱정이 돼 그의 뒤를 쫄래쫄래 쫓아왔다. 걸리적거리는 긴 드레스를 입고도 곧잘 쫓아오는 이엘을 쳐다보며 레온은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이 상황에 귀엽다는 생각까지 든다는 건, 자신이 제정신이 아니란 소리겠지.
“조심히 가세요. 저도 곧 갈게요.”
“너야말로 몸조심해. 독수리의 왕이, 두 번은 안 봐줄 거래.”
“…….”
“조금이라도 네게 문제가 생기면 그냥 널 낚아채서 도망친다고 했어. 그쪽은 고지식해서 한번 마음을 먹으면 그대로 행할 테니까, 내 말 명심하고.”
농담을 섞은 말에 이엘이 웃었다. 레온은 그녀의 미소를 가만히 지켜보며 한쪽 발을 창밖으로 내밀었다. 그러나 다시 다리를 거둬 창틀 위에 온전히 서더니, 쭈그리고 앉아 그녀와 시선을 마주했다.
“마지막으로.”
“네?”
“작별 인사, 하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