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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187화 (187/488)
  • 187화

    *

    ‘스스로 찔렀어.’

    ‘뭐……?’

    ‘스스로 목을 찔렀다고.’

    노아는 땅으로 내려앉은 독수리의 말에 할 말을 잃고 굳어 버렸다. 르네는 피곤한 얼굴로 마른세수를 하다가 높게 솟은 로빈의 왕성을 노려보았다.

    ‘빌어먹을 놈이 나타니엘에게 손을 댔다.’

    ‘지금, 뭐라고…….’

    ‘진정해. 나타니엘이 일부러 노린 행위 같다. 그 뒤로 로빈은 그녀의 곁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으니까.’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노아는 두 주먹을 세게 쥐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르네의 입에서 터져 나온 것들은 죄다 충격적인 소식들뿐이었다. 그러나 뱀이 손을 댄 것도 역겹고 화가 났지만, 가장 화가 난 건 이엘의 자해였다.

    왜? 왜 그렇게까지……?

    ‘분명 우리가 준 알갱이를 갖고 있었다.’

    ‘…….’

    ‘근데도 터뜨리지 않았다는 건, 그 상황을 기다렸단 뜻이겠지.’

    하늘에서 모든 걸 지켜보고 있던 자신만큼 비참하고 괴로운 자도 없으리라. 마음 같아선 뱀의 목을 찢고, 이엘을 낚아채 빠져나오고 싶었지만 더 충격적인 건 그 뒤의 일이었다. 스스로 단검을 들어 목을 찢었다. 명백한 자살행위였다.

    그 순간 르네는 언젠가 꿨던 꿈이 떠올랐다. 친구였던 스티븐의 손이 제 손을 잡고, 이엘의 목을 검으로 갈랐던 그때의 꿈이. 피가 분수처럼 솟구쳐 제 얼굴을 덮쳤던 꿈속의 이엘이, 끔찍하게도 제 눈앞에 보였다.

    ‘……나자르가 치료했고, 목숨이 붙어 있는 건 확인했다.’

    ‘…….’

    ‘노아. 무작정 쳐들어가면 안 된다.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해.’

    ‘…….’

    ‘나타니엘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두고, 탈출하는 게 좋을 듯하다.’

    그로부터 일주일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그사이 스완은 정신을 차리고 쓰러지기를 반복했다. 그나마 물속에 있을 땐 상태가 호전되는 편이라, 깨어난 뒤로는 줄곧 호숫가에 머물고 있었다. 이엘과 자신 모두 지친 탓인지 연락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레온이 영지 내로 잠입하기 위해 늑대들이 영지의 동쪽을 공격해 시선을 끌었다. 그 틈에 발 빠른 레온은 영지 안으로 들어가는 것에 성공했다. 그리고 며칠간의 눈속임용 접전 끝에 노아는 로빈과 협상의 자리를 마련했다.

    뱀의 영지는 이전에 왔을 때와는 조금 달라진 분위기였다. 축축하고 기분 나쁘던 곳에 아주 미미하게나마 햇볕이 내리쬐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게 되레 늑대들의 기분을 더럽게 만들었다. 누구 때문인지 알 것 같아서.

    “어서 와, 노아.”

    저 멀리 뱀들을 대동하고 나타난 로빈이 그를 맞아 주었다. 노아는 안으로 들어서면서부터 그녀의 냄새를 찾았다. 어딘가에 있을 텐데……. 조급함에 목이 탔지만 억누르고 로빈의 손을 맞잡았다.

    “그래. 자리를 마련해 준 것에 진심으로 고맙다.”

    “별말씀을. 일단 들어와.”

    왕성으로 갈수록 그녀의 냄새가 진해졌다. 늑대들도 느낀 건지 잔뜩 예민해져 털을 곤두세웠다. 노아는 태연하게 로빈의 뒤를 따르며 안내받은 응접실로 향했다. 그리고 화려하게 꾸며진 응접실 안에 들어서자마자 그는 숨을 멈추고 말았다.

    “그대를 보고자 손님이 왔군.”

    로빈은 익숙하게 앉아 있던 그녀를 에스코트하며 일으켜 세웠다. 이엘은 오랜만에 마주한 노아를 보며 우아한 귀족식 인사를 했다.

    “오랜만입니다, 노아 님.”

    “…….”

    “로빈 님께서 당신이 저를 보러 왔다고 하셔서 놀랐습니다.”

    “…….”

    “저는 여전히 당신이 제게 화가 났다고 생각했거든요.”

    얼굴이 또 반이나 수척해졌다. 목 위로 둘러진 천이 그의 눈을 거슬렸다. 노아는 마른침을 삼키며 입을 다물었다. 참담한 그녀의 모습만큼이나 제 마음도, 제 심정도 참담해졌다.

    차라리 자기 좀 데려가 달라고 말하면 좋겠다. 그냥 이 자리에서 뱀을 모조리 죽이고 늑대의 영지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해 주면 좋겠다.

    황위 따위 관심 없다고, 그냥 늑대와 살고 싶다고 해 주면 좋겠다. 그 말 한마디면 나는 그렇게 할 텐데. 생명이 약동하는 미래 따위, 나는 너만 있으면 포기할 수 있는데.

    ……나는 그딴 것, 필요 없는데.

    “정말 저를 용서하셨습니까……?”

    그런데 너는 여전히 그 자리에 연연하고 있구나. 여전히 너는 황제의 길에 발이 묶여 있어. 그깟 황도가 뭐라고. 그깟 일, 대체 누구 좋으라고 하는 거야?

    “제가 당신들의 뒤통수를 치고 달아났는데, 용서해 주실 수 있나요?”

    노아가 헛웃음을 삼켰다. 너는 참 이기적이군……. 그토록 스스로를 이기적이라고 말하더니, 이제야 무슨 의미인지 알겠다. 독하고 이기적이구나, 너는. 내 마음이 얼마나 괴로울지, 배려하지도 않아.

    나와 다른 이들이 원하는 건 줄 마음이 없어, 너는.

    “그래.”

    “…….”

    “너를 달라고, 요청하러 왔다.”

    노아가 담담히 그녀를 바라보았다가 냉랭하게 시선을 돌렸다.

    “로빈, 우리에게 보호석이 몇 개 있다. 세잔티노에서 주워 온 것 중 일부는 파괴했고, 또 일부는 남겨 두었다.”

    “그래?”

    “남은 보호석을 너희에게 주겠다.”

    “대가로 그녀를 달라?”

    “정확히는 황녀의 목을 줘.”

    좌중이 술렁였다. 뱀들은 미간을 찌푸리며 별 이상한 소릴 다 듣는다는 표정을 짓고는 저희끼리 눈짓했다. 그리고 로빈은 제 손 위에 잡힌 이엘의 손이 잠깐 힘을 잃고 흔들리는 걸 놓치지 않았다.

    “황족은 11년 전에 전부 죽었어야 했다.”

    “…….”

    “살아 숨 쉬는 꼴을 볼 순 없지.”

    “유일한 암컷인데도?”

    “이전에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

    “저지른 일에 대한 대가는 받아들여야 한다.”

    그게 설령 종족의 멸망이라 할지라도.

    노아는 정말 그렇게 생각했고, 지금도 변함없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는 단 한 번도 그녀에게서 새끼를 얻어 종족을 부흥시키겠단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되레 이엘이 아이를 갖지 않길 바랐다.

    자신들의 죄를 그녀가 떠안아서는 안 된다.

    “황녀의 목을 쳐라. 그게 협상의 조건이다.”

    “웃기는군.”

    “…….”

    “너무 냉혹한 것 아냐? 아무리 황녀라지만 그래도 꽤 긴 시간을 너희와 함께 지낸 걸로 기억하는데.”

    로빈은 이엘을 딱하다는 듯 쳐다봤다. 이엘은 식은 눈동자로 노아를 쳐다보고 있었다. 애초에 늑대들에게 돌아갈 수 있을 거란 기대도 하지 않은 표정이었다. 도무지 연기로는 보이지 않았다.

    아. 이래서 줄곧 거절했나? 돌아가도 받아 주지 않을 것 같아서? 늑대들이 황족을 향해 갖는 원한은 상상을 초월한다. 충성심이 깊었던 만큼 배신감은 더 컸겠지. 그러니 얕게나마 갖고 있던 호감도, 그녀의 신분 앞에선 박살이 났을지 모른다.

    “우선은 고민해 보지.”

    “…….”

    “너에겐 버려진 인간에 불과하겠지만, 내겐 아니거든.”

    그녀는 아랫입술을 물고 울음을 참는 것 같았다. 적어도 로빈이 보기엔 그랬다. 그래서 그는 늑대들의 치졸한 제안에 조금은 열이 받은 건지 모른다.

    *

    먼저 방 안으로 돌아온 이엘은 밭은 숨을 토했다. 노아는 눈치가 빠른 편이었다. 제 눈을 보기만 해도 무슨 의미로 그런 말을 했는지 쉽게 알아차렸다. 그 덕에 로빈의 의심은 피한 것 같았다.

    일단 큰 고비는 넘긴 것 같은데. 그 생각을 하며 손수건을 들어 눈가를 꾹꾹 찍었다. 연기를 위한 거짓 눈물이었지만, 상처받은 듯한 노아의 얼굴이 떠올라 감정이 복받친 것도 사실이었다. 자신도 안다. 그는 자신의 탈출을 그 누구보다 바라고 있을 사람이니까.

    하지만 코앞이다. 로빈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적기. 모든 걸 포기하고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왔다. 어쨌든 노아가 돌아가기 전에 한 번쯤 둘만 만날 수 있게 된다면 좋을 텐데. 기회를 엿봐서…….

    톡― 톡― 톡―

    유리창에서 들린 미세한 소리에 이엘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카르인가? 이쪽 창문으로 올 사람은 이카르와 일라이저밖에 없다. 드레스 끝을 붙잡고 서둘러 창가로 향하던 이엘은 예상치 못한 손님을 발견하곤 그 자리에서 우뚝 멈춰 서고 말았다.

    “데리러 왔어.”

    “레니……?”

    “문 열어 줘.”

    주춤하던 이엘이 창문을 열어 주자, 비에 젖은 머리를 가볍게 털어 내며 레온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머리카락을 만지던 손을 멈추고 오랜만에 만난 이엘을 가만히 쳐다봤다.

    “레니가 어떻게…….”

    “…….”

    “레니?”

    이종족들에게 통용되는 말이 있다. 인간은 반짝반짝한 존재다. 신에게 사랑받고, 신의 선택을 받아 특별한 종족. 존재 자체가 고귀하고 중해서, 제아무리 이종족이 인간에 비해 화려하고 아름답다 할지라도 비교 자체를 할 수 없다고. 태생이 귀한 존재라 함부로 우러러보는 것조차 안 된다고.

    레온은 그 말을 믿지 않았고,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레온 님?”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한참이나 수척해 보였는데도 여전히 아름답다. 네 생명력이 정말 아름다워서 내 눈을 멀게 만들어. 비단 그녀가 아름다운 옷을 입어서만은 아니다. 물론 너무 오랜만에 봐서, 그동안 이렇게 만나기를 오래도록 고대했기에, 그래서 애틋한 마음이 가중된 것일 수도 있지만.

    “레니. 많이 젖었네요. 그동안 잘 지냈어요? 어디 아픈 곳은 없구요?”

    “……보고 싶었어.”

    쿵쿵― 레온은 저도 모르게 심장께를 꾹 눌렀다.

    긴 생애를 살면서, 이렇게나 심장 소리가 크게 들린 적이 있던가. 단순한 그리움 때문만이 아니었다. 레온은 제 눈앞에서 반짝거리는 그녀에게 온 신경이 빼앗겨 제대로 된 사고조차 하기 어려웠다. 줄곧 억눌러 왔던 것들이 혼잡하게 뒤섞이더니 눈 깜짝할 새에 터져 버린 것처럼.

    닿고 싶다. 저 작은 얼굴과 발간 뺨 위에 손을 얹고 한 번만 쓸어 보았으면……. 닿고 싶고 만지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혔다. 내가 네게, 네게…….

    아. 정말 오늘의 너는 미치도록 아름다워서 나를 괴롭게 만들어.

    “네 잘못이잖아, 이건…….”

    “네?”

    나 입 맞춰도 돼? 더는 숨길 수가 없어서 하마터면 그렇게 내뱉을 뻔했다. 그만큼 오늘의 너는 미치도록 아름다워서.

    화려한 장신구보다 더 화려한 네 미소에, 불에 덴 것 같은 내 심장을 감출 수가 없다. 레온은 주먹을 살짝 쥐었다가 펴더니, 성큼성큼 걸어와 이엘의 앞에 섰다. 의문을 담은 이엘의 눈앞에 금발의 청년이 가까워졌다. 레온은 조심스레 이엘의 손을 잡더니 억지로 감정을 삼키며 말했다.

    “역시 넌 내게 있어 가장 아름다운 존재야.”

    “레니.”

    “네가 너무…… 너무 보고 싶었어.”

    그에게 잡힌 손 안이 뜨겁고 축축했다. 보고 싶었단 말 한마디에 그간 묻어 두었던 온갖 감정이 실려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단지 말뿐인 고백이었는데도.

    레온의 타오르는 금색 눈동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여전히 솔직해서. 자신을 향한 열망을 숨기지 않고 낱낱이 보여 주고 있다.

    “저는…….”

    “너도 내가 보고 싶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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