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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186화 (186/488)
  • 186화

    “아……!”

    그 순간 뒤에서 들린 비명 소리에 로빈은 빠르게 창문을 닫고 침대 가까이 다가갔다. 악몽이라도 꾸는 것처럼 식은땀을 흘리며 미간을 일그러뜨린 이엘이 파들파들 떨며 시트를 꾹 쥐고 있었다. 게다가 붕대가 풀리면서 상처가 벌어진 건지 다시 새빨간 피가 흐르고 있었다.

    “오드! 오드를 불러와라!”

    왕의 다급한 목소리에 밖에서 대기 중이던 뱀들이 기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로빈은 점차 번져 가는 붉은 피를 보며 주먹을 세게 쥐었다. 어떻게든 그녀의 고통을 덜어 주고 싶었지만 손조차 댈 수 없었다. 제 손이 닿으면 그녀가 또 발작할 것만 같았다.

    어차피 모를 텐데도 본능적으로 손을 댈 수가 없다. 그 정도로 충격이 컸던 건가. 지워지지 않는 잔상에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곤 스스로가 이해되지 않아 자조했다.

    “오헬.”

    제 이름을 부르는 뱀의 목소리를 들으며 이엘은 앓는 소리를 뱉었다. 이걸로 그의 시선을 돌렸으니 일라이저는 시간을 벌었을 것이다. 그래 봤자 몇 분이겠지만, 그 경비를 뚫고 여기까지 온 의지를 보면 뱀에게 쉽게 잡힐 것 같지는 않았다.

    침대 한구석이 푹 꺼졌다. 로빈은 그녀의 곁에 앉아 짧은 한숨을 내쉬며 이불을 더 끌어 덮어 줄 뿐이었다. 이엘은 속으로 숫자를 세다가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떴다.

    “오헬?”

    “…….”

    “정신이 드나?”

    때마침 뱀들과 함께 안으로 들어선 오드가 그녀를 발견하고 달려왔다. 오드는 인상을 찌푸리며 손을 뻗어 이엘의 목에 댔다. 무언가 중얼거리는 그의 입에서 맑은 기운이 새어 나와 이엘을 덮었다.

    “엘. 괜찮니?”

    “응.”

    “정말…… 정말 다행이야…….”

    오드가 한숨을 흩뿌리며 이엘을 끌어안았다. 그때까지도 로빈은 뒤에서 묵묵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한참이나 안부를 주고받던 오드는 다른 뱀들과 함께 리플의 손에 이끌려 방에서 쫓겨났다. 쾅, 문이 닫히고 이엘은 로빈과 단둘이 남겨졌다.

    “…….”

    “…….”

    그는 말이 없었다. 딱히 저를 걱정하는 눈빛도 아니었고, 화가 난 것 같지도 않았다. 언제나 그렇듯 로빈은 감정이 전혀 드러나지 않은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엘은 그의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등을 돌려 누웠다.

    조금 전처럼 침대 한쪽이 푹 꺼졌다. 제 등 뒤에 앉은 로빈의 숨소리가 느껴졌다. 그리고 한참 만에 그가 입을 열었다.

    “늑대가, 널 되찾으러 온 모양이더군.”

    그렇잖아도 이엘은 몇 번이나 스완을 불렀다. 자신이 살아 있으니 그 역시 살아 있겠지만, 적지 않은 타격을 받았을 테니 걱정이 앞섰다. 계속해서 그를 찾았지만 연결이 완전히 끊어졌다.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스완이 쓰러졌으니 노아가 작전을 전부 취소하고 영지로 들어오려 하는 거겠지.

    “노아가 널 반려로 인식했나?”

    늑대들의 반려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지독한지 잘 알고 있다. 만일 그녀를 반려로 인식했다면, 노아는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내 영지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그녀를 데려가겠지. 애초에 늑대가 이엘을 내쳤다는 소문을 온전히 믿지 않았다. 무슨 속셈이 있어 잠시 영지를 떠나 인간에게 의탁했다는 게 더 믿을 만했다. 보지 않고는 믿을 수가 없지.

    “너는 어떠하지?”

    “…….”

    “너도 그를 사랑하나?”

    둔. 그래, 네 말대로 난 둔이면 족하다. 어차피 네 첫째 아이는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데려갈 거니까. 내 아이를 배든, 늑대 새끼를 갖든. 솔직히 그건 나와 아무 상관이 없다. 내 노력으로도 네가 마음을 열지 않는다면, 기꺼이 늑대에게 안겨 주면 된다. 어떤 형태로든 네가 임신만 한다면.

    분명 그렇게 생각했는데.

    “나타니엘.”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말하지 않았나요?”

    무거운 몸을 일으키며 잠시 휘청거렸다. 일순 로빈이 빠르게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지만, 이엘은 평소처럼 그의 손을 매섭게 쳐 냈다.

    “결국 살아 버렸네.”

    “…….”

    “보는 앞에서 죽어 버리려고 했는데.”

    허무하다는 듯 말하는 그녀의 옆모습을 보며 로빈은 헛웃음을 삼켰다. 아무렇지 않게 그때의 상황을 이야기하는 이엘과는 달리, 자신은 그때를 떠올리면 눈앞이 아찔해졌다. 정말로 죽어 버리는 줄 알았으니까. 정말로…… 내가 바라고 노력했던 미래가 박살이 나는 줄 알았으니까.

    로빈은 이제 연구실에 관한 건 모두 버렸다. 고지가 코앞이었지만 그쪽보다 이쪽이 더 기대할 만하다고 판단했다. 주도권이 완전히 옮겨졌다.

    “재미없어졌네.”

    “…….”

    “폐하의 표정이 너무 식상해요.”

    눅눅한 녹색 눈동자 안에 이엘이 온전히 담겼다. 입으로는 재미없다고 말했지만, 그의 눈엔 장난기가 묻은 그녀가 오롯이 담겼다.

    “다 해 줄 것처럼 구네.”

    기꺼이. 그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녀의 환심을 사는 편이 더 빠르다는 걸, 머리 좋은 뱀은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

    “아가씨의 취향이 무엇인지 몰라, 다양하게 준비하였습니다.”

    “…….”

    “부족하지만 즐겁게 들어 주셨으면 합니다.”

    지휘자의 인사 후에 화려한 합주가 시작됐다. 높은 곳에 로빈과 나란히 앉은 이엘은 그가 건넨 오페라글라스를 받았다. 여러 종족의 영지를 다녀봤지만 로빈의 영지만큼 인간의 것이 보존되어 있는 곳은 없었다. 성 안의 홀 전체를 음악실로 개조할 때부터 알아보긴 했지만, 영지 내에 오페라 하우스까지 있을 줄이야.

    “그대의 취향이 궁금하다는데.”

    “…….”

    다정한 뱀의 목소리에도 이엘은 입을 열지 않았다.

    “늑대의 소식이 궁금하지 않나?”

    무슨 말을 붙여도 이엘이 대답할 기미를 보이지 않자, 부러 늑대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나 그녀는 늑대의 소식에도 목을 꼿꼿이 세우고 정면을 응시할 뿐이었다. 건조한 반응에 로빈은 잠시 침묵했다.

    이엘은 그의 말을 한 귀로 흘리는 척했지만 하나도 놓치지 않고 듣고 있었다.

    늑대의 침입 소식이 전해지고 일주일이 지났다. 로빈이 왕성에서 한 발짝도 떼지 않은 걸로 보아 뱀 쪽이 고전하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여전히 스완과는 연락이 되지 않아서 불안했지만, 뱀에게 여유가 있단 뜻은 노아가 병력을 전부 끌고 온 게 아니라는 소리가 된다.

    무작정 병력을 모조리 끌어 쳐들어왔다면 뱀 쪽도 피해가 만만치 않았을 테니까. 일단 그걸로 만족해야 하는 걸까. 부디 스완과 연락이 닿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노아가 협상을 위해 영지에 들어오길 청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로빈의 다음 말에 이엘은 마른침을 삼켰다.

    ……계획과 틀어졌다. 여러 경우의 수 중에 저런 계획은 없었는데. 독수리들이 하늘에서 지켜보았을 것이다. 자신이 무사하다는 걸 늑대들에게 전해 주지 않은 걸까?

    아니. 설령 전달받았어도 노아라면, 그 남자라면 자신의 눈으로 내가 무사하다는 걸 확인하려고 했겠지.

    어쩌면…… 내 선택에 화가 났을 수도 있고. 그는 아무것도 모를 테니까.

    “황녀. 그대가 원한다면 허락해 주지.”

    그날 이후로 많은 게 바뀌었다. 로빈은 더 이상 그녀에게 연구를 들먹이며 협박하지 않았고, 뱀들의 태도는 더욱더 정중해졌으며, 왕성은 그녀의 손길을 타고 싶어 했다. 로빈이 속내를 보여 주지 않는 건 여전했지만, 그의 눈엔 간간이 자신을 향한 애욕이 담겼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로빈은 무엇이든 그녀의 뜻대로 따라 주었다. 정말 간이고 쓸개고 빼 줄 것처럼.

    “그렇게 하세요.”

    “…….”

    “어차피 그래 봤자 당신이 날 놔줄 것도 아닌데.”

    마치 모든 것을 포기한 듯한 말투였다. 예리한 눈으로 그녀의 심중을 파악하려고 했지만, 이엘은 끝내 속을 보여 주지 않았다. 로빈은 턱을 괴고 연주에 집중하는 이엘을 지켜봤다. 도무지 속셈을 모르겠다. 마치 자신 같았다. 겉을 꽁꽁 포장해, 속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 모습이.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건, 그녀의 상태가 점점 더 나빠지고 있단 사실이었다.

    거의 매시간을 붙어 지내고 있었다. 그는 하루 일과 중 대부분을 이엘과 지내는 것에 쏟아부었다.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 이런 짓 저런 짓까지 했지만 이엘은 그의 행동에 관심이 없었다.

    깨어난 뒤로 그녀의 감정 기복은 심하게 요동쳤다. 어떤 날은 무기력했다가, 또 어떤 날은 날을 세우며 소리를 질렀고, 또 어떤 날은 창틀 위에 앉아 멍하니 자신만 바라보기도 했다. 그러다가도 어떤 날은 기분이 좋아서 보기 드문 미소를 보여 주기도 했다.

    정말 미치기라도 한 걸까?

    미치면 곤란하지. 아이를 낳아야 되는데 미치면 가질 수 없잖아. 온전한 정신 상태가 아니면 아이를 가질 수 없다. 그래……. 그래서 잘해 주는 거야. 새끼를 가져야 하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이엘을 보호하고 달랬다.

    그러나 황녀는 점점 의지를 잃어 갔다. 원한다면 늑대에게 보내 주겠다는 말에도 시큰둥했다. 유일하게 흥미를 보이는 건 저딴 연주뿐이었다.

    그녀의 마음의 병은 점점 더 깊어져 가는 것 같았다.

    “황녀.”

    “…….”

    “지금도 죽고 싶나?”

    그제야 들고 있던 오페라글라스를 내려놓는다. 그녀가 자신을 쳐다보더니 왼쪽 목덜미에 손을 댔다. 여전히 남아 있는 그날의 상흔을 만지작거리더니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죽는 것도 제 마음대로 할 수가 없는데, 제가 어떻게요?”

    “나타니엘.”

    “그런 생각을 가끔 해요.”

    “…….”

    “그냥 당신에게 아이를 낳아 주고 확 죽어 버릴까 하는.”

    듣던 중 반가운 소리인 게 분명한데도, 이상하게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로빈이 다급하게 주먹을 말아 쥐는 걸 본 이엘이 소리 없이 웃으며 다시 오페라글라스를 들고 악단을 쳐다봤다.

    “근데 당신이 어떻게든 날 살리려고 할 것 같아서.”

    “…….”

    “그냥 차라리 이렇게 늙어 가면 날 포기하겠거니 싶어서.”

    이엘의 말에 로빈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 한 가지를 간과하고 있었다.

    “내 몸이 자연히 불임이 되면 쓸모가 없어질 테니까.”

    “나타니엘.”

    “당신 입으로 말했잖아.”

    “…….”

    “불임인 암컷은 필요 없다고.”

    인간은 수명이 존재한다. 우논인 자신은 별일이 없는 한 영존하겠지만, 그녀는 다르다. 유일한 제 희망은 시간이 지날수록 빛이 꺼져 가겠지. 나이를 먹는다는 건 그런 의미였다.

    “걱정 말아요. 나도 애 하나는 낳고 싶어.”

    “…….”

    “내가 받지 못한 사랑을, 한 번쯤 주고는 싶어요.”

    공중에서 바스라진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로빈은 갈증을 느꼈다. 아무 상관 없었는데. 네 아이가 내 손에 들어온다면, 그 아이의 아비 따위 누가 되든 상관없었는데.

    오페라글라스를 내린 이엘이 로빈을 쳐다보며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아무런 악의도 없는 미소였지만, 로빈에겐 이상할 정도로 서늘하게 느껴졌다.

    “뱀의 새끼만 아니면 되거든요, 난.”

    네 아이의 아비가, 왜 내가 되면 안 되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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