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그녀의 수어를 멍하니 쳐다보다가 제 옆에서 나부끼는 옷자락들을 겨우 붙잡았다. 이엘은 온 힘을 다해 그를 끌어 올렸다. 일라이저도 멍한 시선을 치우고 끈을 잡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천을 붙잡는 두 사람의 손이 모두 엉망으로 변해 갔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온 힘을 다해 올라온 일라이저가 창문을 통해 그녀의 방으로 들어섰다.
― 일. 괜찮나?
“황녀님…….”
― 그건 됐고, 네 몸은……,
“전하…….”
― …….
“전하, 정말로 전하께서…… 아…….”
남자는 서글픈 울음을 터뜨리며 이엘의 발치에 엎드렸다. 그는 굵은 눈물을 떨어뜨리며 엉망이 된 얼굴로 그녀를 올려봤다.
“다, 다행…… 너무, 그리워서…… 전하…… 저, 전하…….”
“…….”
“사, 살아 계시다니…… 제가, 불충한 제가…….”
그녀의 긴 드레스 끝에 일라이저는 입술을 맞췄다. 바닥에 끌려 엉망이 된 녹색 드레스 끝단 위에, 그는 숭고한 입맞춤을 했다.
“당신의 종이…… 이곳에…… 당신께, 감히 왔습니다.”
보는 사람조차 눈물이 날 정도로 절절한 애정을 내비치며.
“전하를 알아보지 못한, 미천한 당신의 신하를, 용서해 주십시오…….”
자신을 아르세니온으로 착각할 때완 전혀 다른 태도였다. 그때의 일라이저는 충성이 가득 찬 눈동자로 제 손등에 이마를 얹었다.
“아, 아닙니다…….”
“…….”
“전하께…… 감히 전하께 희생을 요구한, 제가, 저를…….”
“…….”
“저, 전하…… 무슨 벌이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지금의 일라이저에겐 충성보다는 서글픔과 애절함에 가까운 무게가 느껴졌다. 그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더러워진 제 드레스 끝에 하염없이 입맞춤을 했다. 옷 끝이 그의 물기로 축축이 젖어 간다.
“일라이저.”
이엘은 한쪽 무릎을 접어 앉아, 엉망이 된 그와 시선을 맞추었다. 눈물로 얼룩진 남자의 눈가를 손수 문질러 닦아 주기까지 했다.
“이상하구나.”
“…….”
“왜 그렇게 서럽게 우는 것인가?”
너무 좋아서요. 전하를 다시 뵐 수 있다는 게, 당신의 모습을 다시 보게 되었다는 게…… 저를 너무 행복하게 만들어서요. 그래서 배덕감이 듭니다. 당신껜 절망밖에 보이지 않는 세상인데, 신하된 자가 감히 불충한 마음을 품게 되어서.
전하. 저는…… 감히 이런 마음을 품어서도 안 되는 존재이지만, 저는…… 다시 전하를 뵐 수 있다는 게…….
“왜. 내가, 황자가 아니라 실망하였느냐?”
그녀의 무감한 물음에 일라이저는 즉시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왜 우는 것이냐?”
“…….”
“일어나라. 바닥이 차갑다.”
제 앞으로 다가온 그녀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비에 흠뻑 젖어 물이 뚝뚝 떨어졌다. 일라이저는 그녀의 침실이 더러워질 것을 걱정하며 그 자리에 굳은 것처럼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이엘은 그를 힐끔 쳐다보다가 타월 두 장을 꺼내 그에게 건넸다.
“그걸로 몸을 닦도록 해라. 그대가 입을 만큼 큰 옷이 내겐 없으니 우선 말리도록 하자.”
차분하게 그녀의 입술을 통해 말귀를 알아들은 일라이저는 타월로 대충 몸을 닦았다. 아무리 옷을 쥐어짜 내도 물이 계속 떨어지자, 결국 이엘은 그에게 옷을 벗는 게 어떠냐고 물었다.
“어차피 오래는 못 머무를 테니, 로브라도 두르고 있거라.”
“…….”
얼굴이 반쯤 붉어졌지만, 그녀의 말대로 이곳에 오래 있을 수 없는 형편이라 서둘러 옷을 벗어 던졌다. 고작 상체만 드러냈을 뿐인데 나체라도 된 것처럼 부끄러워져 그가 미간을 살풋 찡그렸다. 그 모습에 이엘은 소리 없는 웃음을 삼켰다.
― 나를 황자로 생각할 땐 내 앞에서 옷을 거침없이 벗지 않았던가?
― ……전하께 송구할 따름입니다.
― 됐다. 이런 걸로 부끄러워할 나이는 지났다.
그녀가 웃음을 머금은 채 저를 놀리자, 일라이저는 다시 얼굴이 새빨개졌다. 별일 아닌데도 황녀의 앞에 서면, 모든 게 별일이 되어 버린다.
― 게다가 그대가 물에 빠졌을 때, 나는 그대를 살리기 위해 별의별 수를 다 썼다.
― …….
― 그러니 신경 쓰지 마라.
이엘은 불편할 그를 위해 한 말이었지만, 일라이저는 되레 귓불이 홧홧해졌다. 그녀를 황자로 알았던 때에도 부끄러웠는데, 하물며 지금은……. 꿈결에 칭얼거리는 자신을 달래고 열이 내려갈 때까지 맨살로 자신을 안아 주었던 게 떠올라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리고 차차 부끄러움을 넘은 황송함이 밀려와 일라이저는 한참이나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아직도 제 눈앞에서 움직이는 사람이 황녀라는 사실을 믿지 못하고 있었다. 솔직히 일라이저는 지금 상황이 금방이라도 깨질 꿈 같아서,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그녀의 뒷모습만 좇기 바빴다.
이엘은 그런 일라이저를 두고 로빈이 빈틈없이 채워 준 투왈렛 룸으로 건너가, 제일 크고 색이 짙은 로브를 꺼내 왔다. 그러곤 타월로 머리를 말리는 그의 몸 위에 친히 옷을 둘러 주었다. 그녀는 지척으로 가까워진 일라이저와 시선을 마주치며 은밀히 손짓을 했다.
― 지하에 연구실로 가는 통로가 있다.
― 예.
― 이건 그 길로 가는 지도다. 상세하게 그려져 있으니 보는 게 어렵진 않을 거야.
― 예.
― 그대는 곧장 이곳으로 내려가, 연구실로 가는 입구의 비밀번호를 알아내도록 해라.
연구소에서 쓰던 보안 체계는 대체로 지문 인식이었다. 따라서 뱀들은 같은 것을 사용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새로운 보안 시스템을 사용하자니, 능력이 따라 주지 않았겠지. 일단은 가장 단계가 낮은 비밀번호를 설치하고 병력의 대부분을 지하에 배치해 놓는 게 최선이었을 것이다.
그 말은 즉, 뱀의 눈만 속이면 보안을 뚫는 건 어렵지 않다는 소리다. 그녀가 스스로 하면 좋겠지만 자신에겐 계속해서 감시가 붙어 있으니 손이 더 필요했다. 그래서 부러 일라이저를 이곳으로 불러들인 것이다. 영리한 그라면 충분히 해낼 수 있을 테니까.
“할 수 있겠나?”
“하겠습니다.”
“…….”
“반드시. 반드시, 전하께서 탈출하시도록, 제가 목숨을, 걸겠습니다.”
가문의 뜻대로 무작정 자신을 따르던 그때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일라이저의 갈색 눈동자는 강한 의지와 집착으로 생기가 넘쳐흐르고 있었다. 빙그레 미소 지으며 그의 손에 이카르가 그려 준 지도를 쥐여 주고 조금 떨어졌다. 그러곤 테이블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 티포트를 들었다.
“차라도 마시겠나?”
“아, 아닙니다…….”
“러셀 경은 차를 좋아하였지.”
그녀의 입에서 나온 제 아버지의 이름에 일라이저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서고 말았다. 쪼로록, 차를 따르는 소리가 고요한 방의 적막을 깼다.
“내겐 유일한 스승님이셨는데. 알고 있었나?”
“……예.”
“일단 여기 앉게.”
그러나 일라이저는 한사코 거절하며 그녀의 옆에 뒷짐을 지고 섰다. 이엘은 작게 웃음을 터뜨리더니 의자에 앉아 찻잔을 들었다.
이렇게 다 자란 그의 아들을 보고 있으니 느낌이 이상했다. 마치 루시우스 러셀이 어려진 것 같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어수룩하여 그와 전혀 다른 사람 같기도 했다.
“여기까지 용케 왔구나.”
“예.”
“밖의 상황은……,”
“여기, 왜 그러십니까?”
그녀의 말허리를 자르고 손을 뻗었다. 목에 둘러졌던 하얀 천 위로 붉은색이 점차 번져 가기 시작했다. 답지 않게 무례한 행동을 할 만큼 그는 놀란 상태였다. 딱딱하게 굳은 일라이저를 향해 이엘은 애써 웃으며 그를 진정시켰다.
“나뭇가지에 베인 것이다. 별일 아니니……,”
“전하. 나자르 님은 어디, 계십니까? 어서 불러서 치료를…… 하셔야 합니다.”
“금방 멎을 테니 걱정 말고…….”
그 순간 덥고 습한 기운이 훅 끼쳤다. 아름다운 그의 금빛 머리카락을 적신 빗물이 이엘의 손등 위로 톡톡 떨어졌다. 어느새 가까워진 일라이저는 뜨거운 손으로 흐트러진 붕대를 아예 걷어 냈다. 후루룩 하얀 천이 떨어지고 길게 난 흉터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는 사색이 된 채 짧게 탄식했다.
“뱀이 전하께…….”
“일.”
흉터가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봉합되어 있던 걸로 보아 오드가 치료를 한 게 분명했다. 그러나 여전히 상처에선 붉은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치료를 해도 저 정도란 말인가? 너덜너덜해진 피부가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아 일라이저는 침음했다.
세상 그 누구보다 존귀해야 할 황녀의 몸 위에 누가 저딴 짓을 했단 말인가. 제대로 보필하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뱀을 향한 분노로 손이 덜덜 떨렸다.
“일라이저.”
“…….”
“크게 신경 쓸 일이 아니니……,”
“늑대가 왔다고?”
밖에서 들리는 남자의 목소리에 이엘이 크게 눈을 뜨며 입을 다물었다. 일라이저 역시 소리는 듣지 못해도 기척은 느낀 모양이었다.
― 전하. 곧 오겠습니다. 부디 그때까지 몸조심하십시오.
― 그대도 조심하도록. 나는…… 그대의 희생을 원하는 게 아니다. 그러니 몸을 아껴라.
― 전하. 그 상처는…….
그는 또다시 침음하며 울음을 억눌러 삼켰다. 마치 제가 다친 것처럼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이었다.
― 이 정도는 문제도 아니야. 괘념치 말라. 어서 나갈 준비를 해.
― 놓고 가신 것을 가져왔습니다.
일라이저가 내민 것은 르네가 주었던 화살이었다. 이엘이 마을을 떠날 때 바닥에 떨어뜨리고 갔던 것. 화살을 받아 손에 가만히 쥐었다.
― 곧 다시 보자.
그녀의 따듯한 눈을 마주하며 일라이저가 창문을 훌쩍 넘었다. 그가 묶어 둔 옷을 타고 아래층 창문으로 넘어간 것을 확인한 이엘은 서둘러 창틀에 매달았던 옷을 풀었다. 바닥에 흥건한 물을 대충 닦고 옷과 화살을 침대 아래 처박았다. 그러곤 풀어진 붕대를 목에 칭칭 감고는 빠르게 침대 안으로 몸을 숨겼다.
거의 동시에 방문이 열렸다.
“…….”
“…….”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방 안으로 들어선 남자는 잠시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는 듯했다. 활짝 열린 창문을 타고 비 냄새가 들이쳤지만 안심하기엔 일렀다.
로빈은 성큼성큼 방 안으로 들어와 창문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커다란 창문이 모두 열려 있어 세찬 바람이 방 안을 식히고 있었다.
로빈은 축축하게 젖은 창틀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문득 드는 의문에 창문 밖을 향해 고개를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