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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184화 (184/488)
  • 184화

    아, 이제야 속이 후련하다. 그의 생은, 다른 우논에 비하면 턱없이 짧은 시간이었지만 외롭게 자란 그에겐 한없이 긴 시간이었다.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시간 역시. 아무것도 갖지 못하고, 아무도 찾지 못한 채 멸망하는 세계를 무력하게 바라보는 것도 이젠 지쳤다.

    이카르는 표류하며 전전하던 삶이 아닌, 그녀와 함께 정착하는 삶을 선택했다.

    “어디든 나와 함께 가.”

    이카르의 뜨거운 입술이 이엘의 이마 위에 머물렀다. 짧게 붙었다가 떨어진 남자는 그녀를 쳐다보며 물기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다신 날 떠나지 마. 죽어도, 함께 죽어.”

    “……안 죽어요.”

    “그럼 더 좋지.”

    그제야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이엘은 보조개가 깊게 팬 남자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다가 손가락으로 그의 머리카락을 걷어 냈다. 맞닿은 감촉에 이카르가 눈가를 살짝 찡그렸다가 펴더니 그녀의 손가락을 덥석 깨물었다. 미간을 찌푸리며 밀어 내자 그는 힘없이 밀려나 주었다.

    그녀에겐 반드시 필요한 절차였으나 이카르에겐 상실의 아픔을 떠올리게 했으리라. 그에게 미안했다. 그런 이엘의 눈치를 알아챈 건지, 이카르는 특유의 시원한 웃음을 터뜨리며 다정하게 그녀의 손을 잡고 손등에 입술을 꾹 눌렀다.

    그게 꼭 인간의 손을 탄 짐승 같았다. 처음부터 그랬다. 그는 자신이 리카르디스의 딸이 아니었어도, 단순히 인간이란 이유만으로 공격하고 경계할 것 같지만은 않았다.

    “사실 놀랐어요.”

    “뭐가?”

    “이카르는 다른 이종족이랑은 다르게 인간을 딱히 싫어하는 것 같지 않아서.”

    “맞아. 싫어하진 않아.”

    그는 몸을 일으키고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앉았다. 덩달아 일어나려는 이엘을 제 무릎 위에 머리를 베게끔 눕히고 검은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었다. 그게 마치 어릴 적에 머리를 만져 주던 어머니를 떠오르게 해, 이엘은 열었던 입을 다물고 잠자코 그의 손길을 받기만 했다.

    “싫어할 이유가 딱히 없다.”

    “저는 모든 이종족이 인간을 다 싫어하는 줄 알았어요.”

    “편견이지.”

    “맞아요. 제 편견이었네요.”

    “하지만 끔찍하게 싫어하던 인간은 확실히 있었어.”

    이카르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던 손을 떼고 시선을 창밖에 두었다. 그러곤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선황이 그랬고.”

    “…….”

    “내 종족을, 내 전부를 죽이러 왔던 황제의 기사단이 그랬지.”

    물론 원한이란 감정이 전이되듯 늑대에게로 옮겨 간 적도 있었다. 늑대 역시 황실의 기사단이었다. 그러니 정예 기사단이 재규어를 토벌하기 위해 파견될 때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알면서 모른 척했다면 용서할 수 없고, 설령 몰랐어도 함께 반발하지 않았으므로 그 또한 용서할 수 없다.

    그러나 지금에 와선 그런 원망도 소용이 없다. 늑대들 역시 같은 피해자다. 그들도 종족의 반을 잃었고, 친구를 잃었고, 충성마저 잃었으니.

    “선황의 목을 찢어발기고 싶었지만, 그건 내 몫이 아니더군.”

    “…….”

    “그래서 난 조용히 다음 복수를 기다렸다.”

    그게 아마도 처음이자 마지막 복수. 이카르는 여전히 제 귀에 이명처럼 남아 있는 고음의 비명 소리를 선명하게 기억한다.

    “제일 큰 복수는 당사자에게서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는 것이라고 생각했어.”

    이엘은 조용히 그의 목소리를 들어 주었다. 이카르는 이젠 거의 혼잣말을 하듯 그녀의 볼을 엄지로 지분거리며 시선을 멍하게 돌렸다. 분명한 복수였지만, 1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후련함이 전혀 없는 찝찝한 복수였다.

    놈이 내게서 나의 가족과 종족을 앗아 갔기에, 나 역시 놈에게서 가족을 전부 앗아 가리라고 마음을 먹었다. 다른 종족들은 11년 전 2차 전쟁 때 재규어가 복수에 가담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겠지만, 당시 이카르는 홀로 은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의 복수의 대상은 오로지 하나였다. 놈의 가족. 놈이 살고 있는 그 저택에서 나오는 식솔을 전부 도륙하는 것. 불에 타는 저택에서 도망치는 하인들을 하나하나 죽였고, 마침내 놈의 부인과 아이들의 목숨까지 끊어 버렸다.

    “하지만 복수가 복수를 부른다는 사실을…… 불현듯 깨달았던 것 같다.”

    “…….”

    “그날의 선택을 후회하지는 않지만, 나답지 않은 선택이었던 것은 분명해.”

    그러나 딱 하나를 죽이지 못했다.

    “나도 그 틈에 살아남았으니까.”

    “이카르.”

    “직계라는 이유만으로 빼돌려져 나만 홀로 살아남았으니까.”

    모두를 죽인 이카르가 마지막으로 놈의 아들과 마주했다. 소년은 동글동글한 눈에 눈물이 그득 찬 채, 저를 보고 질겁하여 벌벌 떨었다. 겁에 질려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아주 어린아이였다.

    이카르는 일순 소년에게서 어릴 때의 자신을 발견했다. 그때의 자신도 엉엉 울며 피로 얼룩져 가는 영지에서 도망치고 있었다. 아비를 잃고, 형제였던 카시온을 잃고. 종내에는 종족의 대부분을 잃었던 그때의 제 모습이 그곳에 있었다.

    “살려 두면 언젠가 내게 위협이 된다. 그렇다면 죽여 버리는 게 마땅해. 그건 이종족의 생존 본능이야.”

    그러나 끝내 그럴 수 없었다. 이카르는 피를 흘리며 턱을 달달 떠는 소년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조용히 돌아섰다.

    “복수 같지도 않은 복수가 그렇게 끝나 버렸어.”

    “…….”

    “그러고 나니 허무해지더군. 겨우 저런 것들을 죽이기 위해 피눈물을 흘렸나.”

    겨우 저런 것들에게 내 종족, 내 형님은 죽은 건가. 허무함과 씁쓸함이 동시에 밀려들어 왔다. 이카르는 그때를 생각하는 듯 생기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엘은 제 얼굴에 닿은 남자의 손을 떼어 내고 몸을 일으켜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이카르.”

    “어.”

    “아직도 그 순간을 기억하며 사는 거예요?”

    “…….”

    “나 좀 봐요.”

    그녀의 채근에 삐걱거리듯 고개를 돌렸다. 제 얼굴 가까이 다가와 있는 이엘의 말간 얼굴을 보며 이카르는 살짝 눈가를 찡그렸다. 너무 가깝다는 생각이, 분위기 깨듯 찾아와서.

    “후회하지 않는다면서요.”

    “응.”

    “그러면 미련도 버려요.”

    “…….”

    “스스로를 위해 이제 그만 놔줘요, 과거를.”

    그 순간 이카르의 이마가 이엘의 어깨 위로 툭 떨어졌다. 남자는 울지 않았지만, 마치 우는 것처럼 축축하고 무겁게 느껴졌다. 이엘은 손을 뻗어 그의 너른 등을 토닥거려 주었다.

    그는 늘 외로웠다. 성장을 시작하기도 전에 종족을 잃었고, 연이어 터진 전쟁으로 정신적인 충격이 컸겠지. 어디 있는지도 모를 자신의 종족을 찾기 위해 전전하다가 제 몸조차 간수 못 할 때가 많아졌겠지.

    억지로 손에 쥐여진 삶을 아득바득 이어 가고는 있지만, 여전히 속은 텅 빈 것처럼 공허했겠지.

    “이카르.”

    “응.”

    “저도 당신을 만난 것에, 신께 진심을 다해 감사해요.”

    이런 관계가 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끽해야 우호적인 지인 정도. 어머니의 이름을 팔아서 그를 제 곁으로 당겼지만, 이제 그는 어머니의 이름을 버리고 제 옆으로 다가왔다.

    “이젠 앞을 보는 거예요.”

    그건 곧 자신에게 하는 말과도 같았다. 이엘은 자신을 너무도 닮은 이카르를, 불우했던 과거에서 이제 그만 꺼내 주고 싶었다.

    “스스로의 행복을 위해, 과거는 놔주고 앞을 봐요.”

    “응, 너와 함께.”

    이카르는 그녀의 어깨에 묻고 있던 얼굴을 떼고 시선을 마주쳐 왔다. 그러곤 이엘의 이마 위에 입술을 길게 붙였다가 뗐다.

    “내 미래는 전부 너로 가득 차 있다.”

    “…….”

    “네가 없으면, 내 미래도 사라져.”

    그러니까 제발, 내 미래에 네가 있어 줘. 이카르는 이엘을 품에 그러안고 신께 기도했다.

    *

    “거기 누구, 커헉!”

    단말마의 비명을 지른 뱀이 쓰러졌다. 일라이저는 흐르는 땀을 닦아 내며 끝도 없이 이어진 계단을 올려봤다. 그녀는 제게 아무런 언질도 주지 않고 뱀에게 끌려갔다. 반항할 수 있었고, 충분히 도망칠 수 있었다. 그러나 황녀는 그러지 않았다. 마치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 순순히 굴었다.

    그런 황녀가 제게 남긴 메시지를 떠올렸다.

    ‘네가 할 일을 하래. 죽을 마음 없으니까 추모할 생각 하지 말고, 네가 여기서 할 일을 하라고.’

    그래서 여기까지 왔다. 죽을 마음이 없다는 그녀를 위해, 그는 모든 장애를 이겨 내고 여기까지 왔다. 뱀의 소굴은 독기로 가득 차 있었고, 뱀은 시각을 차단시킨다. 자신은 소리를 들을 수 없다. 온갖 장애물이 자신을 가로막았지만, 끝내 이곳까지 왔다.

    오직 당신을 위해.

    일라이저는 빠른 속도로 계단을 오르며 피부로 느껴지는 감각에 날을 세웠다. 곳곳에 숨어 있을 뱀들을 피해 왕성까지 오는 길이 하루가 넘게 걸렸다. 그사이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뱀들은 우왕좌왕하며 수선을 떨었고 덕분에 이곳으로 오는 동안 뱀을 만난 건 손에 꼽혔다. 그마저도 가볍게 처리한 일라이저는 이제 이 높은 계단만을 코앞에 두고 있었다.

    만날 겁니다. 만나서…… 반드시 확인할 겁니다, 전하.

    두 주먹을 세게 쥐었다. 사람 마음이란 게 참 간사해서 황녀가 아니길 바라는 마음이 반, 그리고 그렇게라도 살아 계시길 바라는 마음이 반. 살아 있다면 그녀에게 너무 혹독한 세계일 테지만, 그럼에도 만나고 싶다는 이기적인 제 마음 때문에. 일라이저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고지였다. 쉼 없이 달리고 올라, 마침내 그녀가 있는 층에 다다랐다. 일라이저는 계단 바로 옆으로 난 창문턱을 밟고 올라섰다. 이대로 외벽을 타고 돌면 이엘이 있는 방의 창문이 곧장 보일 것이다.

    일라이저는 거침없이 발을 뻗어 올록볼록 튀어나온 벽돌을 디뎠다. 영지가 원래 이런 건지, 아니면 하늘이 변덕을 부리는 건지. 뱀의 영지는 벌써 며칠째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덕분에 제 냄새가 전부 가려져 뱀들이 눈치를 못 채긴 했지만. 어쨌든 세차게 부는 비바람에 몸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필사적이었다. 아귀힘으로 버티며 강하게 부는 바람에도 견고하게 달라붙었다. 아주 조금씩이지만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그는 머릿속에 황녀를 떠올렸다. 그녀가 살아 있다면, 자신도 살아야 한다. 어떻게든 당신을 만나야 해.

    안간힘을 쓰며 그녀가 있는 건물의 외벽에 닿았다. 일라이저는 볼록하게 튀어나온 벽돌을 향해 한 팔을 뻗었다. 그 한 팔로 매달리며 자유로워진 다른 손으로 제 허리춤에서 검을 홱 뽑았다. 핏줄이 도드라질 정도로 온 힘을 다해 매달린 그는 날래게 움직이며 검을 벽에 꽂았다. 헉헉, 가쁜 숨을 쉬며 남자는 또 간신히 벽을 탔다.

    “일라이저?”

    이카르를 보내고 창문을 닫으려던 이엘이 그를 발견하곤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거센 빗소리에 제 목소리가 다 묻혔지만, 그게 아니어도 그는 제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조금씩 조금씩 자신이 있는 곳을 향해 벽을 타는 그를 바라보며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이엘은 다시 방으로 돌아와 두리번거렸다. 한 번 도주했던 전적이 있는 터라, 로빈은 그녀의 방에 밧줄 대용으로 쓸 만한 천은 전부 치워 버렸다. 그나마 있는 거라곤 두툼한 이불과 얇은 드레스들이 전부였다. 이엘은 바닥에 엉망으로 널브러진 드레스를 빠르게 엮었다.

    일라이저의 무게를 버티기 위해 얇은 옷을 몇 벌이나 겹쳐 묶었지만 여전히 불안했다. 하지만 더는 시간을 허비할 수 없어, 엉성하게 엮은 옷을 침대 다리에 묶어 창문 밖으로 달아 내렸다.

    “일라이저!”

    그러나 그는 여전히 제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세찬 바람에 저항하느라 혼신의 힘을 다하는 중이었다. 이엘은 다시 테이블로 뛰어가 로빈이 준 반지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러곤 일라이저의 머리를 향해 냅다 던져 버렸다.

    “아!”

    갑작스런 충격에 조금 놀랐지만, 그는 탁월한 운동신경으로 중심을 잡고 고개를 위로 들었다. 그의 따뜻한 눈동자가 점차 커지기 시작했다.

    “화, 황녀님…….”

    ― 이걸 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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