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매번 말하지만 레온은 이번 전쟁의 결과 따위 크게 연연하지 않는다. 그의 관심은 오직 이엘의 안전뿐이었다. 어차피 뭣도 안 된다면 제 영지로 데려가 살면 될 일이다. 자신은 노아와 달라서, 그녀가 바라는 삶보다 그녀 자체가 더 중요했다. 감히 최상의 포식자 영지에 겁도 없이 쳐들어올 종족은 없겠지.
그러니 이렇게 무작정 전쟁을 일으키는 것엔 반대한다. 이성을 잃고 급급한 마음에 돌입했다가 이엘의 안전에 문제가 생기면 안 되니까.
“차라리 내가 들어가서 상황을 보고 올게.”
“뭐?”
“잠깐 뱀의 눈을 돌려 줘. 오헬을 만나고 금세 나올게.”
“그럴 거면 내가……,”
“독수리의 왕이 오면 중재 역할을 해야 하잖아. 일라이저인가 뭔가, 놈의 존재를 그가 알면 안 된다며.”
“…….”
“내게 맡겨. 여차하면 데리고 나올 테니까.”
일라이저는 피터를 만난 뒤 빠르게 이곳을 떠나 뱀의 영지로 들어갔다. 르네는 왕성에 시선을 처박고 있느라 아직도 그를 발견하지 못한 듯했다. 그가 루시우스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다행이겠지만, 여전히 마음 깊이 원한을 갖고 있다면 마찰이 생길 것이다. 그걸 중재할 사람이 필요했다.
한숨을 흩뿌리듯 토해 낸 노아는 여전히 서늘한 가슴께를 짚으며 눈을 감았다. 보고 싶다. 정말…… 정말로 보고 싶어. 고작 몇 주, 몇 달 못 봤을 뿐인데 이토록 보고 싶을 줄이야. 이럴 땐 독수리가 부러울 지경이군.
“그럼…… 부탁할게.”
제발, 제발 살아만 있어 줘.
*
왕성은 수많은 뱀들로 인해 시끄러웠다. 왕의 여자가 쓰러졌다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뱀들은 분주하게 움직이며 명령을 따르느라 바빴던 것이다. 그중에서 가장 바쁜 건 오드였다. 소환되듯 끌려온 그는 쓰러진 이엘을 치료하느라 상당한 체력을 소진했다.
“왜 눈을 안 뜨지?”
뒤에서 팔짱을 끼고 지켜보던 로빈이 살벌하게 읊조리자 오드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상처 치료는 했습니다만, 몸 안에 누적된 독기 때문에 정신을 차리는 데 시간이 걸릴 듯합니다.”
“독기라면…….”
“이전에 늑대의 영지에서 마셨던 독기가 아직 남아 있습니다.”
“비켜.”
로빈은 그를 지나쳐 이엘이 눈을 감고 있는 침대로 다가갔다.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그녀의 입술 근처로 손을 뻗었다. 그는 이전에 남겨 두었던 제 독기를 비롯해 제 종족이 미미하게 뿌려 댔던 독기들까지 전부 거두어 가져갔다.
보랏빛으로 질려 있던 입술이 차차 온기를 찾아가자, 로빈은 저도 모르게 안도의 숨을 돌렸다. 그는 말없이 눈을 감은 이엘의 얼굴을 살폈다.
“나자르.”
“예, 폐하.”
“네 거처를 오헬의 옆방으로 옮겨 줄 테니 때마다 들러서 안전을 살펴라.”
“감사합니다, 폐하.”
“일단 나가 봐.”
“예.”
오드가 나가고 로빈은 몰려든 뱀들을 전부 물렸다. 아예 왕성 밖으로 쫓아내고 나서야 고요함이 찾아왔다. 로빈은 그렇게 앉은 채 그녀를 쳐다보는 것에 한참의 시간을 쏟았다.
분명 죽었다. 숨이 끊어져서, 죽었던 것 같은데…….
그래도 다시 살아났으니 됐다. 그 생각을 하면서도 로빈은 현실이 믿기지 않아, 그녀의 입가에 제 귀를 댔다. 작은 숨소리를 듣고 나서야 그는 몸을 세웠다.
“……역시 너희 종족은 빌어먹을 종족이야.”
혼잣말을 하며 그는 이엘의 이마 위에 제 손등을 올리려다 멈칫했다. 곤히 잠들어 모를 텐데도 자신이 손을 대면 눈을 번쩍 뜨고 또다시 자해를 할 것 같아 두려웠다.
이딴 결과를 바라고 벌인 짓인가? 다시는 손도 못 대게 하려고. 빌어먹을……. 로빈은 짜증을 삼키며 애꿎은 시트만 움켜쥐었다. 자신답지 못하다. 본래의 자신이었다면 그딴 건 신경 쓰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행동했을 것이다. 하지만…….
또 죽어 버리면 어떡하지?
두려움이 덜컥 그를 찾아왔다. 왜 이딴 걸 두려워하는지 자신도 모르겠지만, 그 생각을 하니 심장이 옥죄이는 것처럼 갑갑해졌다.
‘……너와 흘레붙느니…… 죽는 편이…….’
아아, 그래. 겨우 찾은 암컷이니 두려워하는 것도 당연하지. 유일하게 피어난 희망이다. 이게 사라지면 내 종족의 미래는 또 암담해지리라. 희망을 한번 맛보고 나니, 희망이 없는 세계를 다시 경험하기 두려워졌다.
그래. 이 감정 또한 그것의 연장선일 뿐. 그는 그렇게 정의 내렸다.
“쉬어라.”
로빈은 듣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중얼거리며 문을 닫고 나갔다.
그가 나가고 한참 뒤에야 좁게 열린 창틈으로 재규어가 폴짝폴짝 뛰어내렸다. 그는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와 이엘의 침대에 달려들었다.
“젠장. 이게 대체…… 아, 넌 정말…….”
그가 머리를 짚으며 탄식을 꾹 눌러 삼켰다. 침대에 가만히 누워 잠만 자는 이엘을 보는 게 고역이었다. 이런 일을 만들지 않으려고 자신이 이곳에 왔던 건데……. 이 멍청한 게 스스로 제 목을 찔렀다.
역시 내가 나섰어야 했다. 저 미친 뱀 새끼가 너를 희롱하고 괴롭히기 전에 내가 나서서……! 그는 두 주먹을 세게 쥐며 한참이나 씨근덕거렸다. 그래도 살았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말 못할 감정에 눈시울이 점차 붉어졌다.
온갖 감정이 속에서 휘몰아쳤다. 마음이 아프고 서럽고 괴롭다. 그러면서도 네가 살아 있음에 감사하고 행복하고 기쁘다. 하지만 또 네 몸과 마음이 다쳤을 생각에, 마치 내가 다친 것처럼 욱신거리고 따갑기만 하다.
“왜 그랬어…….”
울음에 먹힌 목소리가 잔뜩 갈라져 있었다. 그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그녀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왜 날 두고 가려고 했어…….”
같이 살자고 했잖아. 같이 행복하자고 네가 그랬잖아.
“네가 죽으면 나도 죽는다고 했잖아.”
스스로도 안다. 자신은 부모의 관심과 사랑이 필요하던 때에 부모를 잃었고, 형제를 잃었고, 종족을 잃었다. 그러니 비뚤고 모자라게 자랐고, 그래서 미성숙하다는 걸. 스스로가 완전해지고 완벽해지려면 누군가가 필요하다는 것을.
그게 내겐 너였단 말이야.
“나타니엘. 눈을 좀 떠 봐. 응?”
제발, 리키. 네 아이가 눈을 안 떠. 너처럼 날 두고 떠날 것 같아. 내가 잘못했어, 누님. 감히 당신의 아이를 욕심내서…… 또 당신처럼, 형님처럼 잃어버릴 뻔했어. 그러니까 누님, 제발, 제발 나타니엘 좀…….
“이……카르……?”
이카르의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왜 여기서…….”
“쉿. 말하지 마.”
“……이카르.”
“괜찮아, 지금은 우선 쉬는 게 좋겠어.”
“지금 울어요?”
“응, 좋아서.”
“…….”
“네가 다시 돌아와 줘서. 그게 좋아서.”
설마 자신이 목을 찌르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던 건가? 이엘은 조금 전의 일을 떠올리며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독수리의 눈까지는 피할 수 없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카르에겐 보여 주고 싶지 않았는데.
그는 미성숙하고 여린 남자다. 자신에게서 어머니를 찾는 그에게 또다시 죽음을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미안해요. 당신이 보고 있을 줄 몰랐는데.”
“아냐. 괜찮아. 다 괜찮아.”
그는 마치 스스로에게 말하듯 계속해서 괜찮다고 중얼거렸다. 이엘은 한참이나 그의 중얼거림을 듣다가 손을 뻗어 그의 눈가를 훔쳤다. 뜨뜻한 물기가 묻어 나온다. 내가 죽는 줄 알고 울었던 걸까? 생각보다 그가 나를 제 울타리 깊은 곳까지 들였구나 싶어서, 솔직히 조금 후회가 됐다.
“여기로 올래요?”
그녀가 무거운 손을 들어 이불을 들추자 이카르는 말을 알아듣고 재규어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러곤 제 몸을 한없이 작게 줄여 그녀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미안해요. 놀라게 해서.”
“괜찮아. 다 괜찮아.”
“…….”
“살았으면 됐어.”
주드가 죽는 걸 바로 앞에서 목도했다. 손쓸 도리도 없이 죽어 가는 모습만 멍청하게 바라봤다. 그래서 소중한 사람의 죽음을 바라보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이엘은 그 누구보다 잘 안다. 심지어 그는 곁에 두었던 모두를 잃은 적이 있다. 같은 경험을 또 겪게 만든 것 같아 진심을 다해 미안했다.
“내 세상이, 내 미래가 무너지는 줄 알았어.”
“이카르.”
“하지만 살았으니 됐다.”
“…….”
“다시 세상이…… 밝아졌으니까. 그럼 됐어.”
그는 화를 내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그저 스스로를 위로하듯 몇 번이나 괜찮다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아프진 않아?”
이카르는 검은 눈동자를 끔뻑거리며 그렇게 물었다. 이엘은 그의 말을 들으며 붕대가 감겨 있는 제 목을 한 번 쓸었다. 단번에 끊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단검으로 목을 꿰뚫었다. 오드의 힘으로 출혈은 멎었지만 흉터는 남았다. 그래도 어쨌든 살았다.
정말 살았어.
그 사실이 중요했다.
로빈의 간계는 분명 자신에게 치명타를 입혔다. 그의 말에 홀려 지난날의 아픔을 되씹게 되었으니까. 그러나 이엘은 그가 착각한 것처럼 마음이 약한 사람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과거의 아픔에 발목이 잡혀 현재의 해야 할 일을 못 할 만큼 여유롭지도 않았다.
“제가 정신을 잃고 얼마나 지났어요?”
“꼬박 하루.”
“다행히 오래 걸리진 않았네요.”
“나에겐 천 년처럼 긴 시간이었어.”
“…….”
“아냐. 아니야. 됐어. 내 말은 신경 쓰지 마. 그냥 무시해.”
그 말을 하며 다시금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이엘은 제 시선을 피하는 재규어의 털을 쓰다듬으며 억지로 저를 보게끔 눈을 마주쳤다.
“이카르. 미안해요. 죽으려던 건 아니었어요.”
“…….”
“정말이에요. 약속했잖아요. 당신이 행복해지기 전까진 안 죽어요, 정말로.”
금방이라도 코끝이 닿을 거리에서 그녀를 바라보던 재규어는, 작은 바람을 일으키며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엘이 재규어를 품고 있었는데 전세가 역전됐다. 덩치가 한참이나 더 큰 남자가 그녀를 품에 가두듯 끌어안았다.
“나타니엘.”
“네.”
“너를 만나게 해 준 신께 진심으로 감사해, 나는.”
“…….”
“신은 내게서 모든 존재를 앗아 가셨지만…… 그 끝에 너를 보내 주셨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면 안 돼요. 그러면 당신이 또 울게 될 거예요. 이엘은 아랫입술을 당겨 물며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게 사라져도, 너만 살아 있으면 나는 살 거야.”
“…….”
“너를 위해 살 거다, 나는.”
이제 더는 의무감 때문에, 그리움 때문에 이엘을 찾는 게 아니다. 조금 전 기도로 그는 리카르디스 론을 완전히 떠나보냈다.
“내 행복은 너다.”
“…….”
“너만 살아 있으면 그게 내 행복이야.”
그게 내 삶의 미련이고 집착이야. 그게, 내 삶의 전부가 돼.
“그러니까 난 이제 너와 함께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