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그가 입술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이엘은 고개를 옆으로 비틀어 피했다.
“이건…….”
“그럼 계속 이렇게 살 건가?”
“…….”
“네 종족은 네 안위 따위에 관심 없어. 그때 널 버렸던 마을 놈들을 그새 잊었나?”
싸늘한 말투에 이엘의 눈동자가 조금 흐려졌다. 오드의 말대로 그녀는 정말 마음에 병이라도 든 것처럼, 처음으로 흐트러진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로빈은 그녀의 병을 고쳐 주지 않을 생각이다. 그래야 썩은 줄이라도 잡고 올라올 테니.
“내가 여전히 끔찍한가?”
“…….”
“하지만 이 손에 권력을 쥐여 줄 사람은 나밖에 없을 텐데.”
로빈이 그녀의 손을 움켜쥐며 작게 속삭였다.
“한 번이야.”
“…….”
“단 한 번만 내게 오면 너는 다 가질 수 있다.”
이엘의 흐리멍덩한 눈동자가 그에게 닿았다. 로빈은 틈을 놓치지 않고 나지막한 탄성이 나오던 이엘의 입술을 먹어 치우듯 집어삼켰다. 목이 뒤로 꺾이지 않게 뒤통수를 세게 눌렀지만 성마르게 달려들던 습관을 버리지 못해, 결국 그녀의 머리가 창문에 쿵 부딪혔다.
황홀했다. 다디단 열매를 먹는 것처럼 환상적이었다. 한번 맛보니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목이 탔다. 몰아치는 공격에 이엘이 앓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비틀었으나, 로빈의 억센 손이 그녀의 뒤통수를 붙잡아 도망치지 못하게 만들었다.
제게 끌려오다시피 일어선 이엘이 눈을 감은 채 축 늘어졌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로빈은 목적도 잊어버린 채 제 갈증을 채우는 것에 급급했다.
그래, 인간은 나약하지. 조금만 틈을 파고들어도 이렇게 속절없이 무너져. 네 의지? 네게 의지를 실천할 능력이나 있던가? 어차피 약자란 그런 것이다. 아무리 살기 위해 발버둥 쳐 봤자 발악밖에 더 되나. 결국 너 역시 살기 위해 내 손을 잡게 되리라.
로빈은 거침이 없었다. 단번에 일을 치를 작정으로 몰아쳤다. 물론 약을 먹지 않으면 버티는 게 어렵겠지만 그건 이쪽에서 강도 조절을 하면 되고. 이엘의 턱을 쥐고 입을 벌려 놓았던 손이 뺨을 타고 내려가 허리에 닿았다. 한참이나 허리를 배회하던 손이 옷 위에 둘러진 가운을 풀어 바닥으로 내던졌을 때였다.
파앗. 제 얼굴 위로 무언가가 튀었다.
그제야 맞대고 있던 입술이 떨어졌다. 로빈은 눈까지 번진 액체가 무엇인가 싶어 손등으로 제 얼굴을 닦았다. 벌겋게 묻어 나온 것은 영락없는 피였다.
“그렇게…… 절망적인, 미래……밖에 없다면…….”
“너…….”
“……차, 차라리 내 손으로…….”
먼저 계약을 어긴 건 그쪽이야. 그녀의 눈동자가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너와 흘레붙느니…… 죽는 편이…….”
“…….”
“어디…… 절망적인 미래에서, 잘…… 잘 살아 보도록 해.”
“오헬!”
“……연구도…… 잘해 보…….”
여자가 말을 다 마치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그녀의 목에선 분수처럼 피가 터져 나오고 있었다. 단검이 목을 깊게 찢고 지나갔다. 챙강― 정신을 놓은 이엘의 손에서 칼이 떨어졌다. 동시에 로빈은 제 심장도 구렁텅이로 떨어진 기분을 느꼈다.
‘아직도 제 의지를 모르시나 봐요.’
넌 정말 제정신이 아니야.
‘저는 한다면 하는 ‘인간’이에요. 살고 싶어서, 망치고 싶어서, 신의 손을 앞에 두고도 악마와 손을 잡은 인간 말이에요.’
정말로 위태로웠던 거야. 오드가 말했던 것처럼 마음에 병이 들어서…… 젠장. 로빈의 피 묻은 손가락이 덜덜 떨렸다. 몰아붙이면 안 됐는데. 조금 더 지켜봤어야 했는데.
네게 닿으면 안 됐는데…….
네 불안정이 내게도 전이될 수 있다는 걸 생각도 못 하고.
“밖에 누구 없나?! 오드를 불러와!”
빌어먹을! 빌어먹을……. 저 여자는 애초에 살 생각이 없었던 거였다. 처음부터 죽을 작정으로 내게 온 거였어.
내겐 간절한 희망을 안겨 주고, 그걸 절망으로 바꿔 버릴 심산으로.
*
“저게 그 녀석이라고?”
“그래. 놈의 본체야.”
“나 용은 처음 보는데.”
앤디에게 대꾸하며 스완이 둥그런 눈을 크게 뜨고 하늘을 쳐다봤다. 먹구름 사이로 조금씩 비치는 거라곤 거대한 비늘뿐이었지만 그것마저도 신기했다. 호수에 묶여 뭍으로 나갈 수 없던 시절엔 용을 만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으니까. 이엘과 계약한 이후로 스완은 매일매일이 새로웠다. 갓 태어난 새끼처럼.
“나 잠깐 물가에 다녀올게.”
“기다려, 스완. 혼자 가지 말고 늑대들과 함께 가도록 해.”
줄곧 보고를 받느라 바쁘던 노아가 스완을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아무래도 자신의 목숨이 이엘과 직결되다 보니 저를 향한 감시는 늑대들에게 가장 중요한 업무 중 하나가 되어 버렸다. 솔직히 그게 답답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지만, 어쨌든 스완 본인도 이엘의 목숨을 중요시했기 때문에 이번에도 그러겠노라 답했다.
노아는 넓게 펼쳐 놓은 지도 위에 펜으로 동그라미를 치며 고갯짓을 했다.
“앤디. 네가 같이 가서……,”
“컥!”
그러나 노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입에서 피를 토하며 스완이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그의 입에서 쏟아져 나온 핏덩이가 연분홍빛 머리카락을 흡수하듯 먹어 치웠다. 경악스러운 광경에 모여 있던 이종족 모두가 입을 쩍 벌린 채 굳어 버렸다.
들고 있던 펜을 집어 던진 노아가 누구보다 빠르게 달려와 스완의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곤 곧바로 그의 목덜미에 손을 얹어 숨을 쉬는지부터 확인했다.
멈췄다.
……숨이 멈췄어.
“나타니엘!”
그가 소리를 지르자 놀란 눈을 뜨고 얼어 있던 늑대들이 빠른 속도로 왕의 앞에 집결했다. 그리고 그때였다.
“헉……!”
스완이 붉은 눈을 번쩍 떴다. 그는 노아의 품에서 빠져나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으며 밭은 숨을 내쉬었다.
“스완?!”
“오, 오, 오헬이…… 오헬이 위, 위험해…….”
반쯤 정신이 나간 채 횡설수설하는 그의 앞에 빠르게 물을 가져다주었다. 벌컥벌컥 들이켜 목을 축인 스완은 여전히 떨리는 손으로 입가에 묻은 피를 닦으며 숨을 골랐다. 그러곤 노아의 옷 끝을 거세게 움켜쥐며 다급히 말을 쏟아부었다.
“죽었다가 살았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죽었다가 살았다니 무슨……!”
“내가 살아 있으니 산 건 맞아. 지금도 숨은 붙어 있어. 다만 호흡이 불안정해. 곧 죽어 버릴 것처럼…….”
“젠장. 지금 당장 병력을 집결시켜라! 르네와 밀로에게도 전해. 영지로 들어간다.”
“분명 죽었는데…… 어떻게 살아난 거지…….”
혼자 중얼거리는 스완을 뒤로하고 노아는 세웠던 모든 작전을 전부 취소했다. 그는 쿵쿵 세게 뛰는 심장을 부여잡다가 창백한 낯을 쓸어내렸다.
갑자기 눈앞이 아득해졌다. 죽었다고? 죽었다니……. 로빈이 죽였다고? 그 미친놈이 죽였단 말이야?
그래도 딱 하나 안도했던 건, 로빈의 성격상 그녀를 죽일 리 없다는 확신이었다. 그러나 멍청한 생각이었다. 미친놈 앞에선 상식도 안 통하는 건데. 노아는 핏발이 설 정도로 눈을 부릅뜨며 주먹을 거세게 말아 쥐었다.
멸족. 그래, 멸족을 시켜 버리는 게 낫겠다.
“폐하. 이렇게 갑작스럽게 전쟁을 하시는 건 안 됩니다.”
“앤디 님의 말이 맞습니다, 폐하. 오헬은 살아 있다고 하니, 사전에 계획했던 대로 신호가 올 때까지 기다리셔야 합니다.”
“아직 지원군이 오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독수리가 지켜보고 있었는데도 아무런 신호가 없다는 게 이상합니다.”
“영리한 오헬이 제 목숨이 위험한데도 알갱이를 터뜨리지 않았을 리 없습니다. 이것 역시 그녀의 계획일 테니……,”
“계획 같은 건 필요 없다.”
“…….”
“엘이 죽으면 계획이 다 무슨 소용이야.”
노아는 흔들리는 시야를 붙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먼저 돌입한다. 서쪽 경계를 허물어서 혼을 빼놓으면 레온, 다음은 너희가 동쪽을 공격해. 그 뒤로 독수리가 창공에서……,”
“노아, 진정해.”
“…….”
지금쯤 자신만큼이나 이성을 잃고 날뛰는 게 당연할 레온이 침착하게 대꾸했다. 노아는 깊은 한숨을 쉬며 마른세수하듯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성적으로 행동해야 하는 걸 알고 있는데도, 도무지 그럴 수 없다.
“일단 오헬이 살아 있는 건 맞다는 거잖아.”
“……그래.”
“내 마음도 너랑 같아. 지금 당장이라도 뱀들의 모가지를 뜯어서 진창에 처박고 싶다고.”
“…….”
“하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들어가면 그녀의 안전은 확보하지 못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