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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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됐다.
때마침 기가 막히게 몰려온 먹구름이 뱀의 영지를 둘러싸자, 은신으로 몸을 숨겼던 뱀들의 형체가 빗줄기에 점차 드러나기 시작했다. 은신이 풀린 건 아니었지만 작은 변화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종족의 눈으로는 충분히 알아볼 수 있었다.
틈을 놓치지 않은 스라소니들이 먼저 공격을 퍼부었다. 그러나 제아무리 공격에 특화된 스라소니라 할지라도 뱀의 영지에서, 그것도 수백이나 되는 뱀을 상대로 통할 리 없었다. 초반엔 밀리는 듯싶던 뱀들이 반격에 성공한 뒤로는 일방적으로 스라소니가 당하고 있었다.
그것까지 확인하곤 이엘은 창문을 닫았다. 뱀에겐 별 타격이 없는 접전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늑대들이 진을 물린 덕에 스라소니와 부딪치지 않았고, 뱀에게도 들키지 않았다는 점뿐이었다.
“어째 안타까워 보이는군.”
“…….”
“스라소니가 내 영지를 헤집어 주기라도 바랐나?”
뒤돌아선 이엘은 로빈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몹시 피곤한 얼굴로 머리를 쓸어 올리며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스라소니에게 잡혀가면 네겐 더 최악의 상황 아닌가? 그들이 나처럼 네 말을 들어줄 거라 생각하나?”
“그건 맞아요. 제겐 여기가 더 안전하죠. 스라소니가 쳐들어오면 저도 함께 싸우려고 했어요.”
“네 생각을 도무지 모르겠군.”
로빈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눈을 감았다. 내부에서 입을 떠벌린 테르 및 우논은 이미 색출해서 처리를 끝마쳤다. 입이 무거운 늑대와는 다르다. 흥분해서 어디까지 떠벌린 건지는 모르겠지만 꽤 먼 곳에 영지를 잡고 사는 스라소니가 알게 됐다면, 대륙의 반 이상이 알게 됐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게다가 스라소니가 알게 된 이상 더는 숨기기 어렵다.
로빈은 아무런 반응도 없이 티포트를 들어 우려 놓은 차를 따르는 그녀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가 이 상황을 노린 것만큼은 확실하다. 제 종족이 보는 앞에서 자신이 여자라고 밝혔을 때부터 작정했던 게 분명해.
왜지? 유일하게 살아남은 여자라고 알려져서 좋을 게 하나 없을 텐데.
‘엘은 지금 많이 아픈 상태입니다.’
‘몸이? 많이 안 좋나?’
‘근본적으로 아픈 곳은 몸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어느 날 자신을 찾아온 오드가 그렇게 간언했다.
‘오랜 시간 스스로를 압박하며 살아왔기에 심적으로 약해져 있습니다.’
‘…….’
‘저는 폐하께서 그녀에게 안정을 주셨으면 합니다.’
‘내게 간언을 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는데. 너 역시 그녀처럼 이곳을 나가고 싶던 게 아니었나?’
‘저는 이엘이 행복하다면 그곳이 늑대의 영지가 되었든, 뱀의 영지가 되었든 상관없습니다.’
로빈은 그의 말을 곱씹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확실히 인간이 심지가 굳지는 않지. 하물며 가장 약자인 인간 여자이다. 처한 상황이 극악인 곳에서 저 정도로 버틴 게 용할 정도다. 하여 그런 어리석은 선택을 했나.
안정을 주라고? 그는 나자르의 간언을 비웃었다. 자신은 그녀에게 안정감을 줄 마음이 없었다. 설령 안정을 준다 해도 제게 마음을 열어 줄 여자가 아니다. 노아였다면 몰라도, 이엘과 위태로운 줄다리기를 하는 자신에겐 불필요한 간언이었다.
그는 제 턱을 쓸며 차를 마시는 황녀를 감상하듯 바라보았다. 매사 절도 있고 꼿꼿하다. 우아한 자세, 따라갈 수 없는 품위. 자긍심으로 똘똘 뭉친 황족의 표본 그 자체였다. 뱀은 저런 것을 동경하고 갈망하여 혐오했다.
자, 그렇다면 나는 다른 방식으로 너를 굴종시켜 볼까. 로빈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교활한 미소를 지었다.
“오헬.”
“네.”
“너는 대체 왜 그딴 거래를 한 거지?”
“…….”
“네 말대로 네겐 하등 쓸모도 없는 거래였다. 이익도 없는 거래를 위해 악마와 손을 잡다니.”
쪼로록. 차를 따르던 손이 잠깐 멈칫했다. 순간의 동요를 숨기지 못한 그녀를 지켜보며, 로빈은 차오르는 환희를 삼켰다. 그녀의 불안정이 그에게 안정을 가져다준 셈이었다.
“우습기 짝이 없군.”
우습기 짝이 없다라……. 그의 평가에 씁쓸함을 감출 도리가 없었다. 그래, 맞아. 그게 내가 선택한 거래였다면 우습기 짝이 없는 거래였을 것이다.
처음부터 버릴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처음부터 버릴 수 없는 존재라서.
‘몸가짐을 정숙하게 해라. 네 값어치는 그것밖에 안 되니.’
‘얼굴은 봐줄 만하니 쓸모는 있겠군.’
‘그래. 이대로만 크면 네 오라비에게 든든한 지지층이 되겠구나. 잘하고 있다. 그렇게 스스로를 가꾸어라.’
‘계집이 무슨 검을 쥔다는 말이냐? 쓸데없는 말은 그만해라.’
‘너는 네 오라비를 위해 희생해야 한다. 알겠느냐?’
‘잊지 마라. 네가 네 오라비의 양분을 쪽쪽 빨아먹으며 태어났음을.’
르뷔아 가문이 제국을 건립한 이래로 황권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건만, 선황은 자신에게 늘 오라비를 위한 누이가 되라고 일렀다. 그의 황위를 위해 자신의 혼인도―심지어 그게 여러 번일지도 모른다는 말투로―미래도 모두 버리라 말했다.
나는 오라비가 가졌어야 할 양분을 빼앗았고, 오라비가 받아야 할 교육을 반씩 빼앗았다. 지나치게 뛰어나서도 안 됐고, 지나치게 모자라서도 안 됐다. 언제나 ‘적당한’ 수준을 유지해야 했고, 그 선을 위가 됐든 아래가 됐든 넘어서면 응당 벌을 받아야 했다.
그게 내 역할이었다. 그게 존재의 이유였다.
자신을 희생해 오빠를 지켜야만 한다는 생각에, 이엘은 균열을 넘어 악의 손을 잡았다. ‘그’의 유혹을 알면서도 넘어갔던 건 지독히도 강렬했던 학대의 흔적 때문에. 그렇게라도 자신의 역할을 다해, 존재했음을 나타내고 싶어서.
“죽은 네 부모를 살려 달라고 했어야지. 아니면 네 오라비라도 살려 달라고 하든가.”
그랬다면 네 처지가 더 나았을 텐데. 그렇게 덧붙여진 로빈의 목소리에 이엘은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리며 가만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조건을 붙였다. 이온을 살리려면 그녀의 목숨을 내놓으라고.
이상도 하지. 내 자신을 희생해 이온을 지켜야 한다고 세뇌당했으면서도, 학대당했으면서도……. 정작 목숨을 바꾸는 건 두려웠던 모양이다.
아니. 사실은 살고 싶었던 거야……. 자조하며 그날을 떠올린 이엘은 노아의 영지 밖에서 ‘그’를 다시 만났던 날을 되짚고 티포트를 쥔 손에 힘을 더했다. 됐어, 그것도. 이젠 편안한 안식을 기다릴 차례였다.
“혹은 권력을, 황위를 달라고 요구해도 됐을 텐데.”
“…….”
“아니면 전쟁을 무위로 돌려 달라든가.”
황위는, 그 자리는 불가침 영역이었다. 결코 자신의 자리가 될 수 없는 곳. 그 자리의 주인은 태어날 때부터 이온의 것으로 명명되어 있었다. 나는 그 뒤 어딘가. 그것도 내가 아니라 나와 혼인한 자의 가문이.
그러니 지금도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이 길이 마냥 행복하지 않은 것이다.
처음부터 계약이나 거래 따위가 아니었다. 여전히 자신은 누군가의 손바닥 위에 서 있을 뿐이다. 쥐면 그대로 으스러지고, 뒤집으면 그대로 떨어지는. 주체만 달라졌을 뿐, 객체인 자신은 변한 게 없었다. 이렇게 이온의 목숨을 저당 잡힌 채 영원히 벗어날 수 없으리라.
버리지 못하면.
“넌 네 스스로를 위한 삶을 잘 모르나 보군.”
“…….”
“그러니 지금까지도 그토록 네 종족을 포기하지 못해 안달인 거고.”
인간답지 못하군. 로빈은 그렇게 덧붙였다. 그는 미묘하게 흔들렸던 이엘의 눈동자를 놓치지 않고 포착했다.
한없이 순수하게 살아온 황녀답다. 욕심 따위 하나도 없는 불쌍한 황녀. 혼탁한 세상에서 목숨을 빼앗길까 전전긍긍하느라 한없이 약해진 여자. 그녀의 정신을 무너뜨리는 건 로빈에게 일도 아니었다.
로빈은 자리에서 일어나 이엘이 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그녀는 그때까지도 찻잔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로빈은 한 손으로 테이블을 짚고, 다른 한 손으로는 이엘이 앉은 의자를 짚어 그녀를 가두었다.
지금이, 기회다.
“이제 그만 너 자신을 사랑해도 좋지 않나.”
뱀의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제 귀를 울렸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이제 그만, 나를 위한 삶을 살아도 좋지 않냐고? 어깨에 내려앉은 책임감을, 죄책감을, 이제 그만 버려도 좋지 않냐고.
“황녀. 너는 고귀한 신분이고 응당 그런 취급을 받아야 한다.”
“…….”
“그리고 네 백성은 이미 글러 먹었어.”
“…….”
“그런 백성을 네가 떠안아야 할 이유는 없지.”
마음을 내내 억누르고 있던 감정과 책임감이 이지러진다.
“네게 복종하는 내 아이들을 보지 않았나?”
“…….”
“모두 너를 칭송하고 사랑한다. 네게만 복종하고 의지할 테지.”
“…….”
“네가 온전히 내 것이 된다면.”
로빈이 손을 뻗어 흐드러진 검은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그토록 닿는 것을 혐오하던 이엘이 느릿한 눈동자로 그를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입꼬리를 당기며 비죽 웃었다. 늘 청명하던 이엘의 눈동자가, 색이 바랜 것처럼 식어 있다. 뱀의 것을 무척 닮은 모양새로.
안전한 토양을 줄 마음은 없지. 오히려 불안하고 또 불안하게 만들어, 딛고 설 땅을 점점 좁혀 가는 게 뱀답다. 끝내 흙 한 줌밖에 남지 않았을 때, 너는 뱀의 꼬리라도 잡고 싶어 안달이 날 테니.
그래, 네 불안정은 내게 안정을 가져다주니까.
그는 이내 허리를 숙여 간격을 좁혀 왔다. 이엘의 손에 잡혀 있던 찻잔을 뺏어 밀어 내고 그 하얀 손등에 제 손바닥을 포갰다. 느릿하게 손등을 지나 손목을 움켜쥐었으나 그녀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남자의 손가락이 그녀의 손목 안쪽을 보드랍게 문질렀다.
“불우하지 않았나? 인간이란 그렇지. 인간들의 삶은 다 그래.”
“…….”
“무력하고 음란하고 타락했다.”
파르르 눈썹이 떨렸다. 로빈은 그녀의 반응을 주의 깊게 살피며 저가 잡은 이엘의 손을 제 쪽으로 끌었다. 힘없이 딸려 온 그녀의 손등 위에 입술을 붙였다. 관계를 완화시키기 위해 시도한 행위였지만 먼저 흠뻑 빠져 버린 건 자신이었다. 어느새 질척한 입맞춤으로 변질되어 개처럼 핥고 있었지만 로빈은 개의치 않았다.
도리어 좋았다. 좋아서 죽을 것만 같았다. 이대로라면 완벽하게 함락시킬 수 있으리라.
“황녀. 네가 좋아하기에 2층 홀에 악단을 꾸려 놓은 것을 보지 않았나?”
언제나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는 그녀를 위해 로빈은 갖가지 흥밋거리를 보여 주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그러나 딱 한 번, 미묘하게 관심을 보인 게 있었다.
커다란 피아노. 오찬 자리에서 클래식 연주를 위해 피아노를 가져다 놓는 순간, 아주 찰나였지만 동공이 흔들리며 커졌다. 그 즉시 로빈은 성의 2층 홀을 음악실로 개조했다. 왕의 개인 악사였던 우논들이 아예 왕성으로 거처를 옮겼고, 2층 홀에선 매일같이 음악이 울려 퍼졌다.
오로지 그녀만을 위해.
“이곳은 네가 원하는 걸 무엇이든 이루어 주는 곳이다.”
“…….”
“황녀. 아이를 갖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
그 아이. 아이 말이야.
“인간의 아이를 가지면 인간밖에 더 되겠나?”
“…….”
“하지만 둔은 달라. 이런 썩은 시궁창 같은 세상에서는 인간으로 태어난 아이보다 둔으로 태어난 아이가 더 대접받는다는 걸, 영리한 네가 모를 리 없잖아.”
손등에서 떨어진 로빈의 입술이 이엘의 이마 위에 짧게 붙었다가 떨어졌다. 차갑게 식은 이마 위에 열을 올려 주려는 것처럼 짧게, 여러 번 부딪쳤다. 마치 입술을 맞부딪친 것처럼 정성스럽기 그지없었다.
“네게서 태어날 아이는 그 누구보다 존귀해야 한다. 그런 삶을 살게 해 줄 수 있는 존재를 선택해라, 나타니엘.”
마음을 열어. 내게 마음을 열어라. 열락을 품은 입술이 둥그런 이마를 타고 줄기차게 내려와 불그스름한 뺨 위에 머물렀다.
“네 아이에게 내가 왕위를 줄 수도 있다.”
“왕위…….”
한참 만에 흩어지듯 터진 말꼬에 로빈이 웃었다. 그래, 왕위. 기꺼이 주겠노라. 네 아이가 곧 내 아이일 텐데, 무엇이든 주어야지. 아이가 손을 뻗었을 때 잡히지 않는 것 따윈 없을 것이다. 그게 하늘의 별이라도 나는 갖다줄 테니까.
“너를 지켜 주겠다. 내가 가진 모든 비열하고 더러운 능력으로 너와 나의 아이를 지켜 줄게. 너는 그냥 내가 주는 것을 즐기면 돼. 이제 그만 네가 원하는 삶을 살아라, 나타니엘.”
“…….”
“한 번만 허락하면 돼. 한 번만, 네 속에 나를 품으면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