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
“금방 끝나니 나가 계시는 건 어떤가요?”
“시트르. 모두 물려라. 내가 하겠다.”
이엘의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시종장을 시켜 하인들을 전부 물렸다. 로빈은 성큼성큼 다가와 테이블 위에 놓인 보석 여러 개 중 붉은 루비 목걸이를 들었다.
“황녀의 반지가 붉은 루비였던가.”
“…….”
“그건 어디에 뒀나?”
“팔았어요. 먹고살려고.”
이엘은 별 반항하지 않고 로빈이 건네는 보석을 보며 목을 내밀었다. 아무리 싫다고 버텨도 끈질긴 뱀은 먹잇감이 녹초가 될 때까지 포기할 줄 몰랐다. 이미 며칠간의 경험으로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에 이엘은 가만히 그가 채워 주는 호의를 받았다.
“먹고살기 힘들었나?”
“…….”
“또 묵묵부답이군.”
로빈의 차가운 손이 살에 닿자, 이엘은 눈가를 찡그리며 움찔했다. 그 모습 하나하나 눈에 담던 로빈은 피식 웃으며 손수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기까지 했다. 그녀의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그러모아 정리했다.
“너만 마음을 열면 죽을 때까지 원 없이 먹고살 수 있을 텐데.”
“…….”
“오헬. 나를 봐라.”
흐트러진 가운을 정리해 주느라 차가운 손이 어깨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덤덤히 시선을 피하던 이엘의 턱을 잡아 제 쪽으로 돌린 로빈은 그녀의 떨떠름한 눈동자와 마주하며 낮게 속삭였다.
“나의 백성에게 가는 자리인데 표정을 풀어야지.”
“…….”
“이렇게 평생 호의호식하며 살 수 있는데. 여전히 늑대에게로 돌아가고 싶나? 널 버린 놈들에게?”
그녀 몫의 투왈렛 룸으로 마련된 곳은 황실에 버금갈 정도로 아름다웠다. 짧은 시간이었으나 로빈은 풍족하게 채워 넣었고 모자람이 없게 준비했다. 그러나 이엘은 제 몸에 걸쳐진 화려한 장신구와 드레스를 물끄러미 내려보다가 피실 웃었다.
“이걸로 되겠습니까?”
“…….”
“말했잖아요. 내가 황궁에서 받아먹던 게 어느 수준이었는지. 겨우 이 정도로 환심을 사고 싶었던 건가요?”
“…….”
“당신이 아무리 따라 하려 해도 인간의 발끝에도 못 미칠걸.”
손을 뻗어 로빈의 흐트러진 크라바트를 잘 정돈해 주었다. 전세가 역전됐다. 웃음을 머금은 목소리에 로빈이 그녀의 손등에 저도 모르게 손을 올리자 이엘이 쌀쌀맞게 쳐 냈다. 그러곤 미간을 잔뜩 좁힌 채 테이블에 놓았던 손수건을 들어 제 손을 깨끗이 닦았다. 마치 처음 만났을 때 그가 했던 것처럼.
그리고 그녀는 닦은 손에 차례차례 장갑을 꼈다. 또 제 손이 닿을까, 불쾌한 낯으로.
“아무리 향수를 뿌리고 화려한 옷을 차려입어 봤자 뱀 껍질이지, 그게 인간 가죽이 될 리가.”
“…….”
“평생을 그렇게 살아도 황족은커녕 인간의 발치도 못 따라잡을 텐데.”
저런, 이걸 어쩌나. 나지막하게 속삭인 이엘은 혀를 차며 안타깝다는 듯 웃었다. 인간을 향한 자격지심으로 똘똘 뭉친 종족이다. 그녀의 단 한 마디에 발끈하듯 로빈의 미간이 갈라졌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처럼 이내 표정을 갈무리했다. 이엘 역시 아무렇지 않은 양, 그의 앞으로 제 손을 내밀었다.
“에스코트해 주셔야죠, 폐하.”
“…….”
“당신의 백성들에게도 이 역겨운 인형 놀이를 보여 주러 가셔야 하니까.”
로빈은 말이 없었다. 이엘이 악감정을 갖는 것과는 별개로, 그는 왕의 자질이 있는 자였다. 그러니 지금도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내비치지 않는 거겠지. 로빈은 물끄러미 이엘의 손을 바라보았다.
최근 들어 이엘과 로빈은 이런 상태를 이어 가고 있었다. 말의 수위가 점점 높아지는 그녀의 태도에도 로빈은 신경 쓰지 않았다. 솔직히 뺨이라도 내려칠 줄 알았는데, 손대지 않겠다는 말은 또 착실히 지키고 있었으니까. 이걸 고마워해야 되는 건지, 비웃어야 하는 건지.
지금도 로빈은 아무것도 듣지 않은 것처럼 제 앞에 다가온 이엘의 손을 굳게 잡았다.
“그래. 새로 주운 내 인형을 나의 백성이 몹시도 궁금해하니.”
“…….”
“손수 보여 주어야지.”
문을 열고 나가자마자 수십 마리의 뱀들이 두 사람의 뒤를 따랐다. 커다란 뱀들이 서로 엉겨 가며 제 뒤를 따라오는 모습을 외면하고 목을 빳빳이 세운 채 로빈과 함께 걸었다. 비록 그의 인형 놀이에 어울려 주고 있기는 하나, 그렇다고 잔뜩 움츠러들 이유는 없다. 호시탐탐 자신을 노리는 뱀들에게 눌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몇 번을 나와도 좀처럼 적응이 되질 않는 영지다. 분명 같은 공기를 공유하고 있는데도 늑대의 영지와는 달리 숨이 막힐 정도로 탁했다. 게다가 뱀들이 내뿜었던 독기가 미미하게 남아 있어 숨을 쉴 때마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그러나 정신력으로 버텼다. 아직은 안 된다. 조금 더 버텨야 돼.
“생명의 씨앗……!”
“드디어 나타났어.”
“왕이시여, 저희에게 생명을 주십시오!”
곳곳에 은신해 있던 뱀들이 하나둘 나타나더니, 바닥에 몸을 조아리고 로빈을 칭송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의 옆에 서 있는 이엘을 향해선 은근한 눈빛을 보내왔다.
“우리에게 생명을 내려 주길!”
이상한 구호를 연호하며 자신을 바라보는 뜨끈한 시선에 일순 소름이 돋았다. 생명을! 생명을! 미치광이처럼 자신의 발치에 들러붙으려고 커다란 뱀들이 몸을 잔뜩 꼬아 댔다. 광기에 물든 녹색 눈동자들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역한 속을 억눌러야만 했다.
생명. 자신을 그렇게 부르고 있었다. 그게 살아 있는 인간을 뜻하는 건지, 생명을 잉태할 존재로 보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본능적으로 꺼려졌다. 로빈은 이맛살을 구기며 떨떠름하게 따라오는 이엘을 지켜보다가 허리를 감싸 제 쪽으로 당겼다.
“좋겠군. 아가씨라는 호칭이 싫다고 하더니, 새로운 별칭을 얻어서.”
“당사자가 원치 않는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이엘은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옷을 털었다. 그러곤 시큰둥한 표정으로 영지 곳곳을 뚫어져라 응시하다가 로빈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제게 이렇게 영지를 다 보여 주셔도 되는 겁니까?”
“왜? 못 보여 줄 게 뭐 있나.”
“제가 도망갈 거라곤 전혀 생각지 못하시는군요.”
이엘의 말에 로빈이 피식 웃었다.
“못 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거야.”
“…….”
“내가 설마 같은 실수를 반복하겠나?”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지랑이처럼 공기가 흔들리더니 숨어 있던 모든 뱀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조금 전 일부만 모습을 드러내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두 사람이 서 있는 곳이 드넓은 곳이었음에도 그 커다란 몸뚱어리들이 감당이 안 돼, 서로 뒤엉켜 우글거리고 있는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질리게 만들었다.
수백 마리의 뱀이 모습을 드러낸 것만으로도 영지의 대지가 죄 가려졌다. 꿈틀거리는 뱀을 쳐다보며 이엘은 마른침을 삼켰다. 남자는 그녀를 보며 또 한 번 웃었다.
“네가 우리의 손을 타지 않고 영지를 나갈 수 있을까?”
“…….”
“게다가 저길 봐라.”
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은 뱀의 영지 너머, 황폐한 땅이었다. 이곳에선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이엘은 로빈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았다.
“네 백성이 저기 있잖아.”
“…….”
“네가 사라지면 인간을 모조리 잡아다 족치면 된다. 그럼 네가 다시 내게 오겠지.”
“…….”
“이번처럼.”
그녀의 구불구불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산뜻하게 미소를 지었다. 이엘은 신경질적으로 그의 손을 쳐 내고 시선을 돌렸다. 일부러 자신을 데리고 나온 모양이었다. 도망칠 생각조차 못 하도록. 두터운 감시가 항상 달려 있음을 상기시키고, 2차로 인간들의 목숨을 저당 잡아서.
그 후로도 한참을 로빈의 손에 이끌려 영지 곳곳을 다녔다. 마치 추종자처럼 숭배하듯 따라오는 뱀들도 있었고, 음흉한 낯으로 힐긋 쳐다보는 뱀도 있었다. 뭐가 됐든 끔찍한 시간인 것만은 확실했다. 그녀의 모습을 본척만척하며 제 할 일만 하던 로빈의 앞으로 우논 하나가 다가와 은밀히 속삭였다.
“폐하. 스라소니가 움직였습니다.”
“……숫자는?”
“열 마리 안팎입니다. 정탐꾼인 듯합니다. 경계 근처를 어슬렁거리고 있습니다.”
“입단속을 그따위로밖에 못 하나?”
“죄송합니다.”
언제나 창백했던 로빈의 얼굴이 더 파리하게 변해 갔다. 그는 이엘을 힐끔 쳐다보더니 입고 있던 정복 망토를 벗어 그녀의 얼굴 위로 덮어씌웠다.
“전부 죽여.”
“예!”
“살아서 돌아가는 놈이 없게, 전부 목을 잘라서 가져와. 그리고.”
“…….”
“입을 함부로 나불거린 자도 색출해서 죽여.”
“…….”
“타 종족이 눈치채는 순간, 그건 곧 전쟁이다.”
“존명.”
로빈은 아무 반항 없이 망토를 뒤집어쓴 이엘을 제 품으로 끌어당겨 숨겼다. 아무도 알아채선 안 된다. 그랬다가는 빼앗기게 될 테니까. 그는 덜컥 두려움에 사로잡혀, 그녀를 왕성 안으로 빠르게 데리고 사라졌다. 일련의 과정이 빠르게 진행되는 탓에 이엘이 웃고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다.
“아…….”
커다란 나무 뒤에서 작은 탄식 소리가 새어 나왔다. 다행히 스라소니들로 인해 경비에 신경이 쏠린 뱀들은 눈치채지 못하고 그를 지나쳤다. 색색― 기민한 움직임으로 뱀들이 모조리 사라지고 나서야 남자는 입을 틀어막았던 것을 내리며 허탈하게 주저앉았다.
어떻게……. 어떻게 당신이…….
녹색 드레스를 입고 무심한 낯으로 로빈의 곁을 따라다니던 그분은…… 자신이 아는 그분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그것 하나만은 알아볼 수 있다. 그토록 사모해 마지않던 황녀 전하께서 어째서…….
“아. 으윽…….”
끊어질 것 같은 괴로운 탄식 소리가 자꾸만 새어 나왔다. 보고도 믿기지 않는다. 아니. 사실은 계속해서 스스로를 부정해 왔던 걸지도 모른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제게 남아 있는 모든 감각기관이 그분에게 고정돼 움직이지 않는 것을 느끼면서, 은연중에 알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음이 의심을 했지만, 머리는 부정했다. 그래서는 안 된다고. 황녀 전하께서 살아 계셔서는 안 된다고.
그런데 왜 당신이 거기 계신 겁니까?
그럼 나는 대체 무슨 짓을 한 건가? 나는……. 황녀 전하께서 뱀의 소굴로 끌려 들어가는 꼴을 그냥 목도한 건가? 다름 아닌 뱀의 소굴로 가는 것을……? 이 얼마나 무능하고 한심하단 말인가.
괴로움에 심장이 터질 것처럼 세차게 뛰었다. 할 수만 있다면 검으로 제 가슴을 후벼 파서 안에 있는 것들을 모조리 뜯어내고 싶을 정도로. 너무 아팠다. 너무 아프고 괴로워서 눈에서 흐르는 게 눈물인지 피인지도 인식이 안 됐다.
아……. 안 돼……. 안 돼.
전하, 당신이 살아 계셨다고요? 근데 왜 제게 말씀하지 않으셨던 겁니까? 왜? 저는…… 저에게는…… 저를 그렇게 못 믿으셨던 겁니까? 제가 그토록 충성을 맹세했는데 왜 의지하지 않으셨던 겁니까?
아직도 눈앞에 그녀의 얼굴이 선하게 그려진다. 마을에 있을 때보다 반은 수척해져서 표정 하나 없는 얼굴로 뱀의 왕에게 끌려다니던 모습이, 제 마음을 자꾸만 아프게 했다.
이런 말은 자신의 가문에 먹칠하는 말이며 불충한 신하로 벌을 받겠지만, 일라이저는 주군을 잃었다는 상실감보다 연모하던 황녀를 잃었다는 상실감에 더 괴로웠다. 제 삶의 기준은 황실이 아닌 나타니엘 황녀였고, 그녀가 절대적이었다.
그녀 앞에 가풍은 언제든 버릴 수 있는 쓸데없는 사상에 불과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