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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179화 (179/488)
  • 179화

    *

    “식사를 거르는 건 안 된다고 말했을 텐데.”

    “나 좀 놔둬요. 머리가 아프다고요.”

    기껏 하인을 붙이고 시중을 들게 해, 차려입혀 놓은 드레스들이 방 여기저기 내팽개쳐져 있었다. 낡은 셔츠와 바지 차림으로 침대에 누워 있는 이엘을 쳐다보며 로빈이 미간을 찌푸렸다.

    “옷이 마음에 안 들었나? 네가 황궁에서 입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초라해서?”

    로빈이 허리를 숙여 바닥에 흐트러진 드레스를 움켜쥐었다. 이엘은 만사가 귀찮아서 그의 말에도 대꾸하지 않았다.

    하루 종일 뱀의 인형 놀이를 하는 것에 진저리가 났다. 그게 아니어도 누군가의 시중을 받아 옷을 입는 것에 큰 트라우마가 있는 그녀로서는 모든 상황이 귀찮고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나타니엘.”

    “이름. 함부로 부르지 말라고 했잖아.”

    드물게 감정을 내비치며 벌떡 일어서자, 로빈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고약한 성격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그녀의 성질을 건드렸다. 하지 말라는 건 모조리 하는 남자의 태도에 구역질이 난 이엘은 대놓고 짜증을 냈다.

    “제발 좀 나가! 당신 얼굴 보기 싫다는 말을 몇 번이나 더 해야 알아듣겠어?”

    “나는 네 얼굴을 봐야 한다는 말을 몇 번이나 했지.”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해 주고 있잖아. 연구든, 인형 놀이든. 아침부터 저녁까지 당신 종족의 얼굴이 되어 주고 있잖아. 그러니까 그걸로 만족하고 그만 좀 떨어져.”

    “손이 닿을 수 없으니 눈에라도 담는 게 뭐 그리 나쁜가?”

    “내가 역겨워서 그래.”

    지긋지긋할 정도로 내비치는 소유욕에 머리가 아팠다. 어차피 나는 네 소유가 아니란 소리 따위가 들릴 리 없는 남자다.

    이엘은 대화를 포기하고 다시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아침부터 정신없이 돌아다닌 탓에 몸도 몹시 피곤했다. 욕조에 물을 받아 씻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목욕 시중을 들겠다고 혀를 내밀 뱀들이 눈에 선해 일찌감치 포기해 버렸다.

    뱀들의 대우는 그 일이 있고 난 뒤로 완전히 변했다. 온순하고 순종적이었다. 로빈이 명령한 것도 아닌데 저희가 먼저 아양을 떨고 굽실거렸다. 늑대들이 호의를 갖고 그녀를 대하던 태도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다분히 의도적이고 계략적인.

    어떻게든 호감을 사서 짝이라도 맺고 싶나 보지.

    “피곤할 텐데, 목욕이라도 해라.”

    “손대지 마.”

    흐트러진 머리카락에 닿는 것마저 싫다는 듯 단칼에 쳐 냈다. 로빈은 침대 끄트머리에 앉아 그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닿지 말라고 해서 그런 건지, 그게 아니면 저게 암컷이라 그런 건지. 욕구가 계속해서 들끓었다. 어떻게든, 어떻게든 내 것으로 만들고 싶다는 욕구가.

    눈을 감은 그녀의 얼굴엔 독기가 없었다. 혐오로 번진 녹색 눈동자가 사라지니, 그저 아름다운 피사체만 남아 있을 뿐이다.

    로빈은 이엘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그러다 붕대를 감은 손에서 시선이 멈췄다. 오늘도 어김없이 환부에서 터져 버린 붉은 피가 붕대 밖으로 번져 있었다. 자학이 스트레스를 푸는 용도인 건지, 붕대는 이제 존재의 의미를 잃었다.

    시선을 돌려 구불거리는 흑발을 응시했다. 윤기가 흐르는 머리카락이 시트 위에 어지럽게 펼쳐졌지만, 그것마저도 제 눈엔 그림 같았다. 그리고 그 아래. 흐트러진 앞머리 사이로 동그란 이마가 귀엽게 자리하고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이마에 손을 뻗으려던 것을 억눌렀다. 그 위에 제 입술을 붙이고 종속적으로 굴고 싶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어, 스스로에게 놀랐다. 그러나 그 역시 억눌렀다.

    내가, 인간 따위에게 그럴 리가.

    “오헬.”

    “…….”

    “네가 원하는 건 도대체 뭐지?”

    “…….”

    “고작 나에 대한 복수가 아닐 텐데. 그걸 위해 악마와 손을 잡은 것 또한, 아니잖나.”

    그러나 그녀는 대답이 없었다. 언제나처럼 그의 말엔 무시로 일관했다. 쓸데없는 말은 줄이고, 정말 실무적인 대화만 응했다. 그럼에도 로빈은 그게 좋았다. 이엘을 인형처럼 제 옆에 세워 두고, 가둬 두고, 지켜보고. 손도 못 대는 인형이라 할지라도 좋았다. 대화는 거의 일방적으로 저 혼자 하고 있는 꼴이라 해도.

    “나의 왕비가 되는 건 어떠한가?”

    로빈의 제안에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하던 이엘이 풋― 웃음을 터뜨렸다. 명백한 비웃음이었음에도 로빈은 신경 쓰지 않았다. 한참 만에 눈을 뜬 이엘은 피곤한 얼굴로 그의 눈을 또렷이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나더러 당신의 인형으로 계속 살라는 거야?”

    “싫은가?”

    “좋을 것 같습니까? 새장에 갇힌 새와 다를 게 없는 이따위 생활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로빈이 좋아하는 것들로 잔뜩 치장된 채 영지를 거닐었다. 모두의 감시를 받으며 마치 전리품이라도 된 것처럼 남자의 옆에서 감정 하나 없이 돌아다니는 꼴이 좋겠는가?

    이게 노아와 로빈의 차이였다. 노아는 그녀의 존재를 안 뒤로 서둘러 편한 옷을 마련해 주었다. 언제나 가슴 가리개를 비롯해 맞지도 않는 옷을 입느라 고생하는 자신을 위해, 유행은 지났을지라도 품이 크고 활동에 편한 옷을 주었다.

    그러나 로빈은 아름답고 화려하게 자신을 치장시켰다. 기실 제국의 모든 귀족이 그러했으니 이상할 건 아니다. 다만 그녀를 위한 게 아니라 로빈 자신을 위한 행동이었다는 점에서 노아와 달랐다. 그는 이엘을 제 소유물로 인식하고 있었으니까.

    “뱀에게 새는 독이니까.”

    “…….”

    “네 날개를 부러뜨려서라도 가둬 두고 싶은 거겠지.”

    로빈은 그렇게 말하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는 엉망이 된 그녀의 방을 한 번 둘러보다가 문고리를 잡았다. 그리고 방을 나서기 전, 이엘에게 짧게 경고했다.

    “치료는 제때 받도록 해. 네 몸은 네 것이 아니니까.”

    그러나 이엘은 듣는 시늉도 하지 않고 그대로 눈을 감았다.

    *

    “리플의 가문으로 입적하려고 하는데.”

    로빈의 목소리에 이엘이 들고 있던 스푼을 집어 던질 것처럼 테이블 위에 세게 내려놓았다. 짤그락 소리가 시끄럽게 들렸지만, 때마침 시작된 악단의 클래식 음악 덕에 묻혀 버렸다.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부아가 치밀어 올랐으나 억눌러 삼키고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폐하. 과분한 영광이군요. 그러나 저는 이 정도로도 충분히 만족하고 있답니다.”

    “비도 싫다, 작위도 싫다, 가문도 싫다. 도무지 네 마음을 모르겠군.”

    “그냥 이대로 두시면 됩니다. 제가 바라는 건 어차피 들어주실 마음이 없잖아요.”

    묘한 신경전이었다. 오가는 대화는 한없이 우아했지만, 금방이라도 서로를 죽일 것 같은 살벌한 신경전이 며칠째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매번 이러한 분위기를 중재하는 건 리플의 몫이었다. 그는 여느 때처럼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다가 눈치껏 와인을 들고 이엘에게 다가갔다.

    “와인이 떨어졌으니 따라 드리겠습니다.”

    적절하게 말을 끊듯 들어온 리플이 우아한 동작으로 그녀의 잔에 와인을 따라 주었다. 살기를 담고 자신을 대하던 리플마저 제게 누그러졌다. 이쪽은 딱히 욕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로빈의 입장과 명령 때문이겠지만.

    몇 번이나 함께 한 식사지만 매번 이런 식이었다. 제대로 된 대화를 해 보려고 하면 이엘이 입을 다물고 듣는 시늉도 하지 않으니, 로빈은 부러 그녀의 성질을 긁을 화제만 토해 냈다.

    그것 역시 이엘이 무시하면 그만이겠지만, 지금처럼 거북하기 짝이 없는 것들만 내놔서 기어이 입을 열게 만들었다. 저것도 재주라면 재주다.

    “나의 아이들이 너를 뭐라고 지칭할지 고민이라고 하기에.”

    곁으로 다가온 커다란 테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로빈이 피식 웃었다. 애정이 듬뿍 담긴 터치를 보며 이엘은 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그냥 저를 부르지 않으면 될 일 아닌가. 그러나 몰려든 수십 쌍의 눈동자들은 지치지도 않는 건지, 숨 막힐 정도로 빤히 지켜보고 있었다.

    “어차피 불러도 대답할 마음 없습니다. 마음대로 하라고 하세요.”

    “그렇다면 적당히 아가씨라고 부르도록 해라.”

    “예, 폐하.”

    뱀들이 쉭쉭 소리를 내며 혀를 날름거렸다. 인간에게 공대하라는 의미임에도 불구하고 뱀들은 그러겠노라 답했다. 밸도 없는 건지.

    이엘은 그들에게서 시선을 돌려 맞은편에 앉은 오드를 바라봤다. 역시나 오늘도 식사를 반이나 남긴 채 파리한 안색으로 앉아 있는 게 고작이었다.

    안다. 자신이 불러들인 일로 인해 오드에게도 심각한 피해가 갔음을. 이곳은 성전도 없고, 신의 보호를 받지도 못하는데 하물며 자신은 ‘그’를 불러들이기까지 했다. 안 그래도 몸이 좋지 않은 오드에겐 치명타를 입혔으리라.

    게다가 보호석을 연구한다는 명목으로, 뱀들은 이엘도 모르게 오드를 데려가 실험을 준비하기까지 했다. 물론 뒤늦게 알고 완강히 거부한 덕에 일시적으로 멈췄지만, 그대로 끌려갔다면 위태로운 그의 수명이 얼마나 더 줄어들었을지 모를 일이다.

    어쨌든 이곳에 더 머무를수록 피해는 고스란히 오드가 입게 될 것이다. 한시라도 빨리 나가야 할 텐데.

    “오늘은 왕성 밖으로 시찰을 나갈까 하는데.”

    “…….”

    “같이 나갈까?”

    남자의 눈이 반달처럼 휘어지자, 그 아래 점도 같이 흔들렸다. 이엘은 로빈을 빤히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서둘러 스완에게 연락을 취했다. 뒤로 진을 물리겠다는 답변을 듣고 나서야 식사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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