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
“폐, 폐하. 나자르가 이상한 성력이라도 쓴 건 아닐까요……?”
실험실 안은 우논들의 웅성거림으로 시끄러웠다. 가장 큰 모니터를 응시하던 뱀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보고도 믿기지 않는 광경이 벌써 열두 번이나 이어지고 있었다.
아무리 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종족이라고는 해도, 악마를―여전히 믿지 않지만―등에 업은 인간을 반길 리 없다. 그래서 로빈은 조금 전에 저가 겪었던 일을 리플을 포함한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자신은 그녀를 포기할 수 없으니까.
반면 영문을 모르는 귀족들은 창백한 얼굴로 멍청하게 유리창 너머만 보고 있었다. 저건 나자르의 성력을 이용했거나, 혹은 직접적으로 신의 힘을 빌렸다고밖에 설명할 도리가 없다. 복잡한 표정의 우논들이 로빈의 눈치를 보며 저희끼리 수군거렸다.
팔짱을 낀 채 몇 시간째 꼼짝도 않고 지켜보던 로빈이 마침내 팔을 풀고 걸음을 옮겼다. 유리 너머 흐트러진 옷을 정리하며 기계 위에서 나온 이엘과 시선이 마주쳤다.
‘내가 사랑하는 아이지. 아주 많이.’
그건 신이 아니다. 다른 건 몰라도 그것 하나만은 알 수 있다. 그 소름 끼치는 목소리, 형태 없는 존재, 비정상적인 방식.
‘저런. 네 모습이 보이는구나.’
‘…….’
‘이 아이에게 무엇이든 내줄 것처럼 구는 네 모습 말이다.’
저를 비웃던 목소리가 아직도 귓전에 맴돈다. 로빈은 주먹을 세게 쥐며 문을 열고 실험실 안으로 들어섰다. 차가운 바닥에 맨발로 선 이엘이 자신을 바라보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명령이면 발을 핥으래도 그렇게 할 것처럼. 먹을 것이 떨어지기만을 갈구하는 모습이, 내게는 아주 잘 보이는구나.’
내가 빌어먹을 내 아비처럼 인간의 발에 머리를 갖다 댈 것이라 생각하나? 로빈은 코웃음 쳤다. 그게 진실이든 아니든, 내가 인간 따위에게 굽실거릴 리가.
“이렇게 대대적으로 네 모습을 노출하면 네게 아무런 이득도 없을 텐데.”
“대대적으로 공표하려고 하죠.”
“…….”
“나는 더러운 뱀의 새끼 따위 갖지 않을 거라고.”
세포 분별하는 기계를 찾아 달라던 이유를 알겠군. 조금 전 열두 번의 실험으로 이엘의 몸속에서 난자가 존재했다가 사라지길 반복하던 모습을 확실하게 확인했다. 모든 게 그 목소리의 말대로였다.
그녀는 정말 악마와 손이라도 잡은 것 같았다.
“임신을 하지 못하는 암컷은 우리에게 쓸모가 없다는 걸 알고 있잖아. 오히려 적을 늘리는 꼴 아닌가?”
“누가 임신을 하지 못한다고 했죠?”
“…….”
“내 몸에 뱀의 것이 닿는 게 싫다고 했을 뿐이에요.”
“…….”
“선택의 권한은 제게 있어요.”
인간이 혀를 차며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자신의 종족을 처량하다는 듯 바라보는 눈빛도 잊지 않았다. 로빈은 그 순간 깨달았다. 왜 그녀에게서 동족의 냄새가 나는데도 다르게 느껴졌는지.
“폐하께서 말씀하셨잖아요? 둔이면 족하다고요.”
“…….”
“내가 늑대를 갖든, 독수리를 갖든, 하다못해 인간의 아이를 가져도 좋다고요.”
선망하던 모습. 간절히 바라던 모습. 닮고 싶었던 그 모습.
영락없는 황족의 모습이었다.
그녀에게서 뱀의 냄새가 나는 게 아니라, 뱀이 황족을 닮고 싶어 따라간 그 냄새였다.
“그저 당신의 종족만 아니면 되니까.”
“웃기는군. 우리가 네 말을 따라 줄 것 같나? 네게서 원하는 걸 얻을 때까지……,”
“아직도 제 의지를 모르시나 봐요.”
“…….”
“저는 한다면 하는 ‘인간’이에요. 살고 싶어서, 망치고 싶어서, 신의 손을 앞에 두고도 악마와 손을 잡은 인간 말이에요.”
젠장. 로빈은 마른침을 삼키며 이엘을 내려봤다. 그녀는 저를 물끄러미 보다가 피식 웃으며 붕대를 감은 제 손바닥을 쳐다봤다. 그러곤 주먹을 거세게 쥐었다가 폈다. 기껏 지혈해 놨는데 다시 터져 버린 건지, 새하얀 붕대 위로 피가 빠른 속도로 번져 가기 시작했다.
“실험은 도울게요. 어렵지 않으니까.”
“…….”
“나도 살고, 당신도 살고. 서로에게 좋잖아요?”
로빈이 인상을 찌푸렸다. 나자르에게 치료를 맡겼어야 했는데. 한사코 거부하기에 임시로 약을 바르고 붕대를 둘렀지만, 단 한 번의 아귀힘으로 환부가 터졌다. 길고 깊게 찢어진 탓에 상당히 아플 텐데도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되레 이런 것 따윈 별거 아니란 듯 굴고 있으니.
마치 몇 번이고 원한다면 제 몸을 갈기갈기 찢을 수 있단 식으로 굴고 있으니.
“……네게 손을 대지 않는 조건인가?”
“역시 폐하는 말이 통하네요. 다른 것들은 하나같이 멍청해서 말이 도무지 통하질 않던데.”
이엘의 비죽거림을 듣고 있던 뱀들이 얼굴을 와락 구겼지만 앞으로 나서진 못했다. 딱히 저희들의 왕이 말려서도 아니다. 본능적으로 그녀에게 대들면 안 될 것 같았으니까. 분명 인간과 이종족의 위치가 뒤바뀌었는데, 왜 이렇게 발아래로 깔리는 듯한 압박감이 드는 건지 모르겠다. 이젠 인간의 발에 밟히는 존재가 아닌데도.
“그럼 딱 하나만 약속해.”
“뭘요?”
“네가 실험을 성공하든 안 하든. 큰 관심 없어, 이젠.”
“…….”
“아이만 낳아.”
뚝뚝 흐르는 피를 가만히 쳐다보던 로빈은 그쪽으로 손을 뻗으려다 멈칫했다. 닿지 말라고 했지……. 더러운 병균 취급당하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그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이엘의 손으로부터 다시 멀어졌다.
대신 그 아래, 피가 뚝뚝 떨어지는 그녀의 손바닥 아래에 제 손을 펼쳤다. 그러곤 떨어지는 피를 손에 받았다. 마치 그녀의 것이라면, 피 한 방울조차 버릴 수 없다는 듯이.
“처음으로 낳는 아이는 온전히 내 것이다.”
저런……. 이엘은 미묘한 웃음을 지었다.
*
“교섭은 성공한 모양이야.”
스완의 말에 맥이 탁 풀린 노아는 눈을 감았다. 촉각을 곤두세웠던 며칠의 시간이 끝났다. 여전히 동맹군은 뱀의 영지를 둘러싼 채 철수할 생각이 없었지만, 한고비를 넘긴 것만은 확실했다.
그러나 문제는 다른 곳에서 터졌다. 노아의 짙은 눈동자가 녹색 천막이 있는 곳에 닿았다. 숲에 은밀하게 가려졌던 천막의 입구가 흔들리며 금발의 소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노아와 시선이 마주친 레온은 고개를 저었다.
“출혈이 상당해.”
“…….”
“오늘 밤이 고비가 될 것 같아.”
눈앞이 아득해졌다. 그래 봤자 인간이다. 제 손에 죽어 나간 인간이 얼마나 많은데, 인간 꼬마 하나 죽는다고 달라질 게 뭐란 말인가.
하지만 그냥 인간이 아니다. 이엘이, 정을 주고 마음을 준 인간. 온통 늑대와 이종족으로 바글거렸던 제 영지에서 웃으며 정을 주었던 동족. 그것도 자신이 그녀의 하인으로 쓰려고 노예시장에서 골랐던 인간이었다. 이엘이 정을 줄 걸 알았으면서 인간을 데려왔던 게 자신이다.
그리고 어쩌면 주드를 잊길 바라면서.
어떻게 나는 하는 일이 죄다 이렇게 멍청한지. 왜 이종족이 멍청하다고 하는지 그녀를 만나고 난 뒤로 절절히 느끼고 있었다. 노아는 자책하며 헛숨을 토했다.
“폐하. 아무도 피터를 납치할 줄 몰랐습니다.”
“…….”
“폐하의 탓이 아닙니다.”
“과연 그녀가 그렇게 생각해 줄까?”
운을 뗐던 우논이 노아의 자조 섞인 물음에 입을 다물었다. 물론 이엘은 절대 늑대의 탓으로 돌리지 않을 것이다. 전부 제 탓으로 돌리겠지. 노아는 그게 싫었다. 그녀에게 스스로를 탓할 구실을 만들어 버린 상황이.
가까스로 이엘과 연락이 닿았던 스완이 이쪽의 상황을 전해 주기도 전에 이엘은 간곡하게 매달렸다. 제발 피터를 찾아 달라고. 뜬금없는 존재가 언급되자 동맹군은 의아했고, 곧이어 상대가 비열하기로 제일가는 로빈이었음을 깨달았다. 무리의 반 이상을 동원해 샅샅이 뒤진 결과 피터를 찾기는 찾았다.
넝마가 되어 있었지만.
“저건 내 갈기로도 안 돼.”
“어차피 네게 부탁할 마음도 없었다.”
“일단 내 영지에서 가져온 약초로 지혈했어. 사경을 헤매고 있지만 오늘 밤만 무사히 넘긴다면 금세 회복할 거야. 물론 한쪽 다리와 팔은 영영 없이 살아야 하겠지만.”
노아는 침음하며 손바닥 안에 제 얼굴을 파묻었다. 자신이 이엘의 약점이 될 존재를 만들어 주었고, 제 손으로 그녀에게 상실감을 안겼다. 무엇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는 스스로가 무능하고 한심해서 죽고만 싶었다.
피할 수 있었고, 막을 수 있었던 참사라는 게 그를 더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노아 자신에게 피터는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존재였다. 보호할 대상의 범위 안에도 들지 않는, 그냥 한낱 인간일 뿐이었다.
이번 일에 관해 그 누구도 노아를 비난하지 않았고, 또한 비난할 이유도 없다. 이종족이 인간을 지킨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거니까.
그러나 노아는 스스로를 비난했다.
“일단은 지켜보자. 오드라고 불리던 그 나자르가 와 주는 게 최상이겠지만…… 저쪽도 인질이 되었다고 하니까.”
“그래.”
“그래도 오헬이 안전하잖아. 난 그거면 돼. 다른 인간은 하등 상관없어.”
노아가 레온의 말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자신도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에게도 이엘의 안전이 최우선인 건 레온과 같지만, 그에겐 이엘이 지켜야 할 것 또한 최우선이었기 때문에. 짊어지고 있는 무게 자체가 달랐다.
어쨌든 레온의 말은 사실이다. 신변에 문제가 생기면 터뜨리라고 보낸 보호석을 쓰지도 않고 뱀을 잘도 구슬렸다. 시간이 상당히 지났으니 이제 슬슬 뱀도 알아차릴 때가 됐다. 후각에 예민한 종족이기도 하고.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대체 어떻게 구슬렸기에 뱀이 그러겠노라고 답했지? 자신이 아는 로빈은 절대 이익 없이는 움직이지 않는 자였다. 그래서 두려웠다. 로빈은 한번 점찍은 먹이는 절대 놓지 않으니까.
그에게 걸린다면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말 것이다. 그러니 오드의 힘을 빌리면서까지 보호석을 변형시켜서 보냈던 거고.
“폐하!”
한참 레온과 이야기를 나눌 즈음, 늑대 하나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공작님이 오고 있습니다!”
“공작? 앤디?”
“예. 등에 인간을 태우고 오고 있습니다.”
“인간이라면, 일라이저인가.”
용케 르네의 영지를 지나쳐 왔군. 노아는 습관적으로 하늘을 쳐다봤다. 저 몰려든 먹구름 어딘가에 독수리들이 점이 되어 날고 있을 것이다. 그중엔 당연히 르네도 포함됐다.
노아 자신도 확신하진 않는다. 그저 닮은 소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연히 닮은 얼굴이라기엔 어린 시절의 루시우스와 매우 흡사해서……. 적어도 한때의 친구였던 자신이 못 알아보는 게 이상하지 않은가.
르네 역시 한눈에 알아보리라. 자신이 루시우스에게 갖는 감정과 르네가 루시우스에게 갖는 감정은 전혀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일라이저를 알아본 것과 르네가 알아보는 것은, 분명 다른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그래서 르네와는 최대한 접하지 않는 편이 좋았다.
하지만 이엘이 그를 필요로 한다. 심지어 스완을 통해 미리 손을 써 두기까지 했다. 그녀는 르네에게 일라이저가 어떤 존재가 될지 모르기 때문에 그랬겠지만.
노아는 고개를 흔들어 생각을 버렸다. 이렇게 되나, 저렇게 되나 어쨌든 당사자들이 해결할 문제다. 자신은 그저 이엘이 시키는 대로, 준비한 대로만 따르면 되니까.
“폐하! 다녀왔습니다!”
앤디가 헉헉 숨을 몰아쉬며 노아의 앞에서 멈춰 섰다. 동시에 그의 위에서 일라이저가 가볍게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그는 노아를 향해 묵례했다.
“가 보도록 해.”
노아는 간결하게 할 말만 하고 그를 돌려보내려 했다. 그러다가 한숨을 내쉬더니 앤디를 향해 턱짓을 했다.
“그 전에. 일라이저를 녹색 천막으로 안내해라.”
“천막이요? 저희랑 같이 움직이는 겁니까? 하지만 곧 독수리…… 아무튼 조금 위험하지 않습니까?”
“피터가 여기 있어.”
“네?! 피터요?”
화들짝 놀란 앤디가 눈을 크게 뜨자, 일라이저는 의문을 갖고 그를 쳐다봤다. 어쩐지 왕의 목소리에서 좋지 않은 분위기를 읽은 앤디는 저를 보는 일라이저에게 딱히 설명하지 못하고 주저했다. 결국 그는 일라이저의 옷 끝을 이빨로 물고 천막 쪽을 향해 잡아당기는 걸 택했다.
시키는 대로 천막 안으로 일라이저가 홀로 들어섰다. 앤디는 주드가 떠올라 차마 함께 들어가지 못했다. 그에게 피터는 대화도 나눠 본 적 없는 존재였지만, 일라이저가 느낄 마음이 무엇일지 가늠이 돼서.
“아…… 아아…….”
절규하며 울부짖던 자신과는 달리 일라이저는 짧게 신음을 토할 뿐이었다. 앤디는 천막 앞을 지키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동시에 비슷한 아픔을 또다시 느꼈을 이엘이 안타까워, 그는 정말 마음이 아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