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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177화 (177/488)
  • 177화

    피터를 알고 있어……. 이엘은 마른침을 삼키며 뒤로 주춤했다. 그러나 그녀의 뒤에는 유리 테이블이 막고 있었다. 꼼짝없이 테이블과 로빈 사이에 갇혀 버린 이엘은 창백해진 얼굴을 숨기지 못한 채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놈을 어떻게 알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나?”

    “무슨 말을……,”

    “네가 늑대의 영지에 있다는 걸 알면서도 굳이 쳐들어가지 않았던 건 순전히 내 재미 때문이었다.”

    로빈의 손가락 사이사이에 검은 머리카락이 걸렸다. 축축한 물기가 손을 타고 흐르는데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내가 늑대의 영지로 ‘못’ 들어간 게 아니란 이야기야.”

    “……돌려 말하지 말고 하고 싶은 말만 해.”

    “개들에게서 널 데려오는 건 어렵지도 않았다고.”

    “…….”

    “하물며 개들의 관심 밖인 인간 꼬마 하나 못 빼올까.”

    설마.

    아니야. 아닐 거야. 그럴 리가…….

    이엘은 다급하게 스완을 찾았다. 하지만 스완의 응답이 들려오질 않는다. 제발 대답해 줘, 스완……! 몇 번이고 그를 불렀다.

    “결국 한 손이 다 먹히고 나서야 진실을 토하더군.”

    “무, 무슨…… 아…….”

    “네가 여자라고.”

    말을 못 하는 거지, 귀가 먹은 게 아니니까. 그 말과 함께 머리카락을 지분거리던 로빈의 손이 순식간에 이엘의 목을 움켜쥐었다. 커다란 남자의 손은 이엘의 목을 감싸 쥐고 힘을 주었다. 숨이 막힌 얼굴이 새빨갛게 변해 갔지만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머릿속엔 환하게 웃는 피터의 얼굴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모든 퍼즐 조각이 맞아떨어졌지.”

    “으……으윽……!”

    “아아―! 네가 여자라니. 네가 암컷이라니……. 그토록 갈구하던 암컷이었다니.”

    로빈의 눈은 완전히 미친 것처럼 보였다. 이엘은 숨통을 끊을 것처럼 목을 조이는 로빈의 손을 손톱으로 거세게 할퀴었다. 그로 인해 손에 힘이 잠깐 빠지자, 틈을 놓치지 않고 발로 남자의 복부를 차서 뒤로 넘어뜨렸다. 그러나 로빈은 바닥으로 넘어진 뒤에도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황자. 아니……. 황녀. 그래, 네가 황녀구나.”

    “피터를 어떻게 한 거야. 말해!”

    타들어 갈 것 같은 목을 부여잡았다. 그러곤 온 힘을 다해 유리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리쳐 깨뜨렸다. 이엘은 개중 가장 날카롭고 긴 조각을 손에 쥐었다. 붉은 선혈이 손에서 후두둑 떨어졌다.

    “피터를 어떻게 했냐고 묻잖아!”

    “너는 널 배반한 놈을 감싸 주고 싶나?”

    “말 돌리지 마. 빨리 피터를…….”

    “밖에 내다 버렸다. 피를 많이 흘려서 죽었겠지.”

    “…….”

    “뜯어 먹힌 부위가 넓거든.”

    “아…….”

    “뭐, 중간에 더 먹혔을 수도 있고. 대답을 듣자마자 내던졌으니, 다른 놈들이 먹어서 깔끔하게 해치웠는지는 나로선 알 수가 없거든.”

    로빈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그녀를 향해 웃었다. 이엘이 봤던 로빈의 웃음 중에 가장 비열하지만 가장 행복해 보이는 미소였다. 이엘은 유리를 움켜쥔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을 주었다. 피가 계속해서 흘렀다. 유리가 손에 박혀, 이젠 떨어지는 게 아니라 줄줄 흐르는 수준이 되었다.

    “쯧. 손을 치료해야겠군.”

    “다가오지 마.”

    “같잖은 협박은 이제 아무 소용 없다는 걸 알 텐데. 여긴 내 소굴이다. 내가 명령만 하면 뱀이 전부 들이닥칠 텐데, 네가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해?”

    “죽는 방법도 있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엘이 유리를 제 목에 갖다 댔지만 그를 예상하고 달려든 로빈이 더 빨랐다. 거세게 손등을 후려쳐 유리를 던져 버린 남자는 그녀의 옷깃을 잡아채고 제 쪽으로 당겼다.

    “넌 이제 내 허락 없이는 절대 못 죽어, 황녀.”

    “…….”

    “네가 할 일이 아주 많으니까.”

    로빈은 절망으로 일그러진 이엘의 표정을 쳐다보며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뒤로 풀썩 넘어갔다. 손바닥을 타고 흐르는 피가 침대 시트를 흥건하게 적셔서, 비린내가 바로 옆에서 진동을 했다.

    “네가 여자라면, 암컷이라면.”

    “…….”

    “저딴 연구에 아까운 시간을 쓸 필요가 없지.”

    신께서 내게 선물을 주셨군. 로빈은 이엘의 손목을 더 세게 쥐며 은근하게 속삭였다. 음욕과 다를 바 없는 욕망으로 번들거리는 눈빛이 그녀의 몸 곳곳을 훑어 내려갔다. 이엘의 손목을 내리누른 커다란 손이 어느새 팔을 지나 어깻죽지를 지분거렸다.

    광기에 미친 왕이 따로 없다. 그렇게 평을 내린 이엘은 울먹거리던 눈물을 억눌러 삼켰다. 일단은 여기서 살아남는 게 먼저다. 다 만들어 놓은 덫을 포기할 순 없다.

    살아야, 피터의 시체라도 거둘 수……. 아― 역시 정을 주면 안 되는데. 모두가 살 수 없는 길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는데.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인데, 나는 또.

    “어떻게 살아 있었지? 우리가 전부 죽였는데. 인식표, 이름, 추적! 우리 생에 그렇게 완벽하게 머리를 굴린 적은 없었다. 절대 인간 여자는 살 수 없었을 텐데, 어떻게 살아남았나?”

    마치 살아남은 게 기특하다는 식으로 말하는 로빈을 올려보며 이엘이 짧게 웃었다. 그녀는 제 위에 올라탄 남자를 향해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나는 악마와 손을 잡았거든.”

    “재미있군.”

    “…….”

    “신의 축복을 받은 인간인 네가, 악마의 손을 잡았다고?”

    차라리 내가 악마와 손을 잡는 게 더 어울리겠어. 로빈의 비죽거림에도 이엘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는 겁을 먹은 것 같지도 않았고, 두려워하지도 않아 보였다. 로빈은 광인처럼 웃던 낯을 지우고 그녀를 차갑게 쳐다봤다.

    연기를 하는 건가? 아니면 달리 믿는 구석이 있는 건가? 가령 늑대들이 안에 있다든지……. 아니. 깊게 생각하지 말자. 인간은 머리를 쓰는 종족이니 깊게 파고들면 헤어나지 못하는 쪽은 자신이 된다.

    로빈은 상념을 지우며 다시 그녀의 손목을 억세게 짓눌렀다. 찢어진 손바닥에서 피가 울컥울컥 터져 나온다.

    “뭐가 됐든 필요 없다. 나랑은 관계없지. 네가 악마와 손을 잡든, 신에게 선택을 받든. 어차피 우리가 신에게 버려졌다는 사실은 변함없으니까.”

    “당신은 날 어떻게 하고 싶은 건데?”

    “내 아이를 낳게 만들어야지.”

    “…….”

    “너와 내 사이에 아이가 태어난다면, 그건 둔이 될 것이다. 둔은 무궁무진하게 쓸 수 있으니까 내 병력에도, 내 미래에도 좋은 존재가 되어 줄 테고. 그게 또 아이를 낳고, 또 낳고, 또 낳겠지.”

    로빈의 말에 그녀가 또 한 번 짧게 조소했다.

    “저런. 내가 뱀의 아이를 가질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네가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내 배 속에 뭐가 있는 줄 알고.”

    로빈은 느릿하게 시선을 내려 이엘의 납작한 배를 쳐다봤다.

    “……이미 노아의 아이를 가진 건가?”

    이종족은 인간과 다르게 이미 다른 수컷의 아이를 가진 암컷에겐 절대 손을 대지 않는다. 아무리 일처다부를 지향하는 종족이라 할지라도, 임신한 암컷은 건드리지 않는 게 룰이었다. 물론 아닌 경우도 있지만 대다수는 그 정도 본능을 갖고 살았다. 게다가 지금 로빈의 입장에선 뱀의 아이인지, 늑대의 아이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아이를 갖고만 있다면.’

    그러나 제 생각을 알아챈 것처럼 이엘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 낯짝이 소름 돋을 정도로 선황의 얼굴과 닮아, 로빈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

    “왜 꼭 아이를 가질 수 있다고만 생각하는 거야?”

    “뭐?”

    “갖지 못할 경우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는구나.”

    “…….”

    “당신이 그랬잖아. 불임인 암컷은 필요 없다고. 쓸모도 없다고.”

    너 설마……. 잠시 생기가 머물렀던 그의 얼굴이 다시 아득하게 어두워졌다. 물론 성적으로 착취하고 싶어서 안달 난 놈들도 있겠지. 그러나 로빈은 암컷에게 그런 걸 기대한 게 아니었다.

    로빈이 잠깐 흔들리는 틈을 타 손을 풀어낸 이엘이 그의 뺨을 손등으로 톡톡 건드렸다. 그녀의 피가 남자의 뺨에 지저분하게 묻었다.

    “당신의 표정이 나를 재밌게 해 줬으니, 나도 보답으로 흥미로운 이야길 해 줄게.”

    “…….”

    “죽음을 목전에 두고 신과 악마의 앞에 선 여자아이가 있었어. 보통의 인간이었다면 신의 손을 잡았겠지만, 안타깝게도 소녀는 제 몫의 행복보다 타인의 불행을 더 바랐지. 그래서 아이는 신이 아니라 악마의 손을 잡게 되었대.”

    이엘은 자신을 가두던 로빈의 힘이 완전히 빠진 것을 확인하곤 그를 밀치고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녀의 주변으로 새하얀 시트 위엔 붉은 피가 거미줄처럼 어지럽게 번져 있었다. 그게 마치 죽음을 앞둔 사람 같아 보여서, 로빈은 저도 모르게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본능적으로 그녀에게 접근하는 게 꺼려졌다.

    “곱씹었어. 어떻게 하면 나를 버린 세상에게 벌을 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나를 죽인 세상에 기가 막힌 복수를 할 수 있을까.”

    처음 봤을 때부터 그랬다. 뱀의 것이 전혀 섞이지 않은 순수한 인간 그 자체인데, 어딘지 모르게 자신들과 비슷한 냄새가 났다. 그러나 자신들처럼 구역질이 나는 그런 냄새가 아니었다.

    “아― 나는 여자였지. 세상이 쓸모없다고 전부 지워 버린 그 인간 여자 말이야.”

    “…….”

    “그렇게 무차별적으로 학살해서 전부 도륙하더니, 이제 와서 뭐? 암컷을 만들어 종족을 번성하겠다고?”

    차갑게 죽은 녹색 눈동자 안에, 조롱에 가까운 웃음이 담겼다. 단 한 번도 인간을 학살한 것에 후회를 단 적이 없었다. 이전에도 말한 적 있지만, 그때로 몇 번을 돌아간다 하더라도 로빈은 몇 번이고 인간을 몰살시킬 것이다. 그것엔 후회하지 않는다.

    하지만 자신을 빤히 훑고 있는 이엘의 눈동자에 로빈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고 말았다. 그녀의 눈이 저를 가련하다는 양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부터 죽이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치?”

    그럼 이딴 개고생도 안 하고 말이야. 이엘은 그 말을 덧붙이며 피가 흐르는 제 손을 시트 위에 아무렇게나 닦았다. 찢어진 부위가 점차 벌어져 따끔거렸지만, 그런 건 이제 아무래도 좋았다. 머릿속이 여러 생각으로 뒤섞여 그런 아픔은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으니까.

    “악마가 소녀를 유혹했어. 내 손을 잡아. 내 손을 잡으면 네가 원하는 멸망을 네게 줄게―라고.”

    “오헬.”

    “물론 소녀도 알았어. 이게 얼마나 멍청하고 한심한 일인지. 제게 하등 도움도 되지 않을 거란 걸 잘 알고 있었거든.”

    “…….”

    “하지만 내게 도움이 안 되더라도, 당신에겐 절실하잖아?”

    로빈은 그 순간 그녀의 등 뒤로 검은 빛 같은 걸 보았다.

    아니. 보인 것 같은 게 아니다. 분명 아무것도 없었는데…… 아무것도 없는데. 지금도 그녀의 등 뒤엔 무언가가 달라붙어 있는 것처럼, 또렷하게 ‘그것’이 보인다.

    “갖고 싶다고 했지? 아이 말이야.”

    “…….”

    “궁금하지 않아? 내가 무슨 짓을 벌였는지.”

    로빈의 두툼한 손목을 잡아 제 배 쪽으로 끌었다. 아무것도 없는 이엘의 납작한 배에 손이 닿고 나서야 로빈은 얼빠진 시선을 내렸다. 그녀의 손이 닿는 곳곳마다 피가 번져 있었다. 저러다 과다 출혈로 죽겠군. 그 정도로 심한 것도 아닌데, 로빈은 불쑥 찾아온 생각에 미간을 찌푸렸다.

    제법 억센 아귀힘으로 제 손목을 단단히 붙잡고 놓아 주지 않았다. 로빈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손목과 이엘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래서 네 요점이 뭐야. 다소 가라앉은 목소리가 입 밖으로 나왔을 때였다.

    그녀의 등 뒤에 있던 검은 빛이 점차 커지더니, 단숨에 이엘을 집어삼켰다. 동시에 손목이 잡힌 자신도 검은 빛― 어둠에 빨려 들어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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