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앤디는 거듭된 자신의 부탁에도 그 어떤 대꾸 없이 일라이저만 쳐다보는 엔리케 때문에 속이 탔다. 엔리케는 오랜 시간 독수리의 우두머리를 보좌하던 가문 중 하나의 수장이었다. 그가 원수인 루시우스를 모를 리 없다.
다만 늑대들처럼 뇌리에 깊게 남은 얼굴은 아닐 테니 부디 떠올리지 않기만을 바랄 수밖에. 안타깝게도 일라이저는 눈동자 색을 제외하면 젊은 시절의 루시우스를 그대로 옮겨 놓은 모습이었으니까.
“후작. 사전에 말하지 않고 이렇게 찾아온 것은 우리의 무례입니다. 다만 후작도 알 듯, 상황이 급하다 보니 예법을 따를 여건이 안 되는군요. 부디 우호적인 관계를 생각해서라도 길을 비켜 주었으면 합니다.”
“……알겠습니다. 저희 폐하께서도 오헬을 위한 일이라면 언제든 허락하라고 하셨으니 비켜 드리겠습니다.”
엔리케의 손짓에 활시위를 당겼던 궁수대가 손을 내리고 모두 물러났다. 그때까지도 인간은 꼿꼿하게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엔리케는 옆으로 자리를 비켜 주면서도 일라이저를 향한 시선을 좀체 뗄 수 없었다. 분명 어디서 본 적이 있는 얼굴인데……. 그러나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때 저 멀리서 누군가 포로록 날아오는 게 일라이저의 눈에 잡혔다. 그는 앤디의 등에 올라타려다 말고 제 쪽으로 오는 독수리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정확히는 작은 독수리의 등에 올라타 있는 어떤 소년 때문에.
“로―”
저도 모르게 입 안에서 소년의 이름이 굴러 나왔다. 그러고 보니 그 사태 이후로 어떻게 된 건지 궁금해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아무리 이종족이라 해도 짧지 않은 시간을 함께 먹고 자며 살았는데.
독수리는 로를 바닥에 내려 주고 인간의 모습으로 내려왔다. 소년의 모습으로 돌아온 우논을 쳐다보며 일라이저는 두 번째 탄식을 삼켰다.
“메이슨. 위험하니 나오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
“괜찮아요, 할아버지. 이제 이 정도는 날 수 있어요.”
“로. 너도 마찬가지란다. 이렇게 돌아다니는 걸 레온 님이 아시면 우리에게 화를 내실 거야.”
“죄송합니다, 후작님. 하지만 일라이저가 온 것 같다는 소릴 들었는걸요.”
“아는 사이더냐?”
“네! 마을에서 함께 지냈던 인간입니다. 오헬 님의 친구예요.”
로가 금색 눈동자를 접으며 일라이저를 향해 빙그레 웃었다. 그 순수한 웃음에 일라이저는 할 말을 잃고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적대하고 배척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떻게 저런 웃음을 지어 줄 수 있지? 거짓이 하나도 담겨 있지 않은 순수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로의 시선에 일라이저는 순간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저기…… 진짜 일라이저야?”
그리고 그의 앞으로 다가온 작은 손이 더듬더듬 제 옷 끝을 만지작거렸다. 여전히 천으로 눈을 가린 소년은 옷자락을 간절하게 붙잡으며 그를 흔들었다.
“오헬을 꼭 구해 줘. 부탁해, 일라이저.”
“…….”
“아! 너는 듣지 못하지.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수어를 배울걸.”
점자도 겨우 떼기 시작한 자신이 수어를 어떻게 배울 수 있겠냐마는. 그럼에도 메이슨은 세상을 향해 한 발짝, 한 발짝 떼고 있었고 더 넓은 세상을 느끼고 싶었다. 이엘에게 배운 세상을, 자신도 같이 경험하고 싶었으니까. 무언가 말하고 싶은 게 잔뜩 있었는데 소통이 되질 않자, 메이슨은 실망한 기색으로 두리번거렸다.
그때 일라이저가 허리를 숙여 작은 손을 잡아 주었다. 이렇게 쥐어 보니, 마을에 있던 어린아이들과 다를 게 없어서…… 마음이 조금 시큰해졌다.
“그럴게요.”
“어? 내 말 들었어?”
“보입니다. 입 모양.”
일라이저의 대꾸에 메이슨이 활짝 웃었다. 응! 소년이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웃자, 일라이저의 입가에도 비로소 편안함이 번졌다. 마음에 있던 것이 조금씩, 조금씩 녹아 가는 기분이었다.
“구할게요. 오헬을, 반드시 구하겠습니다.”
“응!”
일라이저는 메이슨과 로의 작별 인사를 받으며 다시 앤디의 등에 올라탔다. 앤디는 짧은 인사만 남겨 두고 엄청난 속도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웅성거리는 독수리들은 침입자를 속히 보내 주고 다시 각자의 위치로 돌아가 경계를 지켰다.
“너도 어서 돌아가거라, 메이슨.”
“알겠어요.”
로와 메이슨이 안전하게 돌아가는 모습을 확인한 엔리케도 다시 왕성이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 발을 뗐다. 그러나 그는 움찔하며 그 자리에 멈춰 서고 말았다. 그리고 다시 천천히 몸을 돌려 앤디와 일라이저가 있던 곳을 응시했다.
무언가 반짝거리는 게 있었다. 후작은 한쪽 무릎을 꿇고 반짝이는 것을 주워 들었다. 브로치였다. 푸른색 사파이어가 가운데 자리를 잡고, 그 곁을 고풍스러운 장식이 둘러싸고 있는 브로치.
엔리케의 눈을 잡아 끈 것은 사파이어였다. 정확히는 사파이어 안쪽에 새겨진 익숙한 문양에 시선이 꽂혔다.
과거 러셀 후작가의 문양이었다.
*
이엘에게 연구에 관한 모든 권한이 넘어갔대도 그녀가 손을 댈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심지어 지하 연구실로 갈 때도 눈을 가린 탓에, 연구실의 정확한 위치조차 알 수 없었다.
로빈은 그녀의 능력을 믿었지만, 그녀를 신뢰하지는 않았다. 인간 아이들을 계속해서 언급하며 정신적으로 괴롭히는 것만 봐도, 그는 이엘이 실패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게 틀림없다.
그래서 이엘은 이카르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는 보통의 이종족 새끼보다 몸을 한참이나 더 작게 줄일 수 있었고 기민한 몸짓과 순발력, 예민한 감각으로 은신하고 있는 커다란 뱀들로부터 제 몸을 숨길 수 있었다. 이틀 전에 이야기했던 대로 이카르는 눈이 가려진 채 연구실로 내려가는 이엘의 품속에 있다가 그녀가 뱀들의 시선을 돌린 새에 재빠르게 빠져나갔다.
연구실 안에 도착한 이엘은 밝은 빛에 눈을 찌푸렸다. 온갖 전기를 끌어 쓰고 있는 지하실의 위용은 볼 때마다 숨을 막히게 했다. 그녀는 방호복을 입은 채 뱀들이 이끄는 대로 사령탑에 앉았다. 뱀들은 그녀의 손에 세포를 쥐여 주지 않았다. 몇 남지 않은 난자를 상하게 할까, 이엘에겐 지시만을 요구했다.
이엘은 제 지시를 기다리는 뱀들에게서 시선을 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기계를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기계?”
“네. 시간이 별로 없으니 인공자궁에서 배아를 성장시킬 수 있는지, 기계를 점검해 볼게요.”
“가능하겠나?”
“가능하게 해야죠.”
제법 확신을 주고자 단호하게 답했는데도 로빈의 표정은 심드렁했다. 이틀 전 그녀에게 윽박지르며 초조해하던 모습과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마른침을 삼킨 이엘은 뱀들의 안내를 따라 실험실 곳곳을 둘러보았다.
역시나 이곳으로 모든 기계와 자료를 전부 끌어왔다. 이전에 늑대로부터 습격을 받은 이후로 중요한 자료와 기계는 전부 자신들의 영지로 가져온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멀리 떨어진 연구소는 허울뿐이란 소리가 된다. 즉, 여기만 파괴하면…….
“오헬.”
로빈이 그녀의 허리에 손을 둘러 바싹 끌어당겼다. 그날 이후로 터치가 노골적으로 변한 탓에 불쾌함이 날이 갈수록 가중됐다. 그는 자신을 늘 지켜볼 수 있는 거리에서만 움직이게 했고, 그 범위를 벗어나면 어김없이 찾아왔다. 로빈이 눈치를 챈 것 같다던 이카르의 말이 불쑥 떠올라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이엘은 이번에도 억센 힘으로 로빈의 손을 풀어 벗어났다. 차가운 태도에 로빈이 짧게 조소했다. 언제나 그녀는 제 옆에 있는 것을 끔찍하게 생각한다. 같은 공간에서 숨 쉬는 것조차 싫어하는 듯했다. 그럼에도 로빈은 개의치 않았다. 그럴수록 더, 욕구가 끓어올랐으니까. 뱀이란 종족은 그런 종족이니까.
“그것과 더불어 찾고 싶은 기계가 있습니다.”
“기계?”
“세포의 개수를 셀 수 있는 기계요. 제국에서 쓰던 기계 중에 있습니다.”
“뜬금없이 그건 왜 찾지?”
“세고 싶은 세포가 생겼거든요.”
확실하다. 뱀들은 연구소 자체를 빼돌린 게 틀림없다. 애초에 박살 내고 말 게 없었다. 처음부터 뱀들은 목적을 가지고 연구소를 습격했고, 다른 이종족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기계를 전부 영지로 옮겨 왔다. 그들의 은신 능력으로 숨겨서 옮기는 건 별로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은신을 알아채는 독수리의 눈을 어떻게든 돌려야 했겠지만.
“그게 실험에 필요한가?”
“적어도 제게는요.”
“…….”
“제국의 연구실에서 쓰던 모든 기계가 이곳에 있다고 하셨잖아요.”
“…….”
“찾아 주세요. 필요합니다.”
로빈은 미간을 구겼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
뿌연 연기와 함께 욕실에서 나온 이엘은 침대에 앉아 있는 불청객으로 인해 걸음을 멈춰 세우고 말았다. 평소완 다르게 가벼운 셔츠 차림으로 들이닥친 로빈은 마치 제 방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앉아 있었다. 애초에 이 성의 주인이 저 남자이니 이상할 것도 없지만.
이엘은 타월로 젖은 머리를 대충 말리며 로빈을 본 척도 하지 않고 테이블로 향했다. 저를 무시하는 행동에도 로빈은 웃음을 터뜨릴 뿐이었다. 할 말이 있어서 들어와 놓고는 아무 말도 없는 로빈으로 인해 이엘은 잔뜩 몸을 굳히고 말았다.
왠지, 올 게 왔다는 느낌이 들어서.
“머리를 말려 줄까?”
“됐습니다.”
기척을 죽이고 다가온 로빈은 이엘의 젖은 머리에 손을 댔다가 또 냉담하게 내쳐졌다. 그런데도 불쾌한 기색 하나 없었다. 로빈은 평소보다 더 창백해 보였다. 자신만큼이나 연구에 신경을 쓰느라 눈 밑이 푸르죽죽해져서 뱀 특유의 기분 나쁜 피폐함이 느껴졌다.
“하실 말씀 있으시면 하세요. 저는 피곤해서……,”
“피터라고 알고 있나?”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이름에 멈칫했다. 내가 알고 있는 그 피터를 말하는 건가? 피터가 왜……? 피터라면 늑대의 영지에서 잘 지내고 있을 텐데……. 흔들리는 눈동자를 숨기지 못한 이엘을 쳐다보며 뱀이 느른히 웃었다.
“노아가 머리를 썼더군.”
“…….”
“늑대는 충성스럽지. 아무리 족쳐도 한번 품은 주인은 절대 배반하지 않거든.”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내가 아무리 고문하고 괴롭혀도 늑대는 너에 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거란 소리다.”
살벌한 내용과는 달리, 로빈은 다정한 손길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쓸었다.
“그래서 다른 놈을 데려오라고 했더니, 말도 못 하는 벙어리더군.”
“…….”
“어찌나 철저한지. 과연 노아다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