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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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친 숨소리가 절로 나왔다. 일라이저는 험준한 산을 넘으며 몇 번이고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뱀의 소굴은 마을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었다. 높고 험한 산을 몇 개나 넘어야 했다. 그러나 일라이저는 포기하지 않았다. 아니. 포기할 수 없었다. 자신의 주군을 눈앞에서 빼앗겨 버렸으니까.
분명 뜻이 있으신 거겠지. 어쩌면 이 사달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고 계셨을지도 모른다. 알기 때문에 사냥꾼 무리를 마을에 들이는 걸 반대하지 않으셨던 거야.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면서도 마지막에 보았던 그녀의 얼굴이 떠올라 자꾸만 마음이 공허해졌다.
― 그렇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누군가는 희생을 해야 할지 모른다.
― 그게 그대일 수도. 혹은 나일 수도 있지.
그때부터 알고 계셨던 걸까. 그렇다면 희생을 해야 하는 쪽은 응당 자신이다. 목숨을 걸고 황자를 지켜야 하는 건 자신이어야 했다. 하지만 황자는 저를 향해 어떤 신호도 주지 않고 뱀과 함께 떠났다. 그리고 보호를 받은 마을 사람들은 은혜를 잊고 제 목숨 살기 급급해, 황자와 나자르를 뱀에게 떠넘겼다.
일라이저는 살면서 단 한 번도 자신의 신념과 사상을 의심해 보지 않았다. 비록 아버지나 어머니처럼 올곧고 순수하지는 않아도, 자신의 뜻이 틀리지는 않았으리라고 장담했다.
인간의 입장에서 이종족을 혐오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으며, 순식간에 바닥으로 처박힌 인간들을 긍휼히 여기는 것 역시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살았고, 실제로 그게 옳았다.
그가 만난 이종족은 자신들을 노예로 부리며 학대하고 핍박했고, 어린아이들은 이종족에게 먹히기까지 했다. 그 아이들을 모두 이끌어 도망친 뒤로 마을을 꾸려 가난하고 가여운 사람들끼리 부족하지만 행복한 생활을 시작했다. 인간들은 서로에게 다정하고 따뜻했다. 그러니 자신의 신념이 틀리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모두 끝나 버렸다. 박살이 나듯 제 신념이 와장창 깨져 버리니, 마치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눈앞이 잿빛으로 변해 간다. 이젠 뭘 위해 살아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일라이저는 고개를 저으며 생각을 접었다. 아냐. 지금은 그런 사사로운 생각에 젖어 있을 때가 아니다. 뱀은 만만치 않고 지금의 자신과 상극인 종족이다. 그쪽 종족은 은신이 가능하고, 일라이저는 소리를 듣지 못한다. 그러니 자신은 뱀으로부터 시각과 청각을 모두 차단당한 셈이다. 난항이 예상되지만 포기할 마음은 없었다.
그는 걷던 걸음을 멈추고 제 손에 쥐여진 검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 나도 갈래, 형.
― 안 돼.
‘우리도 가고 싶어, 일. 같이 가자.’
― 위험해. 게다가 너희까지 오면 마을은 누가 지켜.
절망으로 물든 채 마을을 벗어나던 그의 뒤를 누군가 따라잡았다. 그들은 하나같이 격분에 사로잡혀 중무장을 한 상태였다.
‘하지만 황자님이라며! 오헬이 정말 황자님이야? 넌 알고 있었어?’
― …….
‘황자님이 잡혀가셨는데 우리가 어떻게 외면을 해!’
‘맞아. 그것도 우리 때문에…….’
아이들은 이엘을 잘 따랐지만, 저들은 그녀와 데면데면하던 사이였다. 오며 가며 인사 정도밖에 안 하는 그런 사이. 그런데도 함께 가겠다며 저를 따라와 준 게 못내 고마웠다.
그래, 맞아. 이게 일라이저가 아는 인간들이었다. 그래도 같이 살을 맞대며 살았던 사이니까. 같은 인간이니까. 위기에 빠졌으니까. 함께 도우러 가는 게 맞잖아. 아무리 이기적이라고 손가락질해도 자신이 아는 제 종족은 이런 종족이다. 다분히 인간적이고 다분히 정이 많고. 그래서 겁도 많은 것뿐이야.
그러니 황자님께서도 우릴 포기하지 않으신 거겠지. 그래서 우리의 모습에 실망하셨음에도 대신 잡혀가신 거겠지. 그래. 나 역시 이런 신념과 사상은 뒤로하겠다. 지금은 내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게 옳아.
일라이저가 끝끝내 그들을 말리자, 남자들은 부디 이엘의 안전을 부탁한다는 말과 함께 그의 손에 검을 쥐여 주었다. 변변찮은 무기였지만 함께하고 싶다는 의지를 담아서 건넨 것이다. 일라이저는 다시금 검을 바로 쥐며 험준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앤디는 높은 나무 위에서 일라이저를 지켜보고 있었다.
“대체 폐하는 왜…….”
혼자 중얼거리던 앤디는 귀찮은 얼굴로 제 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노아는 뜬금없이 자신을 일라이저에게 보냈다. 뱀들이 이엘을 납치해 떠나고, 1기사단을 비롯한 상당수의 늑대들은 뱀의 영지로 즉시 떠났다. 그리고 노아는 그들과 합류하기 직전, 앤디를 불러 일라이저를 찾아가라 명령했다.
‘네? 인간을…… 오헬에게요?’
‘엘은 놈을 필요로 한다. 뱀의 영지로 가고 싶다고 하면 안전하게 데려다주도록.’
‘정말 괜찮습니까?’
‘뭐가.’
‘……아시잖습니까. 저놈이 누군지.’
‘…….’
‘차라리 이걸 기회로 삼아 아예 오헬과 떨어뜨리는 건 어떠십니까? 놈의 존재는 늑대들 모두에게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킬 겁니다.’
웬일로 앤디는 왕에게 옳은 말을 했다. 실제로 늑대들 중 일부는 일라이저가 루시우스의 아들임을 눈치채고 앤디에게 은근슬쩍 운을 떼기도 했다.
루시우스 러셀. 그는 노아의 오랜 친구이며 늑대와도 깊은 관계를 가졌던 인간이었다. 그의 아들일지도 모르는, 설령 아니라 해도 루시우스를 쏙 빼닮은 인간을 지켜보는 건 늑대들에게 매우 괴로운 일이었다.
노아는 앤디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시클라멘 꽃을 손으로 괜히 괴롭혔다. 꽃이 그에게 짜증을 부리며 소리를 질렀지만, 그는 토라진 꽃을 계속 건드렸다. 습관이었다. 답답하고 그리울 때마다 나오는 습관.
‘폐하.’
‘엘이 원하잖아.’
‘오헬이 그렇게 해 달라고 폐하께 부탁한 것도 아니잖습니까.’
‘…….’
‘폐하께서도……,’
‘공작. 네 의견은 필요 없다. 폐하의 명령을 따르도록 해라.’
조용히 지켜보던 안드로가 일갈했다. 앤디는 그를 향해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항명하려다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루시우스는 안드로에게도 의미 있는 친구였다. 물론 냉정한 안드로는 노아와는 달리 단호하게 싹을 잘라 냈지만. 전쟁이 있던 밤, 르네가 루시우스를 죽일 수 있도록 위치를 일러 주었던 것도 안드로였다.
‘안드로 님은 화도 안 나십니까? 만약에 저 자식이 루스 경……,’
‘입. 다물어라.’
안드로가 싸늘하게 말을 잘라 내자 앤디는 하던 말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표정 변화가 별로 없는 편인데도 이번만큼은 안드로가 화가 났다는 게 여실히 드러났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노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팔에 걸쳤다. 슬슬 뱀의 영지에 합류할 시간이었다.
‘앤디. 일라이저를 데리고 뱀의 영지로 와라. 놈은 그곳에서 할 일이 있어.’
‘…….’
‘그리고.’
‘네, 폐하.’
‘르네의 눈엔 띄지 않도록 주의하고.’
앤디는 묵례를 하곤 왕성을 빠져나왔다. 그러곤 곧장 달려 일라이저의 냄새로 여기까지 추적해 왔다. 끝끝내 만나기는 했지만, 인간은 귀가 들리지 않아 소통이 되질 않는다. 자신은 이엘처럼 수어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계속 종이에 써서 대화를 할 형편도 안 된다.
무엇보다 자신은 저놈이 싫고, 저놈도 자신을 싫어하리라. 지켜봤던 지난 몇 주 동안 깨닫지 않았던가. 일라이저는 이종족을 혐오한다. 아, 저걸 어떻게 달래서 같이 가란 말인가. 앤디는 답답함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일라이저!”
역시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안 들릴 테니 당연한 말이겠지만. 사실 해결할 마음만 있다면 자신이 앞으로 달려가 마주치는 게 제일 빠른 방법이긴 한데……. 안타깝게도 앤디는 일라이저가 내키지 않아서. 왕의 명령이기에 여기까지 오긴 했지만 여전히 인간이 떨떠름했다. 계속 떠안기에는 자신의 종족에게 시한폭탄 같은 존재니까.
아득바득 산을 오르는 모습이 하찮고 한심하다. 실력이 출중한 제 아비와는 달리, 솔직히 별 볼 일 없어 보인다. 이엘이 왜 구태여 저놈을 골라잡은 건지도 잘 모르겠고.
앤디는 딱히 루시우스와 접점이 있진 않았지만, 그가 늑대의 영지에 자주 오갔을 때 여러 번 마주치긴 했다. 수려한 얼굴이 인상 깊었는데……. 아. 그러고 보니 르네 님의 누이가 후작을 좋아했다고 그랬지. 그 잘생긴 얼굴을 보고 첫눈에 반했다는 소문이 여기까지 들렸다.
그런데 참…… 비극적인 결말이다. 사랑했던 사람에게 끌려가 죽게 됐다니. 그러니 안드로가 르네에게 루시우스를 직접 죽일 기회를 줬지. 늑대만큼이나 독수리에게도 깊은 원한이 있는 남자였다. 뭐, 그것도 이미 죽은 사람이라 이야기해 봤자 달라질 것도 없지만.
앤디는 걷는 속도를 점차 줄였다. 그리고 고개를 위로 향해, 시야에 보이는 다음 산을 응시했다. 저긴 독수리의 둥지다. 제도에서 뱀의 영지로 가기 위해 가장 빠른 길은 독수리의 영지를 통과하는 길이었다. 일라이저는 르네의 영지를 통과해 가려는 모양이었다.
‘르네의 눈엔 띄지 않도록 주의하고.’
젠장.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다름 아닌 독수린데요? 그 뛰어난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면 일라이저를 발견하고 말 것이다. 그나마 르네가 마을을 주시할 땐, 그의 시야에 오직 이엘만 있었기 때문에 일라이저는 한낱 인간 부스러기에 불과해 알아채지 못했으리라. 그게 아니어도 노아가 부러 독수리의 눈을 가렸겠지만.
지금 와 생각해 보면 그건 연민일까? 혹시나 르네의 눈에 걸려 또 죽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연민. 친구의 혈육일지도 모르는 이에 대한 연민. 결국 앤디는 한숨 끝에 늑대의 모습으로 돌아와 성큼성큼 뛰쳐나갔다.
“이봐!”
갑자기 난데없이 튀어나온 늑대 때문에 깜짝 놀란 일라이저는 주춤거리다가 뒤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소년의 갈색 눈동자가 커지더니 이내 빠른 속도로 검을 빼 들었다. 넘어졌는데도 다시 일어서 몸을 추스르는 시간이 상당히 짧았다. 제대로 배우지 못한 것치고는 훌륭한 기사의 자세였다.
“신기하네. 네 아버지한테 배웠나, 어릴 때?”
“다가오면― 베겠습니다!”
다소 부자연스러운 억양과 함께 일라이저는 앤디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앤디는 인간의 태도에 기가 차서 헛웃음을 터뜨렸다가 이내 바닥에 발톱으로 무언가를 써 내려갔다. 그림처럼 보일 정도로 엉성한 글자가 새겨졌다.
「오헬에게 데려다주마.」
오헬이란 글자에 일라이저가 검을 쥔 손에 잠깐 힘을 풀었다. ……그래, 맞아. 황자님께선 늑대들과 동맹이셨지. 바닥에 글자를 쓸 수 있는 걸 보면 상대는 아마 우논일 것이다. 일라이저는 빼 들었던 검을 도로 집어넣고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부탁드립니다.”
“참…….”
“저는 오헬을, 만나야 합니다. 도와주세요.”
그렇게나 자신들을 적대하더니. 앤디는 저를 향해 허리까지 숙인 일라이저를 묘한 얼굴로 쳐다봤다. 저렇게 나오니까 조금 전까지 그를 싫어하던 제 모습이 좀스럽게 느껴졌다. 짧은 한숨을 쉰 앤디는 혀를 차고는, 다시 바닥에 글자를 새겨 넣었다.
「등에 타라.」
선뜻 몸을 내려 준 앤디의 등 위로 일라이저가 올라탔다. 앤디는 일순 묘한 기분이 들었다. 예전에 노아의 등 위에 루시우스가 종종 올라탔던 모습이 떠올라서.
아냐. 생각하지 말자. 앤디는 스스로를 향해 혀를 차며 날랜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일라이저는 몹시 지쳐 보였는데도 제 등 위에서 잘 견디고 있었다. 빠른 속도임에도 단단하게 자신을 붙잡고 떨어지지 않았다. 피식 웃은 앤디는 서둘러 산의 정상을 향해 뛰었다.
만 하루가 지나고 나서야 높은 산 하나를 넘었다. 그리고 이제 한 발짝만 더 내디디면 독수리의 권역에 진입하게 된다. 물론 독수리도 상당수의 병력이 뱀의 영지로 떠나 있다. 아마 르네도 그곳에 있겠지. 그렇다면 참 다행이긴 한데…….
에이, 어떻게든 되겠지. 항상 헐렁거리듯 일 처리를 하던 자신이었는데 언젠가부터 행동 하나하나에 오만 생각이 들이닥쳤다. 주드를 잃고 나서부터인지, 오헬을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나서부터인지. 헛웃음을 터뜨리며 마지막 산을 오르려 발을 떼려던 차였다.
쐐애액―! 공기를 가르는 화살 소리가 들려왔다. 본능적으로 옆으로 뛰어 자리를 피한 앤디의 앞에 화살이 박혔다.
“사전에 허가 없이 출입하는 건 아무리 늑대라 할지라도 안 됩니다.”
활을 들고 궁수 몇을 대동하고 나타난 자는 엔리케였다. 후작과 안면이 있던 앤디는 일라이저를 내려 주고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와 인사했다.
“후작. 영지를 통과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노아 님의 명령을 따르던 중이었습니다.”
“곁에 있는 자는 누군지요.”
“오헬의 동료입니다. 마찬가지로 임무 수행 중입니다.”
엔리케는 미간을 좁히며 앤디의 곁에 선 남자를 응시했다. 오헬의 동료라면 그는 주저함 없이 길을 내어주어야 했다. 왕의 명령이 있었으므로.
그러나 엔리케는 마음이 썩 내키지 않았다. 생전 처음 본 인간 남자에게서 이상한 기시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후작. 길을 비켜 주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