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174화 (174/488)

174화

약속대로 로빈은 아이들을 모두 순차적으로 돌려보냈다. 그러나 오랜 시간을 갇혀 실험 용도로 쓰인 아이들은 기력을 회복하지 못했고 돌아가는 길목에, 그리고 마을에 도착해서 하나둘 죽어 갔다. 적어도 오드를 한 번은 만나게 해 달라고 했어야 됐는데. 어쩔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 후회가 달렸다.

제 탓이 아닌 걸 아는데도, 로빈의 말에 오롯이 제 탓이 되어 버린다.

“오헬.”

“…….”

“나를 봐.”

어느새 가까워진 남자가 이엘의 턱을 잡아 저를 바라보도록 돌려세웠다. 이엘은 그 끔찍한 손길이 거북스러워 그의 손을 내쳤지만 손마저 잡히고 말았다.

“할 수 있다고 한 건 너잖아. 아닌가?”

“…….”

“내가 다시 저 죽어 가는 인간들을 데려와서 실험을 재개해야겠나? 속을 가르고 그것들을 집어넣어서 강제로 꿰매는 꼴을 보고 싶어? 너희랑 다르게 무식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내 손에, 인간들은 족족 죽어 나갈 텐데?”

“…….”

“이전에 잡아 왔던 인간 놈은 인공수정까지 진행시켰다. 그 머저리 같은 놈도 가능한데, 황자인 네가 못 할 리가 있나? 지금 내가 널 얼마나 봐주고 있는지 아직도 몰라서 이래?”

로빈은 이를 갈며 억세게 그녀를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일순 호흡이 뒤엉키며 남자의 입술이 그녀의 귓가에 붙었다가 떨어졌다. 로빈은 분노를 짓누르며 씹어뱉듯 말을 이었다.

“이런 식이면 곤란해. 난 단지 네가 마음에 들어서 봐주고 있는 거다, 오헬. 사실 네가 아니어도 데려올 만한 인간은 많아. 그게 아니면 무작정 데려와 배를 갈라도 되고. 어차피 인간은 넘쳐 나니까 죽든 말든 될 때까지 해 보지, 뭐.”

이런 걸 원해? 그가 나지막하게 속삭이며 떨어졌다. 풀린 손목을 감싸 쥐며 이엘이 피로해진 눈가를 꾹꾹 눌렀다.

“알겠어요. 솔직히 말할게요. 인공수정을 해서, 인공자궁에 착상을 시킨 뒤가 문제입니다. 그걸 남성에게 이식이 가능한지에 관한 부분은 자료가 너무 미흡해요. 소실된 자료를 대신할 도구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당신 말대로 무작정 돌입하기엔, 남은 난자의 수가 적습니다. 그 난자가 언제까지 움직일 수 있을지도 미지수고요.”

겨우 양손에 꼽힐 정도의 개수만으로 실험을 하기엔 위험 부담이 크다. 그건 로빈도 인정하고 있는 바였다. 그는 한숨을 쉬며 제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나마 정자를 선별해 성별을 선택할 수 있게 된 건 다행이었다고 해야 하나. 남자는 조급함을 억누르며 그녀를 응시했다.

“자궁을 이식하지 않고 그 상태로, 인공적으로 배아를 키우는 건?”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제국의 연구실에서 가능했다면 내 연구실에서도 가능하다.”

이엘이 눈을 홉뜨고 그를 쳐다봤다. 물론 제국에선 가능했던 일이다. 생명을 만드는 일 외에는 거의 모든 연구가 성공했으니까. 신체와 비슷한 인공자궁에서 배아를 키워, 어느 정도 성장시키는 건 이미 성공한 연구이다. 다만.

“……기계가 있어야 합니다. 연구실에서 쓰던 기계가.”

“있어.”

“…….”

“우린 연구소에 있던 기계를 전부 가져왔으니까.”

“…….”

“부족한 건 연구 자료와 지식뿐이지, 시스템은 갖춰져 있어.”

그러니까 할 수 있다고 말해. 로빈은 그녀의 양어깨를 꽉 쥐며 윽박지르듯 타일렀다. 네 동족, 인간을 희생하지 않으려면 그 방법밖에 없어. 고까워도 네 종족이지 않나? 뱀이 교활하게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로빈은 습관처럼 이엘의 목덜미에 코를 박고 제멋대로 굴다가 조금 떨어졌다.

“오헬.”

“알겠어요. 그렇게 할게요. 그것밖에 없잖아요. ……할 테니까, 좀 놔줘요.”

“…….”

“오늘은 좀 피곤해요. 그만 쉬고 싶으니까……,”

“나를 봐라.”

원하는 목적을 이룰 때까지 그는 방을 나가지 않겠지. 이엘은 미간을 찌푸리며 노려보듯 그를 쳐다봤다. 로빈은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더니 거친 손바닥으로 그녀의 마른 뺨을 쓸었다. 노골적으로 훑던 손이 뺨을 지나쳐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남자의 손이 닿는 곳마다 소름이 끼쳐 몸을 비틀었지만, 그는 평소완 다르게 쉽게 놔주지 않았다.

기어이 로빈의 긴 손가락이 목을 지나 옷깃 안의 쇄골에 닿았다. 이엘은 몸서리치듯 엄청난 힘으로 그의 손을 홱 내쳤다. 정말 뱀이 지나간 것처럼 기분 나쁜 손길에 미간이 절로 좁혀졌다.

“내 몸에 손대지 말라는 말, 잊었어?”

“왜. 너도 내가 끔찍한가?”

“몇 번을 말해야……,”

“넌 내 소유야. 내가 널 주웠고, 내가 널 가졌어.”

“착각하지 마. 난 당신과 정당한 거래로 이 자리에 있는 거지, 당신의 소유물로 있는 게 아니야.”

“너야말로 착각하는 게 있다, 오헬.”

밀어 낸 만큼 또 가까워졌다. 이엘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거절했지만, 코앞까지 가까워진 로빈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귀 뒤에 입술을 붙여 나긋나긋 속살거렸다.

“난 그동안 동성 간의 결합을 싫어해서 거부한 게 아냐.”

“…….”

“끌리는 게 없어서 그랬던 거지.”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르네는 제게 알갱이를 보낸 걸까. 이엘은 입 안에 넣어 놓은 알갱이를 혀로 살짝 굴렸다. 물론 여기서 깨트릴 마음은 없었지만, 그의 의도대로 적어도 자신을 보호할 만한 수단이 있다는 것에 안도를 느꼈다.

“인간은 먹기도 싫고, 손대기도 싫지만 넌 좀 달라.”

“…….”

“언젠가부터 네게서 아주 이상한 냄새가 나. 끔찍할 정도로 지독하고 맛있는 냄새가.”

로빈은 혀로 입술을 날름 핥았다. 이엘은 긴장의 끈을 놓지 않으며 로빈과의 거리를 유지했다. 그는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었다가 떼며 희미한 미소를 짓고는 완전히 떨어졌다.

“내가 원하는데 네가 거절할 권리나 있나?”

“…….”

“어디까지나 내가 봐주고 있단 사실을 기억해라.”

자신이 우위를 점했음을 그녀에게 부러 알려 주려 취한 행동들이었다. 그러나 이엘은 무례하고 위압적인 행동에 분노하지 않았고, 휘말리지도 않았다. 언제나처럼 차분하게 로빈을 쳐다볼 뿐이었다. 로빈은 그녀의 시선을 받으며 피식 웃고는 바람처럼 방을 빠져나갔다.

남자가 나가고 나서야 진이 빠진 이엘은 카펫 위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로빈은 눈치가 빠르고 교활해서 적당한 긴장감을 유지하지 않으면 밑도 끝도 없이 의심을 할 테니 언제나 대화를 하는 게 고역이었다.

톡톡― 한참 가쁜 숨을 몰아쉬며 호흡을 정리하는데, 유리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곤 좁게 열린 창문 틈으로 몸을 잔뜩 구긴 재규어가 폴짝폴짝 뛰어내렸다. 그녀의 앞까지 내달린 재규어는 순식간에 인간의 몸으로 돌아와 이엘의 뺨 위에 차가운 제 손바닥을 얹었다. 더러운 열기가 그의 손에서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빌어먹을 뱀 새끼.”

“이카르. 누가 보면 어떻게 하려고요. 어서 돌아……,”

“놈이 눈치챈 것 같아.”

“…….”

“그냥 겁박한 게 아냐. 네게서 뭔가를 맡은 거야.”

언제나 고요하고 짙던 이카르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감각이 인간의 배로 뛰어난 이종족이기 때문에 알 수 있다. 느껴지는 기운만 봐도, 일렁이는 감정의 폭만 봐도. 느낄 수 있다.

“네 말이 아니었다면 당장 달려들어 모가지를 뜯어 먹었을 텐데.”

그의 살벌한 말에 이엘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웃을 상황이 아닌데도 웃음이 터진 그녀를 쳐다보며 이카르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불안해했지만, 이엘은 되레 속이 시원했다. 이제, 곧이다. 곧 끝이 날 테니까.

“얼굴이 많이 상했어.”

이카르는 정말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그녀의 뺨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괜찮다는 이엘의 말에도 그는 신경이 쓰였다. 그녀에게 해 줄 수 있는 게 없어서 마음이 쓰리다. 언제나 말뿐인 위로밖에 없어서, 스스로가 답답했다.

“……항상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라.”

“걱정 안 해요. 걱정은 이카르가 더 하는 것 같은데요.”

이엘의 농담에 이카르는 미간을 찌푸렸다.

“당연한 얘기 하지 마. 지금 내게 제일 중요한 건 네 안전 확보라고.”

“알겠어요.”

“말 나온 김에, 반지 내놔.”

“지금이요?”

“그래. 내가 갖고 있는 편이 낫겠어.”

이엘은 줄곧 목에 걸고 다녔던 어머니의 유품을 뺐다. 처음 이카르에게서 받았을 땐 아무것도 없는 금반지에 불과했는데, 지금은 검은색 돌이 마치 보석이라도 된 양 그 안에 박혀 있다. 그녀가 주저하는 새에 이카르가 낚아채듯 홱 가져가, 제 목에 덜렁 걸었다.

“이제 좀 안심이네.”

“조심하세요. 함부로 건드리지 말구요.”

“내가 줄곧 하고 싶었던 말이야.”

이카르가 미간을 찡그리며 목걸이를 옷 안으로 잘 숨겼다. 이엘은 그의 목을 걱정스럽게 쳐다보다가 한숨 쉬며 운을 뗐다.

“그보다 지도는요?”

“거의 다 완성됐어. 위치는 대충 다 잡았는데, 지하실은 들어갈 수가 없어서 내부를 못 그렸다.”

“이틀 뒤에 연구 때문에 지하로 내려갈 거예요. 그럼 그때 다시 만나기로 해요.”

“나타니엘.”

“네?”

“무리하지 마. 부탁이니까, 네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해라. 설령 네가 작전에 실패해서 늑대가 널 쫓아온다고 해도, 나는 널 세상 끝까지 숨겨 줄 자신이 있으니까.”

믿음직스러운 말에 이엘은 대답 대신 웃음을 지었다. 그 모습에 이카르는 불만인 건지 다시 미간을 구겼지만, 이내 그는 그녀의 이마 위에 제 이마를 마주 대며 짧게 웃었다.

“그래도 내 근처에서 네가 숨을 쉬고 있으니 좋다. 언제든 네게 갈 수 있는 거리에, 내가 있어서 좋아. 이제야 비로소 내가 쓸모 있는 존재가 된 것 같아.”

“쓸모없는 존재는 없어요. 저도 이카르에게 그런 사람이 될게요.”

이카르는 이엘의 이마 위에 입술을 깊게 붙이고 웃었다. 이렇게 웃음이 헤픈 남자인 줄 몰랐는데……. 그는 여전히 제 이마 위에 입술을 붙인 채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이미 넌 내 삶의 주인이다. 네가 없으면 난 이제 살지 못해.”

언제나처럼 겉은 로맨틱한 말이었으나, 속은 여전히 두 사람의 생명과 직결된 처절한 고백에 불과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