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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173화 (173/488)

173화

로빈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거야말로 필요 없지.”

“…….”

“네가 전에 말한 대로 인간들이나 좋아하겠군. 우린 성적으로 암컷이 필요한 게 아냐.”

이엘의 얼굴에 절망이 물들었다가 사라졌다. 우습다. 번식이 아니라면 필요도 없는 존재라니. 인간들이야 원래 차별이 심했으니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종족에게마저 그렇게 취급을 당하니 허탈하고 기운이 빠졌다.

내 존재의 의의가, 내가 아닌 타자에게서 정해진다는 사실에……. 그저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 정도면 네 쓸데없는 질문에 대한 답이 되겠나?”

“네. 역시 이해관계가 통하질 않네요. 이해하길 바라면서 한 얘기도 아니었지만.”

“네게 이해를 바란 적 없다. 내가 널 이해하지 못하듯, 넌 평생 우릴 이해하지 못해.”

“좋아요. 저는 어쩔 수 없이 당신의 연구에 참여할 거고, 완성시키겠지만 도무지 모르겠네요. 그렇게 해서 태어난 암컷은 과연 생명체라고 할 수 있을지요.”

“쓸데없는 철학적인 이야기는 나와 하등 상관없어.”

“철학이 아니에요. 그냥, 가여워서 그래요.”

다른 누구의 이야기도 아닌 내 이야기가 될 테니까. 이엘은 차올랐던 감정을 억누르며 호흡을 골랐다. 불필요한 감정을 표출하긴 싫었는데 참을 수가 없었다. 너무 화가 나서. 인간이고 이종족이고, 왜 그렇게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건지. 너무 억울해서.

그래. 아마 평생 모르겠지. 평생 이해하지 못할 테지. 당신 말처럼 영영, 내 마음을 이해할 수 없으리라. 내가 당신들을 이해하지 못하듯.

“인간들이 왜 벌을 받았는지, 당신이 더 잘 알고 있잖아요. 똑같은 짓을 저질러서 신의 노여움을 사지 마세요. 시작하면 돌이킬 수 없게 돼요. 이게 마지막……,”

“오헬. 우리가 신을 저버렸다는 걸 알면서 내게 신을 운운하는 건가? 이게 아니어도 우린 죽어. 신은 우릴 선택한 적이 없으니까. 네 말대로 너는 어쩔 수 없이 나와 함께 이 길을 걸어야 한다. 그러니 다른 건 집어치우고 네가 원하는 거나 말해. 인간답게, 네 잇속만 챙기고 다른 건 신경 쓰지 마.”

“…….”

“태어날 암컷이 너와 무슨 상관이지? 그 암컷을 우리가 데리고 있든, 인간에게 던져 주든 네가 뭔 상관이냐고. 불임인 암컷이 뭐. 너와 관계없잖아? 넌 그냥 내가 주는 영지를 갖고 공국이나 만들면 그만이다.”

이엘은 깊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그를 직시하며 입을 열었다.

“좋아요. 뭐든 들어주신다고 했죠.”

“그래. 설령 왕의 자리라 할지라도. 공국 정도라면 내어줄 수 있지.”

“아이들은 돌려보내 주세요. 저 아이들로 실험하지 않아도 할 수 있습니다.”

“저건 실험용이 아니라 네 협박용이다.”

“인간을 괴롭히지 말라거든 그리하겠다고 하신 분은 로빈 님이세요.”

“너는 원하는 게 겨우 그딴 거밖에 없나?”

“뭘 더 원하겠습니까. 제가 원하는 건 당신이 이 실험을 그만두는 건데요. 그걸 들어주실 리도 없으니, 아이들만이라도 돌려보내 주세요.”

어차피 그는 자신이 연구를 완성할 거라고 완전히 기대하지 않으며, 자신은 그가 제 소원을 들어줄 리 없다고 생각한다.

피차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한다. 그러니 당장 눈앞에 보이는 문제를 해결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다. 게다가 인질이 많을수록 탈출은 어려워질 테니까.

로빈은 지친 얼굴의 이엘을 쳐다보다가 그러겠다며 짧게 답하고 방을 나가 버렸다. 홀로 남은 이엘은 침대에 풀썩 드러누워 눈을 감았다. 보이지 않는 벽과 대화하는 기분이라 진이 다 빠졌다.

*

뻑뻑한 눈가를 누르며 보던 책을 덮었다. 책의 두께 때문에 단단한 목재 책상이 크게 흔들렸다. 이엘은 쓰러지듯 책 위로 엎어지며 중얼거렸다.

“앞으로 며칠이나 버틸 수 있을까…….”

뱀의 성으로 온 지도 벌써 몇 주가 흘렀다. 오드로부터 아침마다 성력을 받는 것도 한계였다. 유지되는 시간은 점점 짧아졌고, 그나마도 이젠 어렵다는 말까지 들었다.

애초에 오드의 성력은 판단력을 흐리게 해 주는 정도에 불과했기 때문에, 장시간 마주치면 들킬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엘은 필사적으로 방에 틀어박혀 뱀들과 마주치지 않으려 노력해야 했다. 후각이 그토록 예민한 종족을 앞에 두고 이 정도 버틴 게 용했다.

이엘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책 표지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그것도 그거지만 가장 큰 문제는 이쪽이다. 이엘이 무리를 하면서까지 뱀의 성으로 와야 했던 이유는 전부 연구실 때문이었다.

앤디가 기사단을 끌고 연구소를 반파시켰는데도 큰 타격이 없었던 이유가 있었다. 이엘이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예상했던 것처럼 뱀의 성엔 비밀 통로가 꽤 많았고, 지하실 역시 그중 하나였다. 그리고 연구소의 중요한 자료는 이미 왕성의 지하실로 옮겨져 있었다.

“지하실이 총 두 층이고, 입구엔 암호가 걸려 있었지. 역시 보지 않고는 어려울 것 같은데…….”

이엘은 지난주부터 지하실에 마련된 연구소를 드나들며 진척 정도를 살피고 있었다. 세잔티노 습격 사건 때 턱수염 일당들에게 들은 것만으로는 연구가 어느 정도로 진행됐는지 가늠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이곳으로 들어왔던 것이다.

연구실에 있던 자료 중 일부에 불과할 텐데도 그 양이 상당했다. 연구원들은 수 세기 동안 자신들이 쌓아 올린 업적을 자랑하듯, 수만 권의 책에 연구 내용을 빼곡하게 기록해 놓았다. 어느 정도 학식이 있는 인간이라면 처음 봐도 내용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자세하고 완성도가 높았다. 물론 전쟁의 화마에 휘말려 대부분은 전소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엘이 예상했던 것보다 연구 진척 속도가 상당히 빨랐다. 이대로라면 연구가 성공하는 건 정말 시간문제일지도.

“엘. 잠깐 들어가도 되니?”

“응. 들어와.”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오드가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뒤엔 목석처럼 굳은 리플도 함께였다. 이엘과 리플은 왕성에 거하며 몇 번이나 마주쳤지만 서로를 없는 존재처럼 무시하며 금세 자리를 피했다. 지금도 오드가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리플은 문을 활짝 열어 둔 채 복도로 나가 대기했다.

오드는 핼쑥해진 낯으로 리플을 힐끔 쳐다보더니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다.

“괜찮아, 오드? 아침보다 안색이 더 안 좋아 보여.”

“응, 괜찮아. 아직까진 견딜 만해.”

오드는 신의 가호를 받는 종족이다. 늑대나 다른 이종족들처럼 영지 내에 성전을 세우고 신을 경배하는 자들이 있는 곳에선 그의 능력도 배가 되겠지만, 이곳처럼 신을 저버린 곳에서는 오드 역시 빛을 잃어 간다.

그래서 이엘이 인간들의 마을에서 가장 먼저 했던 게 성전을 짓는 일이었는데……. 이곳은 성전이 없는 곳이다. 뱀은 신을 떠난 종족이고, 지금도 신의 뜻에 위배되는 짓을 서슴지 않고 있다. 이곳에 온 뒤로 오드는 하루하루 말라 가듯 생기를 잃어 가고 있었다.

이엘은 그의 손을 감싸 쥐며 안쓰럽게 쳐다보았다. 오드는 웃으며 고개를 흔들더니 뱀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눈짓을 보내 그녀와의 간격을 좁혔다. 이엘은 그를 걱정하는 척, 가까워진 오드의 귀에 조용히 속삭였다.

“생각보다 경비도 삼엄하고 손을 대기가 쉽지 않아. 시간이 더 필요할 거 같아.”

“엘. 내가 네게 걸어 준 성력으로는 얼마 못 버틸 거야. 이렇게 네 모습을 숨기는 것도 곧 한계야.”

“알아. 경우에 따라서는 들키는 것도…… 염두에 두고 있어.”

전쟁 속에서 뱀들은 인간의 것을 일부 남겨 두었다. 그중 우연찮게 보존해 두었던 게 인공자궁이 있던 실험실이었다. 마찬가지로 같은 층, 다른 연구실에서 난자를 빼돌렸다. 그땐 그게 인간의 난자라는 걸 모르고 빼돌렸지만, 지금에 와 생각하면 그 건물 자체가 이런 용도로 지어진 모양이었다.

사실 뱀들이 원하는 실험은 이미 제국에서 성공했던 실험이었다. 인공수정을 통해 배아를 자궁에 이식하는 건 당시 제국에선 어렵지 않은 일이었고 어느 부분에 있어선 대중적이기까지 했다. 거기다 인공자궁까지 보존돼 있다면, 이젠 뱀의 기대가 마냥 공상은 아니란 뜻이 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혹은 다행스럽게도 뱀들은 그럴 능력이 없었다. 다 꾸려져 있는데도 해낼 수 없다. 게다가 인공수정 후 착상에 성공한다고 쳐도 그 이후가 문제였다. 착상시킨 인공자궁을 누군가에게 이식해야만 하는데, 보존돼 있는 인공자궁의 수가 손에 꼽힐 정도로 적었다. 난자의 숫자 역시.

그러니 함부로 실험할 수 없어, 거기서 몇 년이나 지체되고 있었던 것이다.

“엘. 그건 안 돼.”

“어차피 들킬 거라면 이용할 수 있는 데까지 이용하고 싶어.”

“…….”

“그러려고 온 거기도 하고.”

자신이 여자라는 사실이 밝혀져야 한다면, 그건 뱀들에 의해서 혹은 뱀의 영지 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뱀이 소식을 접하고 쳐들어오는 게 아닌, 이엘 스스로 무너뜨릴 수 있는 뱀의 영지 내에서. 오드는 이엘의 안색을 살피며 손을 잡아 주었다.

“알겠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이야기해, 엘.”

“응, 고마워.”

오드는 이곳에 온 뒤로 저를 의지하지 않는 이엘을 서운한 낯으로 보고 있었다. 자신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의지할 수 없는 다른 사정이 있어서겠지만.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오드는 그녀를 믿고 기다려 주는 걸 선택했다. 비록 그녀가 제게서 멀어지는 걸 선택했더라도.

면회와 다를 게 없는 짧은 만남이 끝났다. 오드와 만날 땐 언제나 뱀들의 감시하에서 이루어졌다. 그나마도 이엘이 로빈에게 다른 뱀과의 접점을 줄이고 싶다고 요구한 덕에 이 정도였다. 처음에 그녀에게 붙은 뱀의 숫자는 지금의 배였으니까. 물론 이것도 얼마나 갈지 모르겠다.

이엘은 지끈지끈 아픈 머리를 지압하며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얼마나 많이 읽었는지 그 두꺼운 책이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전부 너덜너덜했다. 그런데도 난해해서 몇 번이고 다시 읽는 중이었다. 아무리 똑똑한 이엘이라 할지라도 이쪽 분야는 전문성이 필요한 분야다. 이렇게 짧은 시간 만에 이룰 수 있을 리가.

“못 하는 건지, 안 하는 건지.”

등 뒤에서 들린 서늘한 목소리에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허락도 없이, 아니. 허락을 하는 게 이상하지만. 어쨌든 노크도 없이 들어온 성의 주인은 비로드 소파 위에 자리를 잡고 그녀를 빤히 주시하고 있었다.

“노력 중이에요.”

“어제, 아이 하나가 또 죽은 건 알지?”

“…….”

“더뎌질수록 잃는 게 많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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