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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172화 (172/488)

172화

*

그날 밤은 오랜만에 악몽을 꿨다. 언제나 그렇듯, 꿈속의 주인공은 자신과 선황이었다. 그러나 매일 꾸던 꿈과 달라진 점이 있었다면, 자신이 선황에게 끝도 없이 쫓기고 있었다는 것이다.

언제나 선황은 제 옷깃을 틀어쥐고 옷장에 처박곤 했는데, 이번에 꾼 악몽에선 자신을 쫓고 있었다. 아비의 손은 괴물처럼 커다랗게 변한 채였다.

그리고 이엘은 스스로 열린 옷장 안으로 들어가 제 몸을 숨겼다. 그 끔찍한 옷장 안으로 스스로 달려들었다.

“허억……!”

잠에서 깬 이엘은 습관적으로 제 목에 손을 대며 살아 있음을 확인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식은땀을 닦아 냈다. 단순한 꿈이라고 치부하기엔 낯설지 않은 감각이었다. 마치 그랬던 적이 있던 것처럼.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다시 침대에 몸을 뉘었다. 그러곤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해가 뜨기도 전에 부산스럽게 움직이던 뱀들은 아이들을 깨워 떠날 준비를 시작했다. 이엘은 새벽부터 반쯤 나간 정신을 붙잡고 누워 있던 몸을 무겁게 일으켰다. 몸이 고되니 정신까지 피폐해진 것 같아 마음을 다잡으려 노력 중이었다.

“깼으면 출발 준비 해라.”

그녀가 악몽을 꾸고 깼을 때부터 자리를 비웠던 로빈이 천막을 들추고 들어왔다. 이엘은 그의 뒤로 함께 들어선 리플과 눈이 마주쳤다. 서로를 쳐다보는 시선에 살기가 담겼다. 리플은 그녀 덕에 한쪽 팔의 기능을 잃었다. 그리고 이엘은 그로 인해 소중한 친구를 잃었다.

“앞으로 함께 일하려면 그런 시선은 거두는 게 서로에게 좋을 텐데.”

로빈의 조소 섞인 말에 리플은 묵례하며 종속적 태도를 보였다. 이엘 역시 그를 노려보던 시선을 지우며 낮게 웃었다.

“그러네. 당신 말대로 동업하려면 앞으로 협조 잘해야겠네.”

“내게 하대하는 것까진 신경 쓰지 않으나 폐하껜 공대하도록 해라.”

“못할 것도 없지.”

난 너희랑 다르게 예의 바른 인간이니까. 그 말을 덧붙이며 이엘은 우아한 귀족식 인사로 로빈을 향해 절했다. 리플은 차오르는 분노를 삼키며 로빈에게 절하고 빠르게 막사를 빠져나갔다. 그가 나가자마자 로빈은 웃음을 터뜨렸다.

“리플이 저렇게나 감정을 내비치는 건 네가 처음이야.”

“좋아해야 됩니까?”

“황자. 내가 분명 네게 약속하지 않았던가? 내 일만 잘 처리하면 네게 갖가지 보화와 지위를 주겠노라고.”

“그럼 대답해 드리지요. 황궁의 갖가지 보화를 누리며 자란 제가, 뱀의 왕이 주시는 선물에 성이 차겠습니까?”

“그럼 뭘 원하나?”

“원하는 게 있다고 해도 당신은 절대 줄 수 없을 겁니다.”

“네 마음은 절대 살 수 없다는 소린가?”

“애초에 마음을 살 수 있단 생각을 한다는 게 저는 놀랍군요.”

그녀의 말을 끝으로 침묵이 감돌았다. 결국 로빈이 웃으며 대화는 일단락됐다. 계속해서 제 성질을 자극하려는 인간의 태도에 질리면서도, 그게 또 못내 저릿했다. 저걸 어떻게든 억눌러 제 아래로 귀속시키고 싶은 정복욕까지 들었으니까.

“준비하고 나와.”

그는 겉옷을 팔에 걸치곤 서늘하게 웃으며 천막을 나갔다. 진이 다 빠진 이엘은 밭은 숨을 몰아쉬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로빈과는 이 정도 선을 유지하는 편이 좋다. 너무 굴복적으로 굴어도, 또 너무 반발해도 안 된다. 적당한 긴장감을 유지하는 편이……,

“나타니엘!”

“아……!”

갑작스레 나타난 남자 때문에 깜짝 놀란 이엘이 소리를 지르려다가 본능적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너무 깊게 생각에 빠져 있던 탓에 인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그게 아니었어도 남자는 충분히 기척을 숨길 만한 자이기도 했지만.

“놀랐어?”

“어, 언제부터 따라왔어요?”

“말했잖아. 내 사정거리엔 언제나 네가 있어야 한다고.”

햇빛보다 빛나는 백금발을 하고 다정하게 웃는 남자의 모습에 이엘은 기가 차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만나게 될 것을 알고 있었고, 또 그렇게 남자에게 전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적진의 한가운데서 그가 모습을 드러내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역시 좀체 알 수가 없는 남자다.

“일단 본체로 돌아가세요. 은신한 뱀들이 많으니 눈에 띌 수도 있어요.”

“날 데려가.”

“…….”

“약속했잖아. 위험한 일은 내가 대신 하기로.”

이카르는 작은 재규어의 모습으로 돌아와 앉아 있는 그녀의 무릎 위로 폴짝 뛰어올랐다. 이엘은 정말 새끼라도 된 것 같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손바닥을 내밀었다. 그는 그녀의 손바닥 위에 습관처럼 제 머리를 갖다 대며 그녀를 설득했다.

“어서.”

“이카르. 미안해요.”

“뭐가?”

“그냥요. 이런 일…… 이카르가 하길 원했던 건 아니에요.”

그의 도움이 필요했지만 그를 속여서까지 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대의를 위해 일부는 희생해야 한다고 내내 배워 왔지만, 그건 이론일 뿐이고. 이카르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확고하고 다정해서…… 정말로 제 가족이 되어 줄 것처럼 굴어서. 양심에 찔려 가슴 한구석이 따끔거렸다.

“내가 하고 싶어서 한 일이다.”

“…….”

“내 선택이고 내 마음이야. 너랑은 관계없어.”

“이카르.”

“넌 그냥 약속만 하면 돼.”

“…….”

“죽지 않고 행복하게 살아 줘.”

그래야 내가 누님을 볼 면이 서잖아. 그는 장난처럼 말하며 다시 한 번 그녀의 손에 머리를 치댔다. 이엘은 한참이나 그를 받아 주다가 결국 품 안으로 끌어안았다.

“그래요. 같이 살아요. 같이, 행복해져요.”

지키지 못할 말이면서, 동시에 제 궁극적인 바람이기도 했다.

*

근 이틀을 더 달리는 동안 로빈은 이엘을 방관했다. 그녀는 로빈이 말을 붙이지 않으면 먼저 입을 열지 않았고, 도망치지도 않았다. 이엘과의 대화는 그에게 즐거움을 주었지만 그의 심복들은 알게 모르게 불만을 보였기 때문에 로빈은 그쯤에서 인간과의 대화를 차단했다.

그리고 마침내 어둡고 차가운, 로빈의 권역에 다다랐다.

“형…….”

아이들이 이엘의 뒤에 매달리며 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그녀는 아이들을 다독이며 마른침을 삼켰다. 결국…… 이렇게 내 발로 돌아오게 되었구나.

영지는 그때와 다를 게 없었다. 여전히 따뜻한 햇볕 아래 있었으나 춥고 습하게 느껴졌다.

“왕이시여. 오셨습니까.”

“아이들은?”

“지하실에 모아 놓았습니다.”

“저것들도 지하실에 갖다 놓아라.”

“예.”

“사, 살려 주세요!”

기겁한 아이들이 소리를 질렀지만 뱀은 무자비하게 그들을 끌고 사라졌다. 이번만큼은 이엘도 나서 줄 수 없었다. 주먹을 바르쥐며 고개를 숙였다.

“나자르는 서쪽 탑에 가두고, 황자는 왕성으로 데리고 와.”

“예!”

예상대로 뱀의 영지엔 성전이 없었다. 이걸 두고 그나마 다행이라고 표현해야 할까. 적어도 노아의 영지에서처럼 방해받지 않고 ‘그’를 다시 만날 수 있을 테니. ‘그’가 정말 피할 곳을 마련해 줄지는 미지수였지만.

심호흡을 크게 한 번 하며 이엘은 품속에 숨어 있던 이카르를 뱀들의 눈을 피해 몰래 풀어 주었다. 이카르는 작은 몸을 더 줄여 숨어 있는 뱀들조차 알지 못하게 요리조리 빠져나가 사라졌다.

그녀에게 주어진 공간은 처음 왔을 때 머물렀던 그 방이었다. 그때 침대 시트와 온갖 천을 엮어 저 커다란 창 아래로 뛰어내렸는데. 여전히 방 한가운데엔 이엘이 꽂아 두었던 포크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네 탈출 흔적을 보니 감회가 새롭지 않나?”

“그러네요.”

“네가 탈출한 덕에 테르가 수많이 죽었지. 감시를 엉망으로 한 대가로.”

“여전히 제 탓으로 말하는군요, 당신은.”

늑대의 영지를 침입했던 것도 내 탓. 네 종족을 죽여 버린 것도 내 탓. 그렇게 남 탓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쉽겠어. 이엘이 비웃어도 로빈은 화를 내지 않았다. 그는 모여든 뱀들을 전부 물리고 그녀와 함께 큰 방으로 들어섰다.

여전히 서늘하고 여전히 기분 나쁜 영지. 마치 늪 속에 있는 것처럼 음습하고 찝찝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이엘을 뒤로하고 커다란 창까지 걸어간 로빈은 뒤로 돌아 그녀를 마주했다. 그의 표정이 더없이 진중해졌다.

“좋아, 황자. 나는 이미 네게 두 번이나 뒤통수를 맞았다. 그래서 널 온전히 신뢰하지 못해. 신뢰할 마음도 없거니와.”

“…….”

“하지만 네 말대로 나는 너와 나자르의 도움이 필요하다. 암컷을 만들어야 하거든.”

이제 난자도 얼마 남지 않았다. 사실 남아 있는 난자도 실험에 쓸 수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기에 로빈은 인간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이건 마지막 희망이었다. 이 실험마저 실패한다면 종족 번성은 영영 꿈꿀 수 없게 되리라. 이대로 죽음의 길로 걸어가게 되리라.

냉혹한 얼굴과는 달리 속내는 조급하고 답답했다. 그는, 무엇이든 할 마음이 있었고 무엇이든 하리라고 다짐했다.

“네가 원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말해라. 인간을 괴롭히지 말라 하거든 그리하겠고, 늑대와 척을 지지 말라고 한다면 기꺼이 개와 연합하겠다. 원한다면 너를 왕으로도 만들어 주지. 인간들의 왕, 멋지지 않나? 잃어버린 네 과거를 내가 되찾아 주지. 그래, 네 종족을 이종족의 아래서 해방시켜 줄 수도 있다.”

그녀는 그의 말에 딱히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았다. 로빈은 인간의 심중을 파악하려 애썼지만, 이엘은 가면을 쓴 것처럼 아무것도 보여 주지 않았다. 그녀가 조금이라도 욕심을 갖는다면 이 거래는 쉬워진다. 인간이란 갖고 싶은 걸 쥐여 주면 없는 꼬리도 만들어서 흔드는 종족이니까.

“오헬.”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요.”

“말해.”

“그렇게 암컷을 만들어서 어떻게 하고 싶은 거예요?”

이전에도 늑대의 영지에서 이엘은 비슷한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암컷을 만들면 누가 가장 환영할 것이냐고.

로빈은 기대와 다르게 나온 쓸데없는 질문에 미간을 찌푸리며 짧게 혀를 찼다. 저딴 대화를 하자는 게 아니었다. 그는 피곤한 얼굴을 쓸어내리며 대꾸했다.

“종족 번식은 이종족의 가장 큰 욕구다.”

“그렇게 쓰려고 만드는 거예요?”

“…….”

“오직 당신들의 필요 때문에 존재하는 거예요?”

부정하진 않는다. 인간들의 혼인이 그러하듯, 이종족 역시 결혼이란 자식을 낳는 것에 큰 의의를 두는 결합에 불과하다. 귀족들이 가문과의 화합을 위해 서로 가족이 되듯, 이종족 역시 혈통과 후손을 위해 자식을 갖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왜 이종족의 첫 번째 욕구가 종족 번식이겠는가. 우수한 혈통을 갖기 위해 번식하는 것. 그게 자신들에겐 가장 중요했다.

사랑? 그런 감정은 이종족에게 사치였다. 간혹 사랑으로 짝을 이루기도 했지만, 애초에 이종족은 사랑을 동반한 삶을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일처일부 혹은 일부일처가 아닌, 일처다부와 일부다처로 생과 종족을 이어 가는 것이다.

“그럼 우리가 암컷과 사랑으로 번식하길 바라는 건가?”

“번식으로 둔이 태어나면요. 그 태어난 둔 중에 암컷은, 혹은 여자는 또 어떻게 하실 건가요.”

“…….”

“수컷은 병력으로, 암컷은 번식 용도로? 그렇게 계속이요?”

로빈은 이엘의 말에 침묵했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오히려 황자의 반응이 이해가 가질 않는다. 그렇게만 되면 너희도 좋을 게 아닌가? 암컷이 많아지면 네 말처럼 두 손 들고 환영하는 건 너희들일 텐데?

이기적이란 단어의 표상인 인간이 저와 다른 성별을 두둔하고 나서는 게 되레 이상하다.

“넌 지나치게 이상적인 생각을 하나 보군. 황자. 여긴 네가 살던 그 꿈같은 황궁이 아니다. 살기 위해 무엇이든 할 수밖에 없어. 설령 그게 착취일지라도.”

“만약 불임인 암컷이 태어난다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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