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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171화 (171/488)

171화

*

“괜찮아, 오드?”

“응. 너야말로 괜찮니?”

“나야, 멀쩡해. 오히려 지나칠 정도로 융숭한 대접을 받아서 눈물이 날 지경이야.”

그녀의 비꼬는 어조에 오드가 작게 웃었다. 이엘은 겁에 질린 아이들을 재우고 밖으로 나오던 참이었다. 때마침 막사 밖, 모닥불 앞에서 몸을 녹이고 있던 오드가 이엘을 발견하곤 그녀를 반기며 자리를 비켜 주었다.

마을에서 로빈이 살던 곳으로 곧장 가려면 르네의 권역을 뚫고 가야 했기 때문에, 뱀들은 시간이 지체되더라도 돌아가는 걸 택했다. 다른 종족이라면 몰라도 독수리의 눈으론 은신을 가리기 어려웠으니까.

긴 여정으로 인해 모두가 녹초가 됐다. 울다 지친 아이들은 더는 돌아가고 싶단 소리도, 살려 달란 소리도 하지 않았다. 모두가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자신들의 죽음이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음을.

“엘. 피곤해 보여. 괜찮은 거야, 정말?”

“응. 괜찮아, 정말로.”

“발목 치료해 준다니까. 놔두면 더 상할 거야.”

“괜찮아. 이렇게라도 시간을 벌어야지. 그리고 작은 상천데 네 힘을 소비하고 싶지 않아.”

무자비한 뱀들은 인간에게 아량을 베풀 마음 따위 없었기 때문에 긴 여행길을 쉬지 않고 이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엘이 발목을 접질리자마자 로빈은 뱀들을 멈춰 세웠다. 왕의 명령에 뱀들은 불만을 갖지 않고 복종하며 서둘러 진을 쳤다. 이엘은 로빈의 명령대로 그의 천막에 함께 머물게 됐다.

“어쨌든 다행이야. 아직까진 들키지 않았으니까.”

“그래도 방심하면 안 돼. 언제, 어떻게 들킬지 모르니까.”

후각이 뛰어난 종족이니 오드의 말처럼 방심해선 안 된다. 다행히 뱀들은 통 정신이 없어, 약효가 떨어진 이엘을 두고도 그녀가 여자일 거란 생각을 전혀 하질 못하고 있었다. 앤디의 조언대로 생소한 냄새가 나는 것 같긴 해도 알아차리는 게 쉬운 건 아닐 테니.

간혹 그녀를 보며 미간을 찌푸리고 묘한 표정을 짓는 자들도 있었지만, 그들은 대부분 인간을 싫어했기 때문에 그녀와 같은 공간에 있는 걸 끔찍하게 여겨 금세 자리를 떠나 버렸다.

이엘은 한가운데 위치한 불 꺼진 자신의 막사를 응시했다. 조심할 필요가 있는 건 로빈이었다. 그와 같은 막사를 사용하고 있으니 들키지 않게 각별히 신경 쓰는 게 좋겠지. 다행히 로빈은 지금처럼 전략 회의 등으로 자리를 자주 비울 테니, 되도록 오래 마주하지만 않으면 며칠은 버틸 수 있을 것이다.

“미안해, 오드. 너까지 끌어들일 마음은 없었어. 난 네가 마을에 남아 있는 편이 좋다고 생각했어.”

“나의 엘. 나는 네가 있는 곳이 어디든 함께 갈 거야. 내가 네 유일한 보호자란 사실을 자꾸 잊나 보구나.”

“나 때문에 넌 계속해서 성력을 잃어 가고 있어. 이런 식이면 네 수명도 점점 짧아질 거야.”

“성력이란 건 신께서 내게 주신 축복이고 선물이야. 그건 전적으로 그분께 달려 있어.”

“…….”

“사람들의 신앙이 돌아오면 내게 주어진 성력도 회복될 거야. 그러니 괜찮아.”

“너는 아직도 인간들을 믿는 거야? 신께 돌아갈 수 있다고? 틀렸어. 우린 이미 틀렸어, 오드. 너무 멀리 와 버렸어. 돌아갈 수조차 없게 멀어졌어.”

오드의 도움을 받고 있으면서도 제 목숨 구하기 급급해 오드를 뱀에게 떠넘기자는 생각이나 하는 그들에게 대체 뭘 기대하겠는가. 아마 신께서도 진작 포기하셨으리라. 1차 전쟁이 터진 뒤로 신께선 우리를 쳐다보기도 싫어, 완전히 눈을 감으셨으리라.

“그렇지 않아. 돌아가면 돼. 멀어졌어도 다시 돌아가면 되는 거야.”

“…….”

“군주가 백성을 믿지 않으면 누가 믿어 주겠어? 엘.”

“……용서할 수가 없었어.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을 사지로 내몰아 제 목숨을 챙기는 모습을 보면서 역겨웠어. 그게 뱀들과 뭐가 달라? 대체 뭐가…… 뭐가 동족이야.”

하지만 그만큼 절박했겠지. 그만큼 살고 싶었겠지. 누구도 타인을 비난할 자격은 없다. 모두가 똑같으니까. 죄의 형태만 다를 뿐이지, 모두 신 앞에선 죄인이다. 완전무결한 사람 따위 존재하지 않는다. 나 역시 깨끗하지 않은걸.

내 마음 역시 이기적인걸.

그래서 품고 가야 한다. 이해하기 싫어도, 이해해야만 한다. 내가 걸어야 할 황도는 그런 길이다. 모두를 품어야 하는 길. 이해해야만 하는 길. 그게 어려서부터 익히 배우고 자란 황족의 길이었다.

그리고 이전의 황족들은 버려 버린 길이기도 했다. 그녀는 선황들의 전철을 밟고 싶지 않았다.

“들어가서 좀 쉬어.”

“알겠어. 너도 쉬어.”

그렇게 오드와 짧은 작별의 인사를 나누고 이엘은 긴장한 채 막사로 들어왔다. 나갈 때만 하더라도 텅 비어 있었는데, 막사의 주인이 그녀보다 먼저 돌아와 있었다. 로빈은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그녀의 걸음을 딱히 말리지 않았다. 막지 않아도 이엘이 도망칠 리 없다는 걸 알아챈 모양이다.

“그렇게 계속 서 있을 건가?”

“…….”

“이쪽으로 와라. 약을 발라 줄 테니.”

“필요 없어.”

“강제로 끌려와야 직성이 풀려?”

이엘이 짧게 한숨을 쉬더니 내키지 않는 걸음을 옮겼다. 그는 지척에 있는 이엘의 팔을 홱 잡아 맞은편에 앉히고는 접질린 발을 내려봤다. 그런 제 발을 뒤로 빼며 이엘이 짜증스레 말했다.

“발라도 내가 발라. 약 줘.”

“그거 아나, 황자? 네 아비가 쓰던 값비싼 약재 중 내 백성의 살덩이가 있었다는 걸.”

“…….”

“아주 악질적인 소문을 퍼뜨려 암컷을 몰살당하게 했지.”

“…….”

“암컷 뱀을 갈아 먹으면 수명이 길어진다나, 뭐라나.”

어느덧 로빈은 그녀의 발 아래 한쪽 무릎을 꿇어앉은 채였다. 그는 싫다는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이엘의 발을 제 허벅지에 올려 다친 발목에 약을 바르고 있었다. 살기를 담은 말투와는 달리 상처를 만지는 손은 섬세하기 짝이 없어 되레 불쾌했다.

“우린 1차 전쟁이 있기도 전에 암컷의 상당수가 이미 죽어 버렸거든.”

“…….”

“빌어먹을 네 아비와 선조 덕분에.”

로빈의 선조. 얼굴도 모르는 먼 선조들부터 자신에 이르기까지. 뱀들은 언제나 인간의 말에 순종했다. 인간을 향한 반발심은 꿈도 꾸지 못했다. 모든 이종족이 그러했지만, 뱀들은 유독 심했다.

그렇게 인간의 발닦개를 자처하며 아첨으로 후작 위까지 받는 것에 성공했다. 뱀은 어떻게 해서든 인간과 가까워지고, 인간에 가까워지고 싶었다.

하지만 그게 분노마저 삼킨다는 의미는 아니지.

해서는 안 될 짓까지 하는 인간들을 보며 결국 복수의 칼날을 갈았다. 원흉이 된 황실과 연구실만 제거하자는 타 종족의 말을 무시하고, 뱀들은 특유의 속살거림으로 어린 이종족을 꼬드겼다. 그리고 마침내 2차 전쟁이 터지던 날, 그들을 앞세워 인간 여자를 모조리 죽여 버렸다.

통쾌.

그 단어가 모든 감정을 설명했다. 짜릿했다. 살육을 한두 번 한 것도 아닌데, 일평생 그렇게 가슴이 설레는 살육은 처음이었노라. 그래. 이게 좋아서 너희는 우리를 그렇게 도륙했나? 아― 환희가 차오르는구나. 그날 로빈은 피 묻은 얼굴로 환하게 웃었다.

“그런데 네가 살아 있을 줄이야.”

원래 그의 성격대로라면 분노가 치솟아야 맞다. 황족은 성별을 막론하고 모조리 잡아 죽이자는 데에 모든 종족이 동의했다. 그런데 황손이 죽지 않고 여태 살아남았다? 원래 로빈의 성격이었다면 손을 뻗어 인간의 목을 쥐어틀었어야 옳다.

하지만 자신은 지금 무얼 하고 있나.

“이러고 있으니 네 아비에게 굽실거리던 내 아비가 생각나는군.”

“…….”

“네 아비가 걷어차는 발에도 기꺼이 머리를 갖다 대던 내 아비 말이야.”

그때도 아비의 모습이 한심하단 생각을 한 건 아니다. 살아남아야 했고, 빌어먹게도 뱀이 살기 위해선 인간에게 붙는 게 가장 쉬운 길이었으니까. 오히려 종족을 생각한 진정한 왕다운 일이다.

그러나 로빈은 자신에게 그런 상황이 닥친다고 해도 인간의 발에 걷어차일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 무얼 하고 있나.

“황자. 너는 내가 왜 네게 집착하는지 이해를 못 한다고 말했지.”

“알고 싶지도 않아.”

“우린 습성이 인간을 흠모해.”

“…….”

“아름다울수록 더 갖고 싶고, 닮고 싶고, 닿고 싶지.”

그 말을 하며 뱀의 손이 그녀의 뺨에 닿았다. 끔찍한 게 닿은 것처럼 이엘의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로빈은 짧게 웃으며 더 지분거렸다. 아― 매끄러운 뺨. 투명한 피부. 살아 숨 쉬는 핏줄. 무엇 하나 갖고 싶지 않은 구석이 없다.

뱀은 인간을 끔찍하게 여기지만, 그만큼 동경하고 바랐다.

“네 신분이 끔찍한 황족이 아니었다면 나는 널 취했겠지.”

침이라도 뱉고 싶은 말에 이엘은 그를 경멸에 찬 눈으로 노려봤다. 그러나 로빈은 개의치 않았다. 그런 시선을 평생 받아 왔으니까. 그의 손이 노골적으로 그녀의 뺨을 훑고 목덜미를 지나 어깨에 닿았을 때, 이엘은 거세게 손을 내쳤다.

“그렇다면 태어나 처음으로 내가 황자인 것에 감사해야겠네.”

“…….”

“내 몸에 손대지 마. 정말 내가 죽는 꼴이 보고 싶지 않다면.”

마을에서의 한차례 소동 이후로 깨달았다. 로빈은 제 몸에 흠 하나 내지 못할 것이다. 그는 결벽에 가까운 성정을 갖고 있었다. 그건 땅 위로 올라와 로빈의 성에 거할 때부터 느꼈던 감상이다. 제 손이 닿자마자 더러운 오물 묻은 것처럼 깨끗이 닦고 장갑을 끼는 그의 모습이 여전히 눈앞에 뚜렷하다.

그러니 제 소유로 낙인찍은 자신 역시, 함부로 대하지 못하겠지. 단순한 집착이라고 보기엔 조금 복잡한 사정이겠지만, 알 게 뭔가. 이용해 먹을 수 있다면 모조리 다 이용해 먹겠다.

“오드는 내 보호자이고, 내 명령을 따라. 내가 죽어 버리고 당신에게 협조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나와 오드 모두를 잃게 될 거야.”

“…….”

“나는 지금 당신과 정당한 위치에서 거래를 제안하는 거야. 내 심기를 거스르지 마.”

“오만하긴.”

“순순히 당신의 말을 따르겠다고 내가 먼저 약속했어. 나는 약속을 지키고 싶어. 그러니까 당신도 내 말을 지켜 줘. 그거면 돼.”

언제 또 내 등을 처먹을지 모르는데. 로빈은 그녀를 흥미롭게 올려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도 이렇게 가둬 두니 네 눈동자가 올곧게 나를 담는다. 그 사실이 이토록 기쁘다니. 자신이 생각해도 소름 끼치는 발상에 헛웃음이 터졌다.

“좋다, 황자.”

“…….”

“언제까지 유효하리라고 확답은 못 하지만, 노력은 해 보지.”

“부디 그 노력이 오래가길.”

이엘은 그를 비꼬며 절뚝거리는 다리로 귀퉁이에 마련된 침대로 걸어가 홀랑 누워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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