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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170화 (170/488)

170화

이엘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그녀를 빤히 바라보던 로빈의 얼굴에 웃음이 드리워졌다. 아― 비로소 희열이 느껴지는구나. 네가 나를 제대로 보는 데 이렇게나 희열이 느껴져. 역시 내 것이 되어 버린 네 몸에 흠을 내느니, 너를 정신적으로 괴롭히는 편이 내겐 더 이로워.

“알잖아. 인간이 얼마나 환멸이 나는 종족인지. 그러니 너도 보고 싶지 않나, 황자?”

그의 말에 뱀들이 웅성거렸고, 인간들이 눈을 크게 치떴다. 분명 황자라고…….

“네가 이전에 늑대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것은 칭찬하지. 개들은 제 주인에게 충성을 다하거든. 하지만 인간들은 어떨까? 황족인 네게 맹종해야 하는 너의 백성들은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하지 않나?”

조금 전까지 오드와 로를 내놓으라며 폭동을 일으키던 인간들이다. 이엘은 각오했던 일이지만 지나칠 만큼 교활해진 로빈의 반응에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러곤 침착하게 그의 옷 끝을 움켜쥐어 당겼다.

“갈게. 따라가겠다고.”

“…….”

“농담하는 거 아냐. 여기서 쓸데없는 피를 더 보면 정말 죽어 버릴 거야. 그럼 당신은 평생 연구실에 처박혀서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살아가야 할 거야. 그게 좋다면 마음대로 해. 나는 당신이……,”

“왕이시여! 이전에 약조하셨던 것을 부디 지켜 주십시오!”

그녀의 말을 자르고 누군가 툭 끼어들었다. 이엘이 딱딱하게 굳은 턱을 겨우 닫고 결계 안쪽을 응시했다. 몇몇 인간 남자들이 로빈의 발치에 넙죽 엎드려 그의 자비를 구하고 있었다.

“말씀하신 대로 저희가 아이들 셋을 이미 추려 놨습니다!”

“과연 인간답군.”

로빈의 비웃음에 남자들은 황송해했다. 그들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엉엉 울고 있는 아이 셋을 끌어왔다. 그러곤 나가기 싫어 소리를 지르고 발악하는 아이들을 결계 밖으로 밀쳤다. 말이 밀친 거지, 거의 집어 던지다시피 한 행동에 마을 사람들도 말을 잃었다. 아이 셋은 모두 고아였고, 마을에 연고가 전혀 없는 도망친 노예 출신이었다.

“사,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제발!”

절망하며 결계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장정들이 아예 총구를 겨누며 들어올 수 없게 막아서고 있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행위에 이엘은 눈을 감았고 일라이저는 절망했다. 도대체 왜 저렇게…….

그리고 마침내 인내를 잃은 오드가 결계를 전부 거두었다.

“당신들의 추태에 신께서 진노하셨으니, 내가 더 보호할 이유가 없군요.”

“나, 나자르 님!”

소스라치게 놀란 마을 사람들이 오드에게 들러붙었지만, 그는 전과 달리 싸늘한 얼굴로 그들의 다급한 손을 밀쳐 내고 뱀이 있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 나왔다.

“뱀의 왕이시여. 당신께서 저를 찾았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네 힘이 필요하다.”

“저는 신의 뜻을 따르는 자입니다. 당신께서 신의 뜻을 따라 불필요한 살육을 하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신다면 오헬과 함께 당신의 성으로 가겠습니다.”

“오드!”

오드의 벽안이 빛을 잃고 그녀에게 잠깐 머물렀다가 떠났다.

“당신도 저들처럼 신의 분노를 사신다면, 제가 당신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을 겁니다. 부디 현명한 답을 내리시길.”

그의 간언에 로빈은 제 턱을 쓸었다. 그는 이미 신이란 존재를 저버렸다. 신실한 믿음을 지키는 다른 이종족들과는 달리, 로빈은 신께서 저희 종족을 버렸음을 일찌감치 깨닫고 그 역시 신을 버렸다. 신을 향한 믿음은 이제 남아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드가 필요하다. 그의 도움으로 보호석을 변형하고, 없애고, 만들고……. 그러려면 신의 가호를 받아야겠지.

로빈은 한참이나 오드를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리플을 향해 철수 명령을 내렸다. 대군을 끌고 왔던 것치고는 분풀이도 못 한 셈이 돼 버렸지만, 그의 손에 황자가 들어왔다면 만족할 만한 수확이다.

“그만 돌아간다.”

“예, 폐하.”

거대한 뱀 하나가 오드의 몸을 꼬리로 틀어 죄며 파스스― 사라졌다. 그를 신호로 울먹이는 어린아이 셋도 여러 마리의 뱀이 기절시켜 순식간에 사라졌다.

로빈 역시 이엘의 허리를 감싸 안더니 타고 왔던 뱀의 몸 위로 올랐다. 그러곤 더러운 시궁창을 벗어나려는 듯, 흔적도 없이 이엘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숨을 들이켠 채 겁에 질려 있던 사람들은 그제야 숨통이 트인 것처럼 거센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곤 절망에 사로잡혀 소리를 질러 댔다. 소란 속에서 홀로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던 일라이저는 눈앞에서 빼앗겨 버린 주군의 모습이 잔상처럼 남아, 어떤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완전히 넋이 나간 그를 툭 치며 깨운 건 갑작스럽게 나타난 분홍빛 머리카락이었다. 스완은 정신을 못 차리는 일라이저를 향해 미간을 찌푸리고 소리를 질렀다.

“야. 너 그렇게 멍청하게 계속 서 있을래?”

마을 사람들은 죽다 살아난 제 목숨 확인하기에 급급해서 스완이 온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일라이저는 흐리멍덩한 눈동자로 스완을 쳐다보더니 끝내 눈물을 뚝뚝 흘리며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으……으아……아아…….”

차마 당당히 울 형편이 안 되어, 그는 눈물을 삼키려 했지만 참지 못했다. 서럽게 쏟아지는 눈물을 후두둑 떨어뜨리며 고개를 숙였다. 또다. 또 눈앞에서 잃어버렸다. 또 이종족에게 당하고 말았다.

목숨을 바쳐 지켜 드려야 했는데……. 자신은 아비와 달리 너무도 나약해서, 끝내 지켜 드리지 못했다. 스스로 불구덩이로 들어가는 황자님을 말리지 못했다. 11년 전이나, 지금이나 자신은 변함없이 약해 빠져서…….

“야!”

그의 멍청한 생각을 깨운 건 짜증을 잔뜩 담아 소리를 지르는 스완이었다. 물론 스완의 목소리는 일라이저에게 들리지 않았지만, 스완은 능력을 써서 그를 깨웠다. 사위가 순식간에 어두워져 자신만 홀로 남겨져 있는 환상이, 그의 눈앞에 펼쳐졌다.

“너 안 들리지? 어차피 내가 만드는 소리는 청각이 아니니까 이렇게라도 알아들어.”

“…….”

“오헬이 네게 전하라고 했어.”

“…….”

“네가 할 일을 하래. 죽을 마음 없으니까 추모할 생각 하지 말고, 네가 여기서 할 일을 하라고.”

스완의 눈엔 한없이 약해 빠진 인간일 뿐인데, 왜 이런 전언까지 해 줘야 하는 건지 이해를 못 하겠다. 차라리 내가 더 나을 텐데. 그는 예쁜 얼굴 위에 어울리지 않게 인상을 잔뜩 찌푸리더니 혀를 차곤 능력을 거두었다. 그러곤 성전에 숨어 있던 로를 챙겨 마을을 완전히 빠져나갔다.

다시 홀로 남겨진 일라이저는 툭툭 떨어지는 눈물을 아무렇게나 닦으며 일어섰다. 그래, 맞아. 주군께선 스스로 가셨다. 분명 뜻이 있으신 거야. 그리고 조금 전 뱀의 왕이 하는 짓을 보니, 쉽게 죽이진 않을 거다. 그렇게 자위하며 일라이저는 완전히 땅을 밟고 섰다.

“얘, 일. 어서 마을 수습이나 하자꾸나.”

“그래, 다행히 밭은 무사하니 먹고살 만은 할 거야.”

“축복의 나무에도 성력이 걸려 있어요! 여긴 괜찮나 봐요!”

“우선은 경비를 좀 더 두텁게 해야겠습니다.”

“성벽을 쌓는 것도 좋을 듯해요.”

“살 사람은 살아야지. 이렇게 넋 놓고 있으면……,”

그러나 일라이저는 매달리는 사람들의 손을 무시하고 떨어진 총을 주워 들었다. 그 옆에 떨어져 있던 그녀의 금화살도 움켜쥐었다.

“일, 너 설마 뱀을 따라가려고 그러냐?!”

“일! 가긴 어딜 간다고! 네가 가면 마을은 어떻게……,”

― 마을의 경비 단계를 높이세요. 이제 당신들을 지켜 줄 이종족은 없으니까.

지켜 줄 이종족이 없다니? 공격할 이종족이 아니고……?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마을 사람들을 뒤로했다. 그래, 맞아. 바보처럼 도망치며 내 목숨만 부지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는 저를 붙잡는 마을 사람들에게 작별을 고하며 마을을 떠났다.

*

“병력은 완벽합니다. 뱀의 소굴을 둘러싸고 겹겹이 진을 치고 있으니 명령이 내려오는 대로 곧장 공격할 수 있습니다.”

“독수리들에게서도 전갈이 도착했습니다. 뱀들은 쉼 없이 영지를 향해 움직이고 있습니다. 오헬은 안전하답니다.”

“오헬에게도 연락이 왔어. 괜찮대.”

들이치듯 쏟아지는 희소식에도 노아는 안심하지 못했다. 사냥을 하기 위해 가장 먼저 배우는 게 인내인데, 그것도 그녀 앞에선 다 부질없다. 앉았다가 일어섰다가를 반복하며 초조하게 홀을 걸어 다녔다.

괜찮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괜찮아야 돼…….

젠장! 노아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올리며 주먹을 쥐었지만 좀처럼 화가 가라앉질 않았다. 만약 자신이 이엘을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뱀들이 마을을 침입했을 때 그녀만을 빼돌렸을 것이다. 이엘의 의견이 무엇이든 상관하지 않고 제 백성의 안위만을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엘은 자신의 유일한 반려다. 그녀가 원치 않는 행동을 내가 어떻게 해. 그래서 무력하게 목도할 수밖에 없었다. 뱀의 간교에 정신적으로 흔들리는 모습을 보면서도 위로해 줄 수 없었다. 하다못해 자신이 스완처럼 생각을 공유할 수만 있었어도……. 그게 가능하기만 했어도 그녀를 달래 주었을 것이다.

위로하고 달래고 격려하고 안심시켜 주고. 그 모든 걸 내가 다 해 주고 싶었다고.

“폐하.”

“아버지가 이런 느낌이셨을까.”

“…….”

“나 역시 아버지와 함께 영지로 돌아왔을 때, 어머니가 죽은 모습을 보며 분노하고 슬퍼했다.”

“…….”

“하지만 어머니의 죽음을 겪은 내 감정과, 반려를 잃은 아버지의 감정은 상당히 달랐겠군.”

그래서 어머니를 따라 죽으실 정도로…… 고통스러워하셨습니까? 내겐 아직 엘이 살아 있고, 살아 있을 거라는 희망이 있지만 아버지 당신껜 모든 게 잿빛이었나 보군요. 색을 잃은 것처럼 생명의 빛이 꺼져 갔습니까?

노화를 선택하는 것도 아닌, 자살을 선택할 정도로…… 어미를 잃은 새끼의 감정은 비교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참 이상하지. 분명 종족이 다른데도 이종족은 인간을 쉽게 사랑한다. 인간이 그토록 박대하는데도. 설령 서로 사랑하게 되더라도 잃을 게 많아지는 쪽은 이종족이었다. 그걸 알기에 인간을 사랑하면 안 된다고 누누이 배우고 자라는데도 왜 우린 이토록 인간을 쉽게 사랑하게 되는 걸까.

노아는 속으로 욕을 뇌까렸다. 더러운 뱀의 손이 그녀에게 닿았을 때, 그는 진심으로 로빈을 죽여 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레온을 말리지 말 걸 그랬나.”

그냥 모른 척 멸족시키는 게 나았을지도. 그가 한숨처럼 자조했다. 이엘의 위치와 상태는 계속해서 독수리의 눈으로 그에게 빠짐없이 보고되고 있음에도 좀처럼 안도할 수가 없다. 동성 간의 관계가 성행하는 그 뱀의 소굴에서 이엘이 남자이든, 여자이든 어느 쪽도 안전하지 않다는 건 너무도 자명한 사실이라서. 게다가 약도 모조리 떨어졌다. 달리 방도가 없다.

르네의 의견으로 오드의 성력을 불어넣어 보호석을 변형시켰다. 그 탓에 오드는 전보다 더 약해졌지만, 그 역시 이엘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기꺼이 일에 동참했다. 하지만 노아는 알고 있다. 그녀는…… 목표를 이루기 전까진, 절대로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자신들이 건넨 보호석 역시, 사용하지 않겠지.

“안드로.”

“예, 폐하.”

“앤디와 알폰스를 불러 와. 다녀올 데가 있다.”

“예.”

그렇다면 나 역시 내 나름대로의 방법을 찾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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