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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169화 (169/488)
  • 169화

    스완이 혹 연결된 생각이 끊긴 건 아닌가 싶어, 그녀의 이름을 재차 불렀다. 이엘은 대답하지 않고 숨을 골랐다.

    로빈까지 왔다면 이전처럼 늑대들이 나설 수 없다. 그는 늑대와 자신의 연이 끊어졌다고 생각하고 있을 테니까. 그리고 그녀의 목표는 로빈이다. 돌려보낼 순 없다. 이엘은 손바닥에 찬 땀을 옷에 닦으며 오드를 불렀다.

    “오드!”

    갑작스런 오드의 호출에 남자들은 곧장 공격을 준비했지만, 이엘이 더 빨랐다. 잽싸게 앞에 있던 남자 중 하나의 가슴팍을 다리를 휘둘러 밀치고 그의 손에서 총을 빼앗았다. 그러곤 모여든 사람들을 향해 총을 겨누었다.

    “꺄악!”

    아수라장이 된 사람들을 향해 총을 겨눈 채 이엘은 성전을 나온 오드를 향해 소리쳤다.

    “서둘러, 오드!”

    그리고 동시에 스완에게 말했다.

    ― 그냥 놔둬.

    이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오드가 뛰쳐나와 넓게 결계를 쳤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파공음이 크게 한 번 들렸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자신들을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던 이엘이 텅 빈 공터를 향해 몸을 돌린 모습에 사람들은 어리둥절했다.

    퍼억―! 퍼엉―! 퍼억―! 연이어 들린 폭음과 함께 땅이 크게 흔들리며 우저적 갈라졌다. 중심을 잃은 사람들은 오드의 결계 안에서 겁을 집어먹으며 입을 틀어막았다.

    분명 아무것도 없던 공간이었는데 모래바람이 일며 점차 형체가 드러났다.

    “지난 세 번의 도망은 눈감아 주겠다.”

    “…….”

    “이번엔 안 놓친다. 전부 다 부숴 버리기 전에.”

    마침내 흑발의 남자가 거대한 뱀 위에서 훌쩍 뛰어내리며 모습을 완전히 드러냈다. 경악하며 소리를 지르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이엘의 귀에서 점차 줄어들었다. 그녀의 귀엔 로빈의 목소리만이 울릴 뿐이었다.

    “네 스스로 내 손아귀로 들어와.”

    “…….”

    “그때 봤던 늑대 새끼처럼 모조리 죽여 버리기 전에.”

    그녀는 들고 있던 총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천천히 로빈을 향해 걸었다.

    “안, 됩니다.”

    그녀의 앞을 가로막은 건 일라이저였다. 다급하게 뛰쳐나와 고개를 흔들더니 그녀의 팔을 붙잡아 세웠다.

    “가지, 마십시오.”

    그러나 그녀는 간절하게 매달리는 일라이저의 손을 싸늘하게 쳐 냈다. 웃지도, 울지도 않는 애매한 얼굴로 그를 한 번 쳐다봤다가 시선을 완전히 거두었다. 무력하게 떨쳐진 제 손을 쳐다보며 일라이저가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나는 저분께 아무런 도움도 안 되는구나, 싶은 생각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엘은 결계가 쳐진 경계선 바로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로빈을 직시했다. 언제나 교활하게 웃고 있던 남자였는데, 지금은 저만큼이나 딱딱하게 굳어 버린 낯이다.

    “당신은 왜 그렇게 나한테 집착하는 거야?”

    “글쎄.”

    “내가 죽을 때까지 날 따라다닐 생각이야?”

    로빈은 그녀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이엘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먹음직스러운 인간이 눈앞에 있다. 한입에 집어삼켜 버리고 싶은 욕망이 제 속에서 불쑥 들끓었다. 안 본 새에 맛있는 냄새까지 묻혀 왔군.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죽으면, 날 놔줄래?”

    “네가 죽으면 여기 있는 인간들은 모조리 다 죽을 텐데도?”

    “그러네. 그러겠네. 내가 잊고 있었네. 당신은 그러고도 남지.”

    처음 봤을 땐 인간이란 종족 특유의 오만한 눈동자로 저를 쳐다보고 있었다. 늑대의 영지에서 재회했을 땐 늑대를 닮아 생기 있는 눈동자로 자신을 보았다. 세잔티노에서 세 번째로 마주했을 땐, 살육의 현장을 목도한 것에 충격을 받은 듯한 눈동자로 저를 보았다.

    그리고 지금은 생명을 잃었구나, 네 눈동자.

    그런데 나는 왜 너의 그 모든 눈빛 중 지금이 가장 마음에 드는 걸까. 로빈은 비식 웃음을 삼켰다.

    “넌 내 소유다. 내가 발견했고, 내가 거두었고, 내가 살렸어. 내가 아니었다면 넌 그때 땅에서 죽었을 것이다. 그러니 넌 내가 살린 거야, 오헬.”

    “…….”

    “난 내 것에 흠이 나는 걸 원치 않거든.”

    로빈은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마치 귀족 영애를 에스코트하는 듯한 행동에 이엘이 코웃음 쳤다.

    “당신이 오란다고 갈 것 같아?”

    “어.”

    “…….”

    “올 것 같은데. 아닌가?”

    로빈은 이엘이 끝내 잡지 않은 제 손을 거두어 허공에 튕겼다. 그의 제스처에 다시 땅이 우저적 갈라지더니 회색 뱀 하나가 숨겼던 모습을 드러냈다. 거대한 뱀은 똬리를 틀듯이 무언가를 꽉 조이고 있었다. 그게 뭔지 알아채기도 전에 회색 뱀은 온몸에 힘을 줘 그것의 숨통을 끊어 버렸다.

    툭. 머리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뱀은 긴 혀를 날름거리며 인간들을 향해 히죽 웃었다. 옆에 있던 다른 뱀이 꼬리로 죽은 자의 머리를 홱 던져 밀쳐 냈다. 데굴데굴 힘없이 굴러온 머리가 결계 바로 앞에서 멈췄다.

    “기, 기, 길버트……!”

    누군가의 새된 목소리가 들렸다. 완전히 겁에 질린 인간들은 더 이상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사시나무 떨듯 바들바들 안쓰럽게 떨며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간다.

    “저번처럼 내가 네 장단을 맞춰 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오헬?”

    “…….”

    “조건 따위 없다. 네가 순순히 내게 온다고 해도 저것들을 살려 줄 이유가 없지. 네게 맞은 뒤통수가 아직도 얼얼하거든.”

    “변함이 없네, 당신은.”

    “그래서 여기 모여든 것들을 전부 죽여 볼까 하는데. 어차피 네가 내게 오든, 오지 않든 전부 죽일 생각이었으니까.”

    그제야 로빈의 만면에 웃음이 번졌다.

    “다음은 또 누굴 죽여 볼까. 몇 마리쯤 죽이면 네 고상한 얼굴에 절망이 어릴까. 궁금하군.”

    “오, 오헬……! 제발! 제발…….”

    사람들 중 하나가 뛰쳐나와 그녀의 다리에 매달렸다. 자신을 너무도 아끼고 챙겨 주었던 할아버지였다. 안다. 죽음 앞에서, 공포 앞에서 인정이란 없는 것이라고. 그게 인간의 습성이라고. 그렇게 조금 전까지 모두를 이해했는데.

    “제발 부탁한다……. 제발 네가 가서 우리 좀…….”

    “네. 그럴게요. 그렇게 할게요.”

    똑같은 상황이 늑대의 영지에서도 있었는데. 그땐 자신을 지키겠다고 로날드와 슈프, 리퍼가 유독가스를 마시고 쓰러졌는데도 주드는 성전 문을 걸어 잠그는 걸 택했다. 슈프는 끌려가 그 하얀 털이 피에 젖어 곤죽이 되도록 얻어터졌고, 그리고 주드는…….

    “좋겠어요. 당신이 이겨서.”

    비아냥거리는 이엘의 말투에 뱀들이 또다시 날을 세웠지만 저번처럼 달려들진 않았다. 그녀가 스스로 결계 밖으로 나오고 있었으니까.

    “오헬!”

    억눌린 발음으로 제 이름을 목이 터져라 부르는 일라이저의 목소리가 들렸다. 결계 밖으로 따라 나오려는 그를 오드가 붙잡아 말렸다. 이엘은 다시금 제 앞으로 다가온 로빈의 손 위에 제 손을 얹어 잡았다.

    “어차피 당신은 내 도움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는 거 알지? 여기서 사람들을 더 건드렸다간 절대로 협조하지 않을 거야.”

    “같잖은 협박이군.”

    “믿기지 않으면 한번 해 봐. 내가 혀 깨물고 죽어 버릴지 누가 알아?”

    그녀의 차가운 말에 로빈이 조소했다. 그러곤 그녀의 얼굴을 한 손으로 낚아채 저를 보도록 홱 끌어당겼다.

    “그럼 깨물고 죽을 수 없게 혀를 자르고 봉하면 되겠군. 리플.”

    로빈은 이엘의 얼굴을 잡지 않은 손을 뒤로 내밀었다. 리플은 성한 손으로 쥐고 있던 검을 왕의 손 위에 올려놓았다. 로빈의 눈은 전과 달리 서늘했다. 정말 봐줄 마음이 조금도 없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아니면 네 다리를 잘라 도망칠 수 없게 만들어도 좋지.”

    “…….”

    “눈알 하나를 도려내는 것도 나쁘지 않고.”

    아이들이 질겁하며 귀를 틀어막았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이엘은 무덤덤했다. 그저 건조한 시선으로 로빈을 쳐다볼 뿐이었다. 인간 특유의 오만한 시선도 아니었고, 겁에 질린 눈도 아니었다. 감정 하나 없는 눈으로 저를 쳐다보는 인간의 시선에 로빈이 불쾌함을 느꼈다.

    “역시 눈을 파는 게 낫겠어. 그 눈깔을 볼 때마다 기분이 더러웠으니까.”

    자신과 똑같은 녹색 눈동자. 아니. 뱀의 것보다 더 순수하고 고결한 황족의 눈동자다. 그래, 네가 유일하게 살아남은 황실의 마지막 손이라고? 빌어먹을 황족 놈이 아직도 살아 있을 줄이야. 일이 끝나는 대로 제 손으로 목을 틀어 죽여 버리리라. 그렇게 다짐했다.

    “…….”

    “…….”

    분명 그렇게 다짐했는데.

    “폐하.”

    “…….”

    빌어먹게도 이종족은 인간의 유혹에 속절없이 무너지는 종족이라. 로빈은 위로 쳐들었던 검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러곤 이엘의 얼굴을 잡고 있던 손을 풀었다.

    “네 손으로 골라라.”

    “뭐?”

    “실험 대상이 될 아이 셋을 골라.”

    “내 말을 허투루 들었어? 더 건드리면 내가 혀 깨물고……,”

    “그럼. 저들에게 고르라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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