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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168화 (168/488)
  • 168화

    “뱀이 우리 마을을 타깃으로 잡았다는 소문 말이야.”

    이엘의 손엔 무기라고 할 만한 게 없었다. 기껏해야 품에 넣고 다니는 르네의 금화살이 전부다. 끝이 뾰족하긴 하나 검에 비할 건 아니다. 검과 총으로 무장한 남자들을 상대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 뱀에게 잡히기 전에 구출했어.

    연이어 들리는 스완의 소식에 고맙다고 전했다. 그나마 스완이 이엘의 안전이 걱정돼 늑대들이 있는 곳으로 합류해 있었기에 망정이었다. 만일 스완이 늑대의 영지에 있었더라면 소식을 전달받는 데에 상당한 시간을 허비했을 테니까. 아무튼 메이슨의 안전이 확보되었으니 그쪽은 됐고.

    “그래서요? 뱀 얘기를 왜 저한테 하죠?”

    “근데 그 타깃이 된 이유가 말이야. 나자르 때문이란 소문이 돌더라고.”

    “…….”

    “뱀이 대륙을 샅샅이 뒤지는 이유가 저 나자르 때문이라고.”

    로빈은 이미 오드가 이 마을에 있다는 걸 알아챘다. 일라이저와 자신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마을을 습격했던 그날……. 분명 그때 오드를 봤을 것이다. 그가 성력을 쓰는 것을 보고 확신했겠지.

    역시 저자들은 뱀과 연관되어 있었다. 그것도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그러니 제게 손을 대지 못한 것도 납득이 된다.

    뱀이 건드리지 말라고 했겠지.

    “그래서요? 전부 오드 탓이라고요?”

    “아니지, 그게.”

    “…….”

    “저 나자르를 뱀에게 주면 우리가 무사할 것 아니냐.”

    남자의 곁엔 이엘이 이곳에 처음 왔을 때부터 살았던 사람들도 있었다. 하루에 한 끼조차 먹지 못해 배를 곯던 사람들이……. 오드와 자신이 온 뒤로 농사를 시작했고, 심지어 축복의 나무를 살려 영양분을 충분히 공급해 주었다. 연신 고맙다며 나자르 님이라 공대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마저 왜 그쪽에 있는 걸까.

    “오헬. 좋게 좋게 생각하자고, 어? 어차피 나자르가 축복의 나무를 몇 그루 살려 놓았으니 우린 충분히 배부르게 먹고살 수 있다.”

    “오드를 뱀에게 넘기면 마을이 무사하다고 누가 그러던가요?”

    “아니, 뭐……. 누가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상식적으로……,”

    “메이슨이 사라졌는데 혹시 못 보셨습니까?”

    그녀의 갑작스런 화제 전환에 남자들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지금 그런 얘길 할 때가 아니잖아! 왼쪽 끝에 서 있던 창백한 낯의 남자가 소리를 질렀다.

    “뱀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니겠죠. 사라진 메이슨을 찾는 게 우선이에요.”

    “야! 지금 그딴 애 찾을 때가 아니라고!”

    “왜요? 저한텐 이딴 시답잖은 이야길 하는 것보다 그게 더 중요해요.”

    “그깟 눈깔 없는 놈을 찾아서 뭐에 써먹어? 눈도 없어서 일도 못 하고, 식량만 축내는 식충인데 없어지면 뭐 어때? 오히려 고마워해야 하는 것 아니냐?”

    질렸다. 인간의 폭언엔 답도 없다는 걸 진즉 알고 있었다. 이엘은 제 뒤로 다가온 일라이저의 기척을 느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일라이저가 듣지 못한다는 것에 감사했다. 아직까진 그의 신념을 지켜 줄 수 있을 테니. 괴롭고 속이 타는 감정은 자신이 홀로 느끼는 것으로도 충분했다.

    “비키세요. 메이슨 찾는 일에 도움 줄 거 아니면.”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야. 그놈이 좀 수상하거든.”

    스쳐 지나가려던 이엘이 걸음을 우뚝 멈춰 세웠다. 중무장한 남자들의 태도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에. 자신이 메이슨을 찾기 위해 성전을 벗어나면 곧장 안으로 들어가 오드를 끌고 나올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이걸 노렸나? 내 양발을 다 묶어 두려고.

    그런 이엘의 주저함을 눈치챈 남자가 히죽 웃으며 말을 이었다.

    “붉은 머리카락에, 눈깔도 없고. 좀, 뭐가 떠오르지 않냐?”

    “글쎄요.”

    “우린 이종족을 사냥하기 위해 마을을 떠났지. 값어치가 높은 이종족을 수없이 많이 수렵했고.”

    “…….”

    “그런 우리가, 값비싼 독수리를 못 알아볼 리가 있겠어?”

    일라이저는 대화가 오가는 남자들의 입에 집중했지만, 워낙 빠르게 치고 가는 말이라 전부 이해할 순 없었다. 하지만 몇 개의 단어는 포착했다. 메이슨. 붉은. 눈깔. 사냥. 값어치. 독수리…….

    메이슨이 사라진 것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걸까? 조금 전에 이엘이 말했던 내부 세력이란 건, 정말 저 사람들인 걸까. 밀려드는 두려움에 마른침을 삼켰다.

    “하지만 눈깔이 없는 독수리는 무용지물이거든. 별로 쓸데가 없어, 그것도 새끼는.”

    메이슨을 처음 만났을 때, 그의 눈 주변에 둘러진 검은 천은 이엘을 괴롭게 만들었다. 자신이 빼앗은 것도 아닌데, 그저 독수리의 눈알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단 것만으로도 죄책감에 괴로웠다. 독수리에게 눈알은 삶이며, 생명이었다. 자신이 원했던 게 누군가의 생명이었음을, 메이슨을 만나고 절감했다.

    그런데 나와 메이슨에겐 그토록 절망적이고 가슴 아픈 이야기를, 참 쉽게 조롱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가치와는 다른 식의 가치를 매겨. 그게 당사자에겐 얼마나 절망적인 삶인지도 모르면서.

    “대신 다른 게 궁금해졌단 말이지.”

    “…….”

    “뱀과 독수리는 천적 관계이지 않나?”

    “…….”

    “눈깔이 빠진 새끼 독수리를 뱀이 먹을지, 아니면 그래도 새는 새니까 놈이 뱀을 먹을지 말이야.”

    진저리가 난다. 이종족을 바라보는 시선은 연구실로 납치해 와 무자비한 실험을 하던 그때와 다르지 않다. 여전히 생명이 가벼워, 당신들에겐. 애초에 다른 종족을 생명체 취급이나 한 건지 모르겠다.

    차라리 뱀이 메이슨을 납치해서 오드와 자신을 노린 거였다면……. 차라리 그런 협박이었더라면 이렇게나 역겹진 않았을 것이다. 같은 종족인 것에 오욕을 느끼지도 않았으리라. 동족이라 마음 아파했던 시간이 너무도 아까워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그랬더니 뱀이 냉큼 잡아가더라고?”

    “확실히 눈이 없는 독수리는 별 쓸모가 없지.”

    “근데 그거 독수리가 맞긴 맞아?”

    “인간이면 어떡해.”

    “뭐, 어때. 널리고 널린 게 애새낀데. 하나 죽는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이젠 정말 질려 버려서, 더 듣고 싶지 않았다.

    ― 새끼 독수리는 무사해. 걱정하지 마. 독수리의 왕이 네 걱정을 해.

    때마침 들려온 스완의 목소리는 울적한 제 마음을 다독거려 주었다.

    ― 괜찮으니까, 자책하지 말래.

    이엘은 스완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품에 넣어 두었던 르네의 금화살을 꺼냈다. 길고 가는 화살을 창처럼 손에 쥐고 남자들과 마주 봤다.

    “요점만 말해요.”

    “저 안에 있는 금발 꼬마.”

    “…….”

    “놈도 이종족이 맞지? 놈을 내놔라. 그리고 나자르 역시 뱀에게 보내 버리는 게 낫겠다.”

    괜한 트집이란 걸 안다. 오드의 목을 원하는 건 뱀의 계략이겠지만, 로나 메이슨은 인간들의 심심풀이일 뿐이다. 그냥 싫어서. 그저 단순히 이종족이 싫으니까. 자신이 거절할 걸 알고 부러 이 많은 장정이 무장을 한 채 이곳까지 온 것도, 안다.

    그저 분풀이를 하고 싶어 약자인 로를 노리고 있다는 걸, 너무도 잘 안다.

    아는데도…… 자꾸만 실망하게 되네. 그래도 동족이라고, 같은 길을 걸을 수 있지 않을까 조금은 기대했던 내 자신에게도 실망하게 돼. 내 백성이라 생각해, 언제까지고 품어 주려 했던 내 신념이 조금씩 흔들린다.

    ― 제발 그만하세요!

    무슨 상황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그녀와 사람들이 대치하고 있다는 걸 알아챈 일라이저가 빠르게 사이를 가르고 들어왔다.

    “비켜, 일. 마을이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다.”

    ― 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다들! 우리끼리 싸우면 어쩌잔 거예요!

    “너. 이종족을 혐오하지 않더냐?”

    ― …….

    “성전 안에 있는 저 금발 놈이 우논이라더구나.”

    남자들 사이에 있던 마을의 노인 하나가 모습을 드러내며 일라이저를 타일렀다. 위험하지 않니? 우논이란다. 우논이 여기 있으면 어떡하니, 일. 서둘러 죽이지 않으면 우리가 죽는다! 노인의 절박한 입 모양을 멍하니 지켜보며 일라이저는 입을 다물었다.

    이곳에 온 뒤로 로와 메이슨은 눈치껏 사람들의 눈에 거슬리지 않으려 노력했다. 우논이란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살갑게 인간을 대했다. 게다가 일라이저가 저희를 꺼려한다는 걸 눈치채고 그의 곁엔 일절 다가가지 않았다. 매사 조심하고 숨죽여, 있는 듯 없는 듯 지냈다.

    이곳에서 우논들은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다. 되레 그들의 성체들은 마을을 지켜 주고 있었고, 인간들은 알지 못하는 뱀들의 침입을 수차례 막아 주기까지 했다.

    ……정말로 죄가 없다.

    “얘야, 일. 어서 데려오려무나. 살려 두면 화근이 된단다.”

    ― …….

    “일. 제발…….”

    벌써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이곳으로 모였다. 아무것도 몰랐던 사람들도 조금 전 대화로 로와 메이슨의 정체를 알게 됐다. 모두가 두려움에 떨었다. 이대로 두면 우리를 죽일지도 몰라. 우리 마을이 또 불에 타 사라질지도 몰라. 원초적인 공포로 소란이 일었다.

    ― 내가 말하지 않았나?

    이엘은 제게 충성을 맹세한 신하를 향해 말했다.

    ― 어떤 식으로든, 네 신념이 깨지면 너만 상처받을 거라고.

    ― …….

    ― 하지만 난 널 탓하지 않을 테니, 알아서 선택해라.

    물론 로를 넘겨줄 마음은 추호도 없다마는. 이엘은 일라이저를 뒤로 밀치고 화살을 손에 쥔 채 자세를 잡았다. 이미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제대로 싸울 수 없게 돼 버렸다. 어린아이들까지 구경을 하고 있는 판국이니, 성전을 보호하는 것이 고작일지 모르겠다.

    그녀는 인간들의 마음을 이해한다. 물론 납치범 일당들은 악의를 갖고 계략을 꾸몄으니 용서할 순 없지만, 몰려든 마을 사람들은 충분히 이해한다.

    무섭겠지. 두렵겠지. 걱정이 되겠지. 이제 겨우 살게 됐는데, 입에 풀칠을 조금이나마 하게 됐는데, 이종족이라니. 공포란 감정에 잠식돼 인정이고 뭐고 보이지 않게 된 거겠지.

    누군가는 어리석다며 자신을 욕할지 모른다. 이런 종족에게 무슨 기대를 하냐며 자신을 탓해도 대꾸할 말이 없다.

    하지만 동족이다. 자신의 백성이었고, 지금도 자신의 백성이란 사실은 변함이 없는 동족. 부모가 자식을 놓을 수 없듯, 자신 역시 연약하고 악한 제 종족을 외면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나는 내 종족을 잃게 되는걸.

    나를, 잃게 된다. 내가 살아왔던 존재의 이유를 잃게 돼.

    그리고 그때 스완의 급박한 목소리가 들렸다.

    ― 뱀이야.

    어쩌면 이렇게 기가 막힐 정도로 절묘한지. 헛웃음이 터졌다.

    ― 뱀의 왕이 대군을 끌고 왔어. 이대로 부딪치면 곧장 전쟁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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