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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167화 (167/488)
  • 167화

    “네?”

    “인간인 듯하니 나는 그만 돌아갈게.”

    “…….”

    “또 보자.”

    그는 그 말만 남기며 몸을 더 작게 줄여 풀숲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그리고 그가 사라지자마자 이엘의 앞에 긴 그림자가 다가왔다.

    ― 전하. 조금 전에 누가 여기 있었습니까?

    ― 늑대가 잠깐 들어왔었다. 혹 기척이 느껴져 깼나?

    ― 아닙니다. 잠을 통 잘 수가 없어서…….

    ― 그럼 이쪽으로 앉아.

    이엘이 선선히 웃으며 대답하자, 일라이저의 귀가 또 새빨갛게 타올랐다. 이엘이 털어 준 자리에 앉으며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 아이들을 되찾아온 뒤로 그녀는 더 수척해졌다. 일라이저도 알고 있었다. 그들과 함께 돌아온 남자들이 그녀를 배척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나설 수 없었던 것은 그녀의 지시 때문이었다.

    처음 이엘이 이곳에 왔을 때, 일라이저는 그녀가 황손이라는 걸 알지 못했고 편지에 적었던 대로 이엘 스스로 이곳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을 조건으로 제시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그녀는 자신의 주군이며, 자신은 절대로 주군이 난처한 상황에 놓이는 걸 묵과할 마음이 없었다.

    ― 전하. 혹시 마을 일로 곤란하시진 않으십니까? 역시 제가……,

    ― 일. 나와 함께 아이들을 구출하러 떠났을 때 기억하나?

    ― 예, 전하.

    ― 그때 그대는 인간들을 향해 총구를 겨누었고 결국 방아쇠까지 당겼다.

    하지만 일라이저는 그중 그 누구도 맞히지 않았다.

    맞히지 못했다.

    ― 나는 그대에게, 필요한 상황이 오면 인간을 죽이라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 …….

    ― 다만 너는 인간에겐 너무 무르고, 이종족에겐 너무 엄해.

    무르다는 표현엔 동의하지만 엄하다는 말은 그에게 속상한 표현이었다. 어떻게 엄하다고 하실 수 있습니까? 그러나 감히 항변하지 못한 채 입술만 꽉 깨물 뿐이었다.

    ― 이종족을 용서하란 말을 하려는 것도 아니니 표정 풀고.

    이엘이 짧게 웃었다. 그 웃음에 좁혀졌던 미간이 바보처럼 순식간에 펴졌다. 정말 바보처럼.

    ― 어떤 식이 됐든, 그대의 신념과 가치관이 깨지는 날이 오면 그대만 괴로워질 것이다.

    내가 그러했듯.

    ― ……메이슨이라는 우논을 두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역시 눈치가 빠르네. 이엘은 속으로 그를 칭찬하며 또 짧게 웃었다. 메이슨과 로가 이곳으로 온 뒤로 시간이 꽤 흘렀지만 일라이저는 여전히 혼란스러워했다. 특히 메이슨을 바라보는 것 자체를 곤혹스러워했다.

    ― 하지만 저는 여전히 이종족이 싫습니다. 제가 전하의 뜻을 따라 제국을 재건하는 것에 앞장서는 것과는 별개로요.

    ― 솔직하구나.

    ― 그 우논은……. 잘 모르겠습니다.

    안타깝게도 일라이저는 보통 사람들과 많이 다르다. 전쟁의 트라우마가 남긴 흔적은 그렇게 쉽게 사라지는 게 아니었다. 이엘 역시 사라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그저 그의 혼란스러운 감정을 조금만 덜어 주고 싶었을 뿐이다.

    ― 됐다. 그만 생각해. 그대가 하고 싶은 대로 해라.

    ― 하오나, 전하…….

    ― 설령 내가 황위에 올라 제국을 재건한다손 치더라도 네게 이종족을 용서하라는 명령은 절대 하지 않을 테니 염려 말고.

    ― …….

    ― 러셀 후작을 닮았다면 필시 영리할 테니 말이야.

    마지막 말은 농담에 가까운 위로였다. 그녀의 말을 곱씹으며 일라이저는 고개를 숙였다.

    *

    “그래도 여긴 피해가 적어서 다행이네요.”

    “곧 가을이니 알맞은 때에 수확을 할 수 있을 듯합니다.”

    “수확할 때에 다 거두진 마시고, 일부는 남겨 두세요.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이나 이종족에게서 도망친 사람들이 먹을 수 있도록.”

    오드의 말에 관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 들어 이종족 아래서 부림당하던 노예들이 도망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그리고 그중 일부는 이 마을로 흘러들어 왔다. 원래 마을 사람들도 노예였다가 도망쳐 모여 살게 되었으니 그들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다만 역시나 내부 분란 세력이 문제였다.

    “이봐, 나자르. 그러면 입이 더 늘잖아?”

    “그렇다고 외면할 순 없습니다.”

    “가뜩이나 뱀에게 짓밟혀서 남은 밭도 몇 없다면서. 입이 늘어나면 내가 먹게 될 양은 줄어들 텐데, 그걸로도 모자라 다 거두지 말고 남겨 두라고? 하, 참. 기가 막히네. 이제 곧 겨울인데 어떻게 살란 거야!”

    뚱뚱한 남자의 한마디에 마을 사람들 중 상당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점점 늘어나는 인구 때문에 좁은 땅마저 서로 공유하게 되면서 불만이 늘어나던 차였다. 남자는 여론이 제 쪽으로 몰린 것을 확인하며 다시금 오드를 협박하기 시작했다.

    “어이. 입이 있으면 말 좀 해 보시지? 이러다 내가 먹을 양이 줄어들면, 어? 그래서 내가 배를 곯게 되면 네가 책임질 거냐?”

    “…….”

    “네놈이 방어를 잘 못해서 이 사달이 났는데, 그걸 보상하기는커녕 뭐?! 나눠 주라고? 하여간 나자르란 놈들은 머리가 전부……,”

    “그 얘기를 내가 당신한테 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저 멀리 무너진 집을 보수하고 있던 이엘이 딱딱하게 굳은 채 한마디 툭 던지자 남자가 입을 다물었다. 흠흠……. 헛기침을 하며 은근히 그녀의 시선을 피했지만, 그녀는 들고 있던 망치까지 전부 던져 버리고 성큼성큼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당신이 먹는 양에 비하면 아이들이 먹는 양은 턱없이 적어. 알지?”

    “크흠.”

    “불만 갖지 마요. 오드에게 함부로 대하지도 말고.”

    다른 건 둘째 쳐도 오드를 함부로 대하는 태도는 용서할 수 없다. 마을에 온 뒤로 줄곧 느슨하게 굴던 그녀가 싸늘하게 일갈하자, 남자들은 저마다 눈치를 보며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남자들은 은근한 파벌을 만들어 그녀를 배척하긴 했어도 대놓고 이엘에게 맞서진 못했다. 단순히 그녀에게 적수가 못 된다는 걸 알기 때문에 몸을 사린다고 보기엔 무리였다. 꿍꿍이가 있는 눈빛을 서로 주고받는 남자들을 바라보며 한숨처럼 이엘이 말했다.

    “축복의 나무를 생각한다면 오드에게 이런 식으로 대할 수 없을 텐데요.”

    “그게…….”

    “내키지 않으면 당신이 여길 나가면 돼요.”

    남자가 이를 가는 모습이 보였지만, 역시나 그는 흥! 콧소리를 내며 돌아섰다. 이상할 정도로 저와 대적하는 걸 피한다. 이엘은 찝찝한 마음을 뒤로하고 흙이 묻은 손을 대충 옷에 털어 정리했다. 마을 사람들은 그녀의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자리를 떠났다. 홀로 남겨진 오드가 이엘의 곁으로 다가와 다정하게 옷을 털어 주었다.

    “난 괜찮아. 사람들하고 부딪칠 필요 없어, 엘.”

    “네가 괜찮아도 내가 안 괜찮아. 부딪친 것도 아니고. 그보다 스완에게 연락이 왔어.”

    “무슨 일인데?”

    “뱀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대. 점점 가까워지고 있어.”

    냄새를 맡은 게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좁혀 오듯 가까워질 순 없다. 마치 궁지로 몰아넣고 벌벌 떠는 모습을 지켜보려는 것처럼, 부러 이 마을을 둘러싸듯 다가오고 있었다. 그게 딱히 무섭다거나 걱정이 되는 건 아니었지만 뱀이 어떤 식으로 나올지 몰라 초조해졌다.

    어떤 식이 됐든 치졸하고 약아빠질 거란 건 분명하겠지만.

    *

    그녀의 부정적인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괜찮아. 찾을 수 있어.”

    “죄, 죄송해요……. 제가 부, 분명히 지켜봤는데……!”

    “로. 괜찮아, 진정해. 너에게 뭐라고 하려던 게 아냐.”

    겁에 질린 듯 큰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로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엘은 서둘러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작은 소년을 품에 안아 다독거렸다. 제 탓이라고 생각했던 건지 로는 그녀의 품에 안겨서도 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울음을 참았다.

    ― 메이슨이 없어졌다니, 어떻게 된 일입니까?!

    놀란 눈을 하고 황급히 들어온 일라이저도 당황한 듯했다. 이엘은 로를 품에 안은 채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잘 놀고 있던 메이슨이 갑자기 사라졌다니. 내색하진 않았지만 그녀도 당황한 탓에 할 말을 잃었다.

    이곳으로 온 뒤로 로와 메이슨은 마을 아이들과 곧잘 어울렸다. 일라이저를 제외한 인간들은 두 사람이 우논이란 생각을 전혀 하질 못했으니까. 오늘도 평소처럼 아이들과 함께 어울려 뛰어놀았다는데, 로가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메이슨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없었단다.

    ― 설마 또 뱀들이 납치를…….

    ― 그건 아냐. 그랬다면 아이들 모두를 데려갔겠지. 메이슨만 노린 거야.

    이미 스완에게 연락을 해 뒀고, 늑대는 추격을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쯤이면 독수리의 눈으로 찾아냈을 테니까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 그럼 대체 누가……,

    ― 일단 여기서 기다려 보자. 곧 연락이 올 테니.

    ― 추격대를 꾸리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늑대들은 밖에서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고 합니까? 여태 침입자는 전부 늑대가……,

    ― 내부의 소행이야.

    ― …….

    그녀의 말에 일라이저가 손을 멈췄다. 내부라고?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그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설마 또……. 충격에 휩싸인 일라이저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얼굴이 희게 질렸다.

    이래서 그에게 충고했던 거였다. 인간에게 너무 무르게 굴지 말라는 말을, 이래서 했다고.

    ― 메이슨이 무슨 종족인지, 그대는 알아챘겠지.

    타오를 것 같은 붉은 머리. 그리고 인간에게 빼앗긴 두 눈알.

    ― 독수리의 왕이 지켜보고 있었어. 물론 한순간도 눈을 떼지 않고 지켜본 건 아니겠지. 그들은 모두 외부 침입에만 주의했으니까. 안쪽에서 누가 아이를 빼돌리리라곤 생각하지 못했을 거야. 그것도 메이슨 하나만을.

    미리 언질을 해 주지 못한 제 탓이다. 이엘은 스스로를 탓하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인간들 사이에 분란이 생겼다는 이야기를 흘러가듯 스완에게 한 적은 있지만, 심각하게 토로하진 않았다. 노아가 그 이야길 깊게 받아들이게 되면 곧장 마을로 쳐들어올 테니까.

    자신이 경계하며 긴장을 늦추지 않으면 될 거라고 쉽게 생각했다. 이렇게 모두가 보는 대낮에, 그것도 자신이 아닌 메이슨을 납치할 줄은 정말 몰랐다. 이건 온전히 제 탓이다. 로를 다독이며 계속해서 자책했다.

    ― 찾았어.

    때마침 스완이 연락을 보냈다. 이엘은 로를 품에서 떨어뜨리고 곧장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성전 뜰을 벗어나기도 전에 그녀의 걸음은 가로막히고 말았다.

    “어딜 가시나?”

    대략 서른 명쯤 되려나. 어느 틈에 이렇게 많이 제 편을 만든 건지 모르겠다. 마을 사람들은 대다수가 약자였다. 그중에 건장한 성인 남성은 몇 안 된다. 그런데도 이렇게 많이 세력을 모았다고……. 이엘은 남자의 리더십에 놀라야 할지, 박수를 쳐 줘야 할지 몰라 헛웃음을 터뜨렸다.

    “우리가 소문을 좀 들었거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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