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쳇. 이카르는 짜증스럽게 투덜거리다가 이내 수긍했다. 워낙 작은 모습으로 생활할 때가 많다 보니 사실 크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게다가 어릴 땐 그녀의 어미였던 리카르디스가 이렇게 안아 주기도 했고. 그러니 썩 나쁘지 않다.
“잘 지냈어요?”
“잘 지냈나?”
두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안부 인사가 튀어나왔다. 잠깐 침묵하던 이엘이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곧이어 이카르의 바람 빠진 웃음소리도 들렸다.
“저는 잘 지냈어요. 이카르는요?”
“나도.”
“한동안 못 볼 줄 알았는데.”
“그럴 수 없었어.”
이카르는 이엘과 헤어진 뒤로 몸을 회복하는 것에 주력했다. 떠돌이 생활로 근근이 살아가던 탓에 몸이 엉망이었다. 홀로 생활하던 때라면 대충 죽지 않을 만큼만 사냥하며 살아도 됐을 것이다. 하지만 이젠 아니었다. 그는 동족을 찾겠다는 부질없는 꿈은 버리고 새로운 희망의 빛을 잡기 위해 제 몸부터 챙겨야 했다.
그래서 그녀의 곁을 잠시 떠나야 했지만 결국 돌아왔다. 그럴 수 없었으니까. 마치 발이 묶인 것처럼 이엘을 향한 걱정에 벗어나질 못했다. 이엘을 떠올리면 그녀의 어미인 리카르디스가 자연히 떠올랐다. 그래서 그녀의 안전이 염려됐다. 언제, 어떻게 뱀에게 갈지 알지 못하니 멀리 갈 수 없었다. 늑대에게서, 그리고 뱀에게서 돌려받아야 하니까.
“늦지 않아서 다행이네.”
그 말을 끝으로 이카르는 그녀의 무릎 위에서 눈을 감고 긴장을 풀었다. 이엘은 새끼 테르들보다 한참이나 작은 우논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그의 털을 손으로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금방 내칠 줄 알았는데 그는 잠자코 손길을 받기만 했다.
“이카르.”
“왜?”
“제 어머니랑 많이 가까운 사이였어요?”
그녀의 질문에 이카르는 잠시 침묵했다. 감고 있던 눈을 슬쩍 뜨고 그녀를 빼다 박은 이엘을 가만히 쳐다봤다. 눈동자 색과 머리카락 색만 아니었다면 착각할 정도로, 이엘은 그녀를 무척 닮았다.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아주 어렸기 때문에 기억은 잘 안 나. 다만 카시온이…… 그러니까 내 사촌 형이 무척이나 좋아하던 모습은 기억에 남아 있지만.”
“…….”
“그녀는 다정하고 온후하면서도 야무진 성격이라 모두가 좋아했어. 숫기가 없어 낯을 가리던 내게 거리낌 없이 손을 내밀어 줄 정도로.”
당시 론 후작가라고 하면 제국에서 손에 꼽히는 권세 가문 중 하나였다. 그런 후작가의 장녀로 태어나, 보고 자란 게 이종족을 향한 배척밖에 없을 텐데도 그녀는 상당히 바른 사고를 가진 여자였다. 어릴 때 만난 카시온과 서슴없이 대화를 이어 갔고 끝내 편견 없이 사랑에 빠졌다.
“나는 어릴 때 모친을 잃었거든. 어미 없이 자라, 외로움을 타는 내게 기꺼이 손을 내밀어 줬어.”
“그랬군요.”
“리키는, 네 어머니는 자랑스러운 사람이야.”
솔직히 그녀는 제국의 황후로서 부족함이 없는 여자다. 모두에게 귀감이 될 만큼. 이카르 자신은 사적인 감정 때문에 그녀가 황후에 오르는 걸 반대했지만, 결국 그녀 덕분에 잠시나마 이종족의 처우가 나아졌던 것도 사실이니까.
“어머니가 절…… 많이 사랑하셨을까요?”
“그 어떤 것보다.”
“…….”
“그 누구보다.”
너는 모르겠지만 네 오라비인 아르세니온 황자보다. 심지어 제 몸보다 더 끔찍이 사랑해서 널 살리기 위해 갖은 수를 다 쓸 만큼. 너는 평생 모르겠지만 말이다. 이카르는 그 생각을 하며 그녀의 마른 손바닥 안에 제 얼굴을 갖다 댔다.
“너는 내가 볼품없고 형편없는 놈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리키의 딸인 널 외면할 수 없어.”
“제가 선황의 딸인데도요?”
리카르디스의 딸이면서 동시에 선황 알렉산드로의 딸이기도 하다. 자신의 피엔 론 후작가의 피만 흐르는 게 아니라 황실의 피도 흐르고 있다. 그리고 그는 황실을 생각만 해도 피눈물을 흘릴 정도로 혐오하는 남자였다.
하지만 염려 섞인 그녀의 질문과는 달리 단호한 답이 돌아왔다.
“물론.”
“…….”
“네 어미의 딸이란 건, 그 정도의 가치가 있는 위치야.”
그가 말하는 어머니의 대단한 사랑 같은 건, 그녀의 입장에선 전혀 모르겠다. 자식을 품에 안고도 과거를 말하던 모친에게서 받는 사랑은 그냥 그 정도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이카르가 말하는 어머니가 마냥 낯설게 느껴지는 것도 당연하다. 아직까지도 잘 모르겠다.
이카르는 생각에 잠겨 수심이 깊어진 이엘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그녀의 손가락을 덥석 깨물었다. 한없이 작아진 몸 덕에 아무리 세게 물어도 아프지 않았다. 그저 간지러운 터치만 남긴 그의 행동에 이엘이 상념에서 벗어났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그냥요. 근데 배고프세요?”
“뭐?”
“아니 제 손가락을 갑자기 물길래 배고프신가 했죠.”
분위기를 환기시키려 이엘이 부러 놀리는 투로 묻자 이카르의 미간이 보기 좋게 구겨졌다. 그러나 저 작은 덩치의 동물이 인상을 찌푸려 봤자 뭐가 무섭겠는가. 되레 더 귀엽게만 보여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음, 근데 원래 작아지면 이도 뭉툭해져요?”
이엘이 그의 입을 조심스레 건드리며 물었다.
“하나도 안 아프네.”
“…….”
“새끼 테르들보다 더 약하네요.”
이카르가 계속해서 침묵을 유지하자, 이엘도 그의 눈치를 보며 이쯤에서 그만두려고 했다. 그가 아무리 제게 호의적으로 군다고 해도 이카르는 이종족의 최상위 계급이었다. 그의 심기를 거스르면서까지 농담을 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놀려서 미안하다며 말을 하기도 전에 그는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와 그녀의 앞에 서 있었다.
화들짝 놀랐다. 커다란 키와 압도할 만큼 체격이 좋은 남자가 불쑥 나타나니 깜짝 놀랄 수밖에. 전에 보았을 때처럼 형편없는 몸이 아닌, 이종족 특유의 건강하고 탄탄한 몸을 완전히 회복한 상태였다. 그의 거대한 그림자에 짓눌리듯 이엘은 열었던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놀리는 모습이 꼭 누님 같군.”
그는 피식 웃으며 단숨에 한쪽 무릎을 꿇고 그녀의 앞에 앉아 시선을 마주쳤다. 그러곤 저가 조금 전에 씹었던 이엘의 손가락을 잡아 제 입 쪽으로 끌고 갔다. 갑작스럽지만 또 너무도 자연스러운 행동에 이엘은 그를 말리지 못했다. 이윽고 그녀의 손가락이 남자의 입 안에서 잘근 짓씹혔다.
“리키도 늘 나에게 약하다고 했거든.”
“…….”
“그래서 나를 못 미더워했는지도 모르겠다.”
이카르는 거친 손으로 이엘의 손가락을 부드럽게 쓸었다. 그에게 씹혔던 곳에 잇자국이 선명하게 자리했다.
“내가 도망치자고 그렇게나 설득했는데.”
“이카르.”
“그녀에게 난 여전히 아이였나 보지.”
“…….”
“그러니 너는 부디 내 눈이 닿는 곳에 있어라.”
그가 자신을 통해 어머니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 그건 자신을 조이나로 착각했던 피시와는 결이 다른 형태였다. 자신에게서 어머니를 찾으려는 게 아니라, 자신이 존재함으로써 죽어 버린 어머니를 추억하고자 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어쩌면 어머니의 역할을 대신하려는 것일 수도 있고.
또 어쩌면.
“지금의 나는 네게 맹목적으로 매달려야 하거든.”
자신이 생의 미련을 이온에게 걸었던 것처럼, 그의 남은 생 역시 자신에게 달려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은 저더러 살아 달라고 말했어요.”
“그래.”
남자는 그녀의 손을 움켜쥔 채 힘겹게 답했다.
“제게 어머니를 빼앗아서 미안하다고도 했죠.”
“맞아.”
“만약에.”
“…….”
“정말 만약에.”
이엘이 떨리는 입술 끝을 당기며 숨을 골랐다.
“제가 죽겠다고 하면……,”
“안 돼.”
“…….”
“그럼 안 돼.”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절박하게 답했다. 제 손을 움켜쥔 그의 커다란 손이 간헐적으로 떨리는 게 느껴졌다. 왜 그렇게나……?
“그런 생각 하지 마라.”
“아뇨. 그럴 마음 없어요. 그냥요. 지금 저는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니까.”
“…….”
“생각 정도는 해 볼 수 있는 거잖아요.”
그의 짙은 눈동자가 옅게 흔들렸다. 감정을 고스란히 보여 주고 있다. 그는 진실로 두려워하는 모양이었다. 도대체 왜 그렇게나…….
“우습게 들리겠지만, 지금의 나는 너에게 최고의 상황을 만들어 줄 형편이 안 된다.”
“그런 건……,”
“하지만 네게 최악의 상황이 오지 않게 할 자신은 있어.”
“…….”
“그러니 죽음을 단언하지 마.”
이카르가 자신을 바라보는 눈동자는 익숙했다. 그녀가 이온을 바라볼 때와 반쯤은 닮은 눈동자였다.
“아예 생각도 하지 마.”
죽지 마. 네가 죽으면 나는 어떻게 살아. 눈을 떠야지. 네가 눈을 떠야 내가 숨을 쉬어, 이온. 나를 두고 가지 마.
“내가 스스로에 대한 무능력함을, 두 번이나 절감하게 하지 마.”
하지만 자신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의 눈엔 포기라는 게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로지 책임뿐. 희생이 불가피하다면 그럴 생각이었던 자신과는 다르게, 이카르는 공생을 말하고 있다. 네가 살면 나도 살 거라고.
네가 살아야, 나도 비로소 살 것 같다고.
“나를 온전히 믿지 못해 계속해서 시험하고 있는 것을 안다.”
“아니에요. 시험이 아니라…….”
“네가 그간 만났던 이종족이 죄 이 모양이었으니 불신하는 것도 이해해.”
“…….”
“애당초 이종족과 인간이 서로를 이해한다는 게 공상이지만.”
그가 또 보조개가 팰 정도로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그 공상이 불가능하지 않다는 걸 나는 배웠으니까.”
네게도 알려 주고 싶거든.
한때는 리카르디스를 도망칠 수 없게 만들었던 그녀의 아이들을 원망하고 미워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게 부질없는 감정이었음을 이엘을 만나자마자 깨달았다. 자신 같아도 저를 쏙 빼닮은 자식을 낳는다면 세상에 둘도 없을 바보가 되고 말 것이다.
고독한 황궁에서 그녀의 유일한 낙이었을 테니.
“나타니엘.”
“네.”
“그러니 너는 되도록 좋은 생각만, 좋은 것만 보고 살아.”
그런 건 볼 수 없는 세계가 되었지만, 그랬으면 좋겠어.
진심이었다. 카시온이, 리카르디스가 느끼지 못했던 행복까지 네가 가졌으면 좋겠다. 비록 멸망을 코앞에 둔 세계지만, 너는 수명이 있는 인간이니까, 그 수명이 다할 때까지만이라도 행복하게 살았으면 해서.
“그러니 죽는다는 끔찍한 말은 입에 담지 마.”
“알겠어요. 이카르, 당신도 죽지 마세요.”
그녀의 답에 이카르가 만족한 듯 웃었다. 그러곤 금세 작은 재규어의 모습으로 돌아가 긴 꼬리로 그녀의 발을 장난스레 톡톡 건드렸다.
“당연히.”
“…….”
“네가 살아 있는 한, 나도 같이 숨을 쉴 거야.”
언뜻 들으면 꽤나 로맨틱한 대화였지만 두 사람에겐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 정말로 생존의 문제가 걸려 있는, 내막은 다소 살벌한 뜻이었다. 이엘은 일순 스완과 자신이 영혼으로 엮였을 때와 같은 느낌을 이카르에게도 받았다.
“이카르. 제가 당신에게……,”
“잠깐. 누가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