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이엘의 외침에 안에서 덜커덕거리는 소리와 함께 은빛 머리카락이 모습을 드러냈다.
“엘. 무사했구나.”
“오드! 많이 다쳤어?!”
짐을 바닥에 내팽개치고 오드를 향해 달려갔다. 파리한 낯으로 그녀를 향해 빙긋 웃는 오드가 괜찮다며 손을 내저었지만 이엘은 막무가내였다. 그 얇은 손목을 붙잡고 오드의 안색을 살폈다.
“이게……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며칠 쉬면 괜찮을 거야.”
“며칠 쉰다고 나아질 상황이 아니잖아!”
보호석을 파괴시키는 일은 오드의 수명과 성력을 상당히 갉아먹었다. 게다가 오드는 이온이 있는 땅속에 결계를 항상 발동시키고 있는 중이었다. 이엘도 그의 상태를 알고 있었기에 무리하게 힘을 쓰지 말라고 누누이 말했는데……. 식은땀까지 흘리는 그를 보고 있노라니 속상함과 미안함에 말문이 막혔다.
그가 이렇게까지 지쳤다면 상당한 접전이었다는 얘기다. 정말 뱀이 작정하고 달려든 게 분명하다.
“사람들은 모두 무사해. 기껏 일구어 놓은 밭은 엉망이 됐지만.”
“괜찮아. 그건 다시 돌려놓을 수 있어. 그게 중요한 게……! 알겠어. 일단 오드, 당분간은 조금 쉬도록 해. 응?”
“나의 엘. 네가 이렇게 바지런히 움직이는데 내가 어떻게 쉬니.”
“아니. 쉬어도 돼. 나머진 내가 정리할 수 있어. 나를 위해 부디 그렇게 해 줘, 제발.”
오드의 종족은 날 때부터 인간에게 헌신하기 위해 바쳐진 종족이었다. 이종족이 그러했듯. 그들 또한 도구로 사용되는 자신들의 처지에 불만을 갖지 않았다. 끝내 질투에 눈이 멀어 몰살시킬 때까지도 반항 한 번 하지 않았다. 마치 그게 당연하다는 것처럼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래서 이엘은 오드가 그렇게 살지 않기를 바랐다. 차라리 제 곁을 떠나길 간절히 바라며 자유롭게 날아가길 원했다. 하지만 그의 선조들이 그러했듯 오드도 자신의 곁을 지켰다. 그리고 이엘의 일이라면, 인간의 일이라면 언제까지고 이렇게 나서겠지.
자신 역시 이기적인 욕심으로 오드를 떠나보내지 못할 테고.
“오드. 미안해. 네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는데.”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야. 너희와 함께 살아가는 것. 그게 내 종족이 원하던 일이잖아.”
“…….”
“괜찮아, 엘. 아직은 충분히 견딜 수 있어. 결계를 유지하는 것 정도는 괜찮아.”
오드는 모호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련할 정도로 인간에게 정이 많은 건 오히려 오드 쪽이다. 이엘이 속상한 듯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아랫입술을 깨물며 등을 돌렸다.
이렇게 도움을 받아 놓고, 오드가 쓰러질 정도로 온 힘을 다해 목숨을 지켜 주었는데 오드의 핑계를 대고 있다니. 인간들의 치졸함에 분이 났다.
― 오헬.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그녀의 뒤를 따라 들어왔던 일라이저가 오드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건넸다. 이엘은 걱정스레 따라 나오려는 오드를 말리고 일라이저와 함께 인적이 드문 곳으로 향했다.
― 죄송합니다, 전하. 사람들이 겁을 먹은 듯합니다.
― …….
― 전하께서 화가 나신 것을 압니다. 오드 님에 관해서는……,
― 어차피 다 알고 시작한 일이다. 괘념치 마라.
애초에 큰 기대를 하지도 않았다. 인간들이란 태생이 이기적이며, 배려라는 단어를 모르는 자들이니까. 그러니 화가 나기는 했어도 따질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녀의 딱딱한 대꾸에 일라이저는 저가 잘못한 것처럼 고개를 숙였다.
― 그보다 병력을 더 세워서 경비 단계를 높이도록 해라. 농지 복구는 그 이후에 해도 괜찮으니까.
― 예, 전하.
공손히 절하며 물러난 일라이저를 뒤로하고 이엘은 서둘러 마을을 빠져나왔다. 딱히 신호를 주지 않았어도 그녀의 냄새를 맡고 늑대들이 저 멀리서 어슬렁어슬렁 다가오고 있었다. 줄곧 자신의 뒤를 따라왔던 앤디가 인간의 모습으로 변한 채 그녀의 앞에 도착했다.
“오헬. 괜찮아?”
“그럼요. 저는 무사합니다. 다친 곳도 없는걸요.”
“그것 말고.”
앤디는 눈살을 찌푸리곤 이엘의 손을 조심스레 잡았다. 여전히 미미하게 손이 떨리고 있었다. 며칠 전, 저 납치범들과 마주하며 검을 손에 쥔 뒤로 떨림이 멎질 않는다. 이엘은 그에게 잡힌 손을 빼려 했지만 앤디는 고집스레 제 쪽으로 당겼다.
“아직 검은 무리라고 했잖아.”
“총보다는 나아요.”
“오헬.”
“그래도 앤디 님께 받은 훈련 덕에 큰 힘을 들이지 않고 검을 휘둘렀어요. 감사합니다.”
“넌 진짜…….”
그 말 앞에 할 말을 잃은 앤디는 못마땅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다가 한숨과 함께 손을 놔 주었다. 조금 더 수련을 하고 보냈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러나 수련을 더 했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었을 것이다. 저건 동족에게 총을 겨눴던 죄책감으로 인한 마음의 문제니까.
물가에 내놓은 아이라도 된 것처럼 그의 눈엔 이엘이 한없이 불안해 보였다. 이미 동생을 한 번 잃은 전적이 있다. 그는 더 이상 동일한 아픔을 겪고 싶지 않았다.
“제발 네 몸을 우선으로 생각해, 알았어?”
“걱정 마세요. 저는 제 목숨이 제일 소중한데요?”
으스대며 너스레를 떨자, 앤디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입을 열었다.
“우리가 처리한 뱀이 하도 많아서 아마 뱀의 왕도 이제 눈치챘을 거다.”
“괜찮아요. 어차피 예상했던 날짜도 비슷하니까요.”
“뭐…… 우리가 맡아 보니까 조금 이상하긴 해도 잘 모를 것 같기도 해. 알고 맡으니까 네게 암컷 냄새가 나는 것 같긴 한데, 솔직히 아무것도 몰랐다면 그냥 좀 독특한 냄새려니 싶거든.”
정확히 냄새의 개념은 아니었다. 체향과 호르몬, 그리고 그 외의 다른 무언가. 아무튼 감각이 예민한 이종족들은 이엘에게서 기묘한 느낌을 받기는 하겠지만, 앤디의 말처럼 단번에 그녀가 암컷임을 알아채지는 못할 것이다. 이전에 바로 알아챘던 노아와 르네가 극단적으로 예리한 편인 거고.
코끝을 만지작거리며 앤디가 이엘을 힐끔힐끔 쳐다봤다. 그가 그녀를 제 가족으로 인식한 것과는 별개로, ‘암컷’이라고 하는 존재가 풍기는 이상한 분위기는 이종족의 본능을 자꾸만 건드리고 있었다. 물론 앤디와 여타 늑대들은 절대 그녀를 제 반려로 인지하지는 않겠지만. 어쨌든 본능은 그런 것과 별개의 일이니까.
“왜 자꾸 쳐다보세요?”
“어, 어? 뭐…… 글쎄…….”
자제력 좋은 자신이 이 정도이니 다른 둔이나 테르들은 곤욕이겠다 싶었다. 앤디는 그러한 순간이 오면 어떻게든 이엘을 지켜야겠단 생각이 마음 깊은 곳에서 울컥울컥 차오름을 느꼈다. 같은 종족인 늑대도 못 미더워지겠는데, 이거.
“폐하는 잘 계시죠?”
“응. 네 걱정에 잠도 못 주무시지만, 그분 체력 좋으신 건 뭐 다 아는 사실이니까.”
“다행이네요. 제 걱정 하지 말고 푹 주무시라고 말씀 좀 전해 주세요.”
“네가 전해 드려.”
“…….”
“넌 모르겠지만 폐하께선 바쁜 와중에도 네 곁을 몇 번이나 맴도셨으니까.”
수백 마리의 늑대가 마을을 지키며 감시하는 것에도 한계는 있다. 그러나 노아는 그 한계마저 부숴 버릴 작정인 건지, 경계를 늦추지 않으려 몸소 나서기까지 했다. 그를 떠올리니 마음 한구석이 안심되면서 동시에 찌르르 아팠다.
“금방 돌아간다고 전해 주세요.”
“그건 네가……,”
“폐하를 뵈면 저도 돌아가고 싶어져서 그래요.”
몸이 멀어지면 자연히 마음도 멀어질 것 같았는데……. 그러나 하루하루 지날수록 그리움만 증폭되었다. 돌아가고 싶다. 나 역시,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어서……. 자꾸만 떠오르는 그의 얼굴을 지우기 위해 애써 웃으며 앤디를 향해 공연히 너스레를 떨었다.
“지금도 앤디 님을 보니까 돌아가고 싶은걸요.”
앤디는 쓴웃음을 짓는 이엘을 안쓰럽게 내려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예전이었다면 당장 돌아가자고 이엘을 채근했겠지만, 지금 상황에선 이곳에 머무르는 편이 그녀에게 낫겠단 생각이 들었다. 인간들과 한데 섞여 사는 덕에 체향과 호르몬이 상당히 가려졌기 때문이다. 그게 노아가 고집을 꺾은 이유 중에 하나이기도 했고.
어쨌든 앤디는 작고 동그란 정수리 위에 짊어지고 있을 짐의 무게가 안쓰럽기만 했다.
아직도 잘 모르겠다. 자신도 유서 깊은 혈통을 가진 가문의 직계이지만, 좋은 혈통을 타고났기 때문에 종족을 책임져야 하는 건 아니다. 생존을 위해 본능적으로 충성할 뿐, 어차피 이쪽은 약육강식의 룰을 따라야 하는 이종족이다.
그러니 모르겠다. 황녀로서 많은 걸 누렸던 것도 아니고, 동족인 인간에게 많은 걸 받은 것도 아니면서. 단지 피가 섞였다는 이유만으로 그녀가 이 모든 사태를 책임져야 하는 이유를, 자신은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건 인간과 이종족의 이해 차일까? 아니면, 너와 다른 이들의 이해 차일까.
“조심히 가세요. 당분간은 스완을 통해 연락하겠습니다.”
“그래. 너야말로 조심히 지내.”
“네, 걱정 마세요.”
이엘이 미소를 짓고 나서야 앤디는 풀어진 얼굴로 늑대들을 통솔해 숲으로 사라졌다. 늑대들이 떠난 이후에도 이엘은 그곳에서 한참이나 서 있었다.
돌아가고 싶다는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정말로…… 돌아가고만 싶었다. 그곳은 자신이 처음으로 땅을 하사받은 집이었다.
어릴 때 이엘은 언제나 이온과 비교되어 자랐다. 아니. 비교된다는 표현 자체가 오류다. 그녀는 언제나 이온을 칭찬하기 위한 도구였을 뿐이다. 같은 생각, 같은 의견을 내놓아도 그녀에겐 괄시의 시선이 쏟아졌다면 이온에겐 터 좋은 영지가 보상으로 내려왔다. 이 넓은 대륙에서 그녀가 발붙일 곳이라곤 은폐된 황녀궁이 전부였다.
그런 자신에게 처음으로 안겨진 땅. 정원. 노아는 모르고 선물했겠지만, 그녀에게 그 정원은 그런 의미였다. 돌아갈 수 있는 집이었고, 쉴 수 있는 안식처였고, 숨을 수 있는 피난처였다.
그러니 내가 그곳을 어떻게 잊어.
시작도 전에 지쳐 버린 마음을 다잡으며 손바닥을 펼쳐 얼굴을 숨겼다. 정말로, 오늘따라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
이엘과 일라이저는 함께 돌아온 납치범들을 계속해서 감시했지만, 그들에게선 별다른 이상한 점을 발견하진 못했다. 정말로 이곳으로 돌아올 핑계를 찾고 있었던 건지 되레 납치했던 아이들에게 미안하다며 사죄하기까지 했다.
“약속하마. 정말 성실히 살겠다.”
“아이들을 인질로 잡고 협박했던 건 평생을 사죄하며 갚도록 하세요.”
그녀의 냉랭한 말투에도 남자들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그러겠노라 답했다. 불행 중 다행은 이번 납치 건에 뱀이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납치범들이 잠적했는데도 큰 소동이 없었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은 뱀들도 자신의 영지 복구에 바빠, 다시 성문을 걸어 잠갔다고 했다. 그렇다면 당분간은 안심이지만.
다만 마음에 걸리는 건, 왜 이곳을 습격했냐는 건데…….
아이들이 사라진 직후에 뱀이 이 마을을 어슬렁거렸고 늑대가 처리했다. 납치범들이 있던 산 역시 뱀들이 다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와 일라이저가 그곳에 있던 때를 정확히 노리고 이 마을을 습격했다.
그러나 오드가 간신히 막을 정도로 전력을 다해 놓고도 약탈을 하거나 살생하지 않았다. 물론 그건 인간들 편에선 다행인 일이었지만, 무슨 계략인지 알 수가 없으니 답답할 노릇이다.
납치범들은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과장했다며, 실제로는 뱀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고 진술했다. 불안해할 일라이저와 마을 사람들을 위해 넘어가 주었지만, 이엘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다.
분명 무슨 꿍꿍이가 있을 텐데.
“아저씨들이 돌아와 줘서 다행이야.”
“맞아! 이제 밤에 편하게 잘 수 있잖아.”
그러나 그런 의심은 자신만 하는 게 낫다. 아이들뿐 아니라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은 성인 남자들이 많아진 것에 기뻐했다. 그동안은 노약자가 많은 터라 불침번도 불안했기 때문에 두 발 뻗고 자는 날이 손에 꼽혔다. 이엘은 미미한 미소를 지으며 옆에 선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것만 제외하면 비교적 평안한 날들의 연속이었다. 모두가 웃고 있었지만 이엘은 홀로 긴장을 풀지 않았다. 언제나 이런 날이 이어질수록 방심한 탓에 사건이 터졌으니까.
― 전하. 잠시 나오실 수 있으신지요.
― 무슨 일이지?
― 경비를 나갔던 사람들이 어린아이를 데려왔습니다.
― 아이?
마을의 땅이 점점 커지면서 경비를 서는 지역도 넓어졌다. 그러면서 유목하던 사람들의 유입도 늘었는데,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아이들의 수도 현저히 많아졌다. 오갈 데 없는 아이를 데려오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닌데, 갑자기 무슨 일로…….
― 눈이 없다고 합니다.
일순 이엘은 제 심장이 쿵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 사람들은 의심하지 않는 듯하지만, 저는……. 직접 보시는 게 어떠실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