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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162화 (162/488)
  • 162화

    “농사를 시작했다지. 게다가 축복의 나무를 옮겨 올 계획까지 있다고.”

    그렇다면 이렇게 구질구질한 유랑 생활도 끝낼 수 있다. 원해서 마을을 떠났던 게 아니었다. 다 죽어 가는 땅에서 먹고살기 힘들어 떠났으니 돌아갈 기회가 생긴다면 그 기회를 잡는 게 뭐가 그리 나쁜가. 남자가 피가 섞인 침을 퉤 뱉더니 이엘을 향해 히죽 웃었다.

    “우릴 받아 줘. 상호 간 나쁠 게 없는 제안이잖아.”

    솔직히 남자의 말처럼 전혀 나쁘지 않은 거래였다. 처음부터 마을에 살던 사람들이고 단지 배를 곯아 떠났던 무리이니 돌아온다면 아군이 되겠지. 보호석도…… 내키진 않지만 인간들에겐 보호막이 되어 줄 테고. 하지만 이엘은 이 제안을 가볍게 받고 싶지 않았다.

    “농사는 이제 막 시작했고 축복의 나무도 겨우 활력이 넘치게 됐을 뿐이야. 당신 무리가 합류하면 입이 늘어나게 될 텐데 우리에게 무슨 이득이 돼? 몇 안 되는 식량을 당신들과 나누라니. 기가 차네. 그리고 보호석? 겨우 보호석을 앞세우고 싶은 건가? 여기서 당신들을 전부 죽이고 보호석을 갖고 돌아가는 게 나한텐 더 낫잖아.”

    남자가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젠장, 이런 식이면 안 되는데! 역시 이런 놈들은 일찍 처리를 해야 하는데. 마음 같아선 이 꼬마 놈에게 총이라도 쏘고 싶었지만……. 젠장, 하필 이 녀석이 여길 올 줄이야. 약속한 게 있으니 이놈은 절대로 건드리면 안 된다. 짜증을 잔뜩 삼켜 낸 남자가 애써 웃으며 그녀를 구슬렸다.

    “이봐. 넌 이방인이잖아. 난 일라이저와 이야기를 하고 싶다.”

    “…….”

    “우린 너와 달라. 일라이저가 배를 곯으며 전전하던 때에 거두어 키운 게 우리라고!”

    이엘은 그 말에 시선을 돌려 일라이저를 보았다. 그는 지금 자신과 남자 사이에 오간 말을 알지 못해, 궁금함과 걱정을 담은 낯이었다. 아까도 실탄을 부러 비껴 쐈다. 작은 외상도 입히지 않았다. 여전히 그에겐 인간을 향한 정이 남아 있어서.

    이엘은 한숨 끝에 일라이저를 향해 수어로 간략하게 설명했다.

    ― 그대가 알아서 선택해라, 일.

    ― 저는……,

    ― 나는 이방인이야. 마을을 이끈 건 그대이니 내 의견을 묻지 말고 네 생각대로 해.

    마을은 병력이라고 말할 만한 사람이 별로 없었다. 어린아이들과 노인들, 병을 앓고 있는 약자들이 대다수를 이루고 있었다. 다른 마을과의 교류조차 이엘이 제안하기 전까진 생각도 할 수 없었을 만큼 열악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엘 덕분에 흩어졌던 인간들이 하나둘 교점을 만들기 시작했다. 떠돌이처럼 전전하던 사람들도 마을로 조금씩 밀려들어 왔다. 일라이저도 지금 같은 상황에선 머릿수가 조금이라도 많은 편이 좋다는 것에 동의한다.

    그게 저분께서 황위에 오르시기에도 좋을 것이다.

    ― 거래에 응하겠습니다.

    ― 그래.

    이엘은 일라이저의 뜻을 남자에게 전했다. 남자의 얼굴에 일순 웃음이 걸렸다가 사라졌다.

    *

    “무사 귀환을 축하드립니다, 폐하.”

    “후작이 전리품 분류를 맡아 주게.”

    “예, 폐하.”

    엔리케가 빙긋 웃으며 르네를 향해 공손히 절했다. 르네는 후작의 인사를 대충 받고 모두를 물린 채 침실로 들어섰다. 그는 아직도 제 몸에서 피비린내가 나는 것 같아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매의 소굴을 한바탕 뒤집어 놓았으니 당분간 뱀의 눈을 가려 둘 순 있을 것이다. 르네가 시키지 않아도 지난번 습격으로 인해 매와 척을 진 독수리들은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렸다.

    오랜만에 참전한 르네는 능력을 오래 쓴 탓에 몹시 피곤했다. 그는 눈가를 꾹꾹 누르며 욕실로 향하려다 문득 시야에 걸린 화분을 습관적으로 쳐다보았다.

    ‘르네 님!’

    꽃봉오리는 끝내 만개하지 못했다. 어떻게 피우는지 모르기도 했고, 부러 관심을 끊기 위해 손을 뗀 것도 맞다. 저것만 보면 온 감정이 마구 뒤섞여서. 르네는 말없이 화분을 쳐다보다가 성큼성큼 걸어 창가까지 다가갔다. 시들어 버린 꽃이 처량하기 짝이 없다.

    ‘르네 님.’

    그녀의 목소리가 언제나처럼 제 귀에 울렸다. 저를 향해 웃고 있는 그 미소가 눈앞에 아른거린다.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보세요, 르네 님. 저는 실전에 강합니다.’

    엉망진창으로 춤을 춘 주제에 저를 향해 바보처럼 웃으며 으스댔다. 그때의 감정이 떠올라 르네는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갈 정도로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릴리를 잃고 난 뒤로 그토록 행복했던 적이 있던가. 하루가 지긋지긋할 정도로 긴 나날의 연속이었는데, 순간이 그토록 짧게 느껴졌던 적이 또 있던가.

    괜히 시들어 버린 줄기를 검지로 톡 건드렸다. 네 손길이 닿은 거라 아끼고 싶다가도, 네 손길이 닿았기에 질투가 났다. 옹졸하기 짝이 없는 감정인 걸 알면서도 원래 독수리란 그런 종족이라서.

    ‘꽃은 잘 있습니까?’

    내가 꽃밭을 만들면. 그럼 네가 와 줄까? 늑대의 영지처럼 내게도 화려한 정원이 있다면, 그럼 네가 와 줄 건가?

    그의 검지에 묻어 있던 피가 시든 줄기에 조금 묻었다. 손을 뗀 르네는 눈을 감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매나 올빼미 같은 종족과는 부딪쳐서 좋을 게 없었음에도 손해를 감수하고 급습한 건 전적으로 이엘 때문이었다. 몰려들 수난과 어려움은 전부 내가 떠안으려고.

    끝내 말라 버린 줄기가 힘을 잃고 그대로 흙에 처박혔다. 그 처량한 꼴이 마치 제 모습 같아서 르네는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나타니엘…….”

    그녀가 황위에 오르겠단다. 내가 어떻게 반대를 할 수 있을까. 노아는 자신이 반대하길 은근히 기대한 모양이었지만, 르네에겐 그럴 권리가 전혀 없었다. 고귀한 그녀를 바닥으로 잡아 내린 게 자신이었다. 다시 그곳으로 가겠다는데 내가 무슨 권리로 붙잡겠나.

    르네는 서둘러 흙을 모아 시들어 버린 줄기를 바로 세우려고 했으나 한 번 꺾인 줄기는 허리를 세울 수 없었다. 또 맥없이 탁 꺾여 버리는 줄기를 보고 있노라니 가슴이 서늘해지는 게 느껴졌다.

    네가 남기고 간 네 것인데, 겨우 질투 때문에 이렇게 죽여 버리다니. 어떻게든 흙으로 줄기를 살리려 했지만 그런 걸로 살아날 리 없었다.

    “폐하?”

    밖에서 대기하던 시종장이 문을 두드리며 안으로 들어섰다. 제 왕이 화분을 앞에 두고 서 있는 모습에 잠깐 놀란 표정을 지었다.

    “폐하. 무슨 일이십니까?”

    “……아니다.”

    “목욕물을 받아 두었으니 피로를 푸십시오.”

    “그래. 알았다.”

    시종장이 문을 닫고 나가자 눈이 감겼다. 깊은 한숨을 내쉬며 생각을 정리하던 르네는 이제 쓸모가 없어진 화분을 치우려 다시 손을 뻗었다. 그 순간 또 제 귀에 이엘의 목소리가 들렸다.

    ‘르네 님!’

    그 쾌활하고 밝은 웃음소리가.

    ‘야생화가 맞군요. 너무 예뻐요.’

    세상 그 어디서도 볼 수 없는 그 예쁜 웃음소리가.

    이상하지. 눈을 감으면 언제나 릴리의 목소리가 들렸는데, 이젠 눈을 감으나 뜨나 언제나 네 목소리만 들려. 네 목소리, 네 웃음, 네 숨결. 무엇 하나 나는 잊지 못해. 네 생각만 하면 차갑던 가슴이 뜨거워지는 게 느껴져.

    멍청하게 인간을 사랑해 버리다니. 나는 정말 우매한 왕이다.

    르네는 형편없어진 화분을 치우려던 마음을 접었다. 살리지 못해도 좋다. 너와 연결될 수 있는 부분이 하나라도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 죽어 버린 꽃이 딱 너와 나를 보여 주는 것 같아 버릴 수가 없다. 그러니 처량하게 버릴 순 없다.

    아― 아니. 절대 너일 리 없다. 내가 널 이렇게 만들 리 없잖아. 내 눈앞에서 네가 죽는 걸 어떻게 또 보란 거야. 그러니까 이건 네가 아냐.

    도망쳐라.

    이번엔 꼭 살아라, 나타니엘.

    내가 어떻게든 너를 살릴 테니까. 네 수난과 어려움은 내가 모조리 맞을 테니까. 다시 얻은 새 삶은 너를 위해 온전히 헌신할 테니까. 그러니까 부디 살아다오. 르네는 떨리는 손으로 화분을 끌어안으며 고개 숙여 숨을 죽였다.

    *

    “모두 무사히 돌아왔구나…….”

    희망의 불씨가 꺼져 버린 얼굴들이 이엘과 일라이저를 맞았다.

    “그래. 돌아왔으면 됐다.”

    엉망이었다. 삶의 끝에서 조금의 희망을 맛보았던 게 도리어 화근이었다. 그 작은 희망이 송두리째 뽑힌 자리엔 빠져나올 수 없는 절망의 구렁텅이가 남아 버렸으니까.

    ― 이게 어떻게…….

    할 말을 잃은 건 일라이저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참담한 현장에 펼쳤던 손으로 두 주먹을 바르쥐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들을 구출해 며칠 만에 돌아온 마을은 처참하게 바스러져 있었다. 남자들의 말대로 두 사람이 빠져나간 마을은 허술함을 이기지 못했다.

    “뱀을 막지 못했다.”

    중년의 남자가 중얼거리듯 변명했다. 그동안은 침입을 막기 위해 땅굴을 이동통로로 삼고 숨어 살았는데 인구가 늘어나면서 그것도 어려워졌다. 점점 넓은 땅을 필요로 하면서 더는 숨어 살 수 없게 된 것이다.

    “나자르도 조금 늦었거든.”

    “맞아. 하마터면 부상자가 생길 뻔했어.”

    “게다가 나자르의 결계도 엉망이더라고. 너무 허술해서…… 중간에 뱀에게 뚫렸어.”

    “나자르만 제때 와 줬더라면…….”

    남자가 이엘을 힐끔거리며 계속해서 변명을 이었다. 너희가 없으니 나자르라도 있어야 하는데 그가 늦게 오는 바람에 습격을 당했다느니, 성직자의 자질이 의심이 된다느니. 죄다 그 소리뿐이었다.

    아니. 오드의 결계가 그렇게 허술할 리 없다. 그에게 무슨 문제가 생긴 게 아니고서는. 그들의 투정을 가만히 듣고 있던 이엘이 마을 사람들을 밀치고 들어갔다. 그녀를 쳐다보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이엘은 성전으로 쓰고 있던 허름한 집으로 들어섰다.

    “오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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