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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159화 (159/488)
  • 159화

    “내가 할 테니까 절대 함부로 나서지 마라.”

    “……알겠습니다.”

    정신을 차린 이카르는 금세 표정을 갈무리하고 그녀에게 신신당부했다.

    애당초 위험한 일은 아니었다. 폭탄이 작동하는 데 시간이 꽤 걸리기도 했고, 무엇보다 자폭 목적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었으니까. 그를 끌어들이기 위해 던진 일종의 밑밥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카르는 이엘의 목걸이에 걸린 반지를 쳐다보며 한사코 그녀를 말렸다.

    “역시 늑대들은 교활해.”

    “피차 같아요. 저도 어떻게든 이 악의 굴레를 벗어나고 싶어서 결정한 거니까.”

    “황위 얘기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남자가 말을 하다가 말았다. 다른 건 둘째 치고 내키지 않는 부분은 이거였다. 황위를 잇겠다고? 늑대가 그걸 제안했다고? 아무런 이득 없이 그럴 리 없는 족속인데. 그것도 망국의 황녀를 상대로.

    “널 황위에 앉혀 두고 허수아비로 만들 생각인가 보지.”

    이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침묵을 긍정으로 알아들은 이카르는 다시 미간을 일그러뜨리고 깊은 고민에 빠졌다.

    늑대의 속셈이 대체 뭘까. 늑대들이라면 지금도 충분히 괜찮은 실정이다. 최상급의 포식자. 나쁘지 않은 개체 수. 능력과 실력을 두루 겸비한 왕과 그의 수하들. 굳이 인간을 세워 황위에 올릴 이유가…….

    “아예 이 땅을 먹을 생각인가.”

    중얼거리듯 답을 내린 이카르는 속으로 분을 삼켰다. 비열하지만 썩 괜찮은 조건 아닌가. 유일하게 남은 여자, 암컷. 그 암컷을 차지하는 것만으로도 모든 종족 위에 군림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런 썩어 빠진 생각을 하는 놈들도 있을 것이다.

    그게 늑대의 머리에서 나온 생각이란 건 믿기지 않지만…….

    하지만 멸망만 남은 세상 앞에, 아무리 신념이 바른 늑대라 할지라도 타락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이카르는 떨어진 열매와 약초를 줍는 이엘의 작은 정수리를 물끄러미 보았다. 저 아이가 황위에 오른다고? 숨겨도 모자랄 인간 여자를 보란 듯이 내보인다고? 눈이 뒤집혀 달려들 것이다. 이종족은 후계를 보기 위해. 인간은 유린하기 위해.

    ‘내 목숨과도 같은 아이들이야…….’

    몇 번이나 리카르디스를 찾아갔다. 여전히 미성숙한 우논이었지만, 그는 직계였다. 인간 여자 하나쯤은 충분히 먹여 살릴 수 있었다. 그래서 도망치자고 그녀를 설득했다.

    하지만 카시온이 그렇게 죽고 난 뒤로 반쯤 미친 것처럼 정신없이 살던 그녀가 그러지 못하겠다고 고개를 저었다.

    그녀에게 아이가 생겼단다.

    나는 이 아이들을 버리고 떠날 수 없어. 형형한 눈으로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사랑하는 아이들이라고.

    하지만 그 리카르디스도 결국 몸 바쳐 사랑한 아이들을 두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유일하게 살아 있던 이카르의 소중한 사람이, 그렇게 허무하게 떠나 버렸다. 그녀의 죽음을 끝으로 이카르는 정말 세상에 홀로 남겨졌다.

    그러니 나는 널 지켜야 할 것 같다.

    “힘을 키워서 돌아올게.”

    똑같이 내려앉은 이카르가 열매를 줍던 이엘의 손등을 제 큰 손으로 가만히 덮었다. 최근에 생긴 건지 하얀 손등 위에 보기 싫은 흉터가 자리하고 있었다. 귀하게 자랐어야 할 그녀의 손등이 저만큼이나 엉망진창이었다.

    “늑대로부터, 그리고 다른 어떤 것으로부터.”

    “…….”

    “네가 안전하도록.”

    늘 앞이 캄캄했다. 몇 번의 전쟁 끝에 종족이 전부 흩어졌고 그나마도 몇 마리만 살아남았을 뿐이다. 이카르는 2차 전쟁 때 복수의 끝에 점을 찍은 뒤로는 줄곧 제 종족을 찾는 것에 삶의 목표를 두었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제 백성을 찾아 모으는 게 삶의 유일한 목표였다.

    하지만 이 긴 시간을 살면서 그는 제 종족을 단 한 마리도 만나지 못했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나 혼자 살아남았는지도 모른다. 그 지독한 두려움과 외로움에, 저도 모르게 무의식 속에서 포기를 배워 가고 있었다. 소망의 빛이 꺼져 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냐.

    “그때까지 부디 위험한 일엔 나서지 마라.”

    도망만 치는 삶은 이제 지긋지긋하다.

    *

    이카르는 이엘을 동굴 근처에 내려 주고 떠났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는 그녀의 보호자를 자처했다. 이엘은 예상했던 것보다 더 크게 찾아온 죄책감을 애써 억누르며, 서둘러 동굴 안으로 들어섰다. 눅눅한 동굴 안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던 일라이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녀를 맞았다.

    ―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별일 없으셨습니까?

    걱정을 한가득 안고 달려온 그가 이엘의 곳곳을 살피며 안부를 물었다. 이엘은 괜찮다며 그를 달래 자리에 앉혔다. 손을 뻗어 이마에 얹어 열을 쟀지만 여전히 미미한 열기가 남아 있었다. 이엘은 캐 온 약초 중 하나를 빻아 일라이저의 입에 불쑥 집어넣었다.

    ― 조금만 더 쉬어요. 내일 새벽에 출발하는 게 좋겠습니다.

    ― 그럴 순 없습니다. 지체되면……,

    ― 걱정 마세요. 아이들은 무사합니다.

    조금 전에 스완에게서 보고를 이어 받았다. 역시나 인간들은 아이들을 한데 모아 두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 뱀이 이 일에 엮인 게 틀림없다.

    ― 손은 괜찮습니까?

    고민에 빠진 이엘을 깨운 건 제 앞으로 조심스레 다가온 일라이저의 손이었다. 그는 주저하던 손을 뻗어 이엘의 앞에 불쑥 내밀었다.

    이엘은 그제야 잊고 살았던 제 손등을 확인했다. 조금 전 이카르를 만났을 때, 그가 제 손등을 덮었던 탓인지 그곳에서 살짝 열감이 느껴졌다. 이엘은 일라이저의 손 위에 선뜻 제 손을 올렸다.

    많이 흐려지긴 했지만 역시……. 오래 본 건 아니지만 이엘은 지나치게 자신의 통증에 무감한 경향이 있었다. 습관처럼 제 몸보다 타인의 몸을 우선시 여겼으니까. 그러니 자신이 먼저 살폈어야 했다. 이카르는 안타까움에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 마을 사람들이 당신을 인정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니까 이젠 그렇게 나설 필요 없습니다. 이번 일만 끝나면 마을에서 편하게 쉬도록 해요, 오헬.

    일라이저의 타이름에 이엘은 말없이 미소만 지었다. 이 일이 끝나면 원치 않아도 쉬어야 할 것이다.

    그녀의 마음을 모르는 일라이저는 홀로 속이 바싹바싹 타는 기분이었다. 자신보다 말을 안 듣는 사람은 또 처음이다. 언제나 무리에서 리더 역할을 해야만 했던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이 이랬을까. 필사적으로 저를 말리던 마을 사람들의 마음이 이제야 이해 간다.

    결국 새벽에 떠나기로 결정을 내린 일라이저는 대충 식사를 해결하고 일찌감치 자리에 누웠다. 보초를 서겠다는 그를 말리고 이엘이 대신 동굴 입구에 경비를 섰다.

    조금 전 스완으로부터 늑대들이 전부 집결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마을에 일부라도 남아 있으면 좋겠지만, 역시 늑대들의 관심은 이엘뿐이기에 마을에선 완전히 철수한 모양이었다. 그나마 오드가 남아 있어 안심이지만, 그가 축복의 나무를 찾고 제때에 돌아왔을지가 걱정이었다. 별일 없어야 할 텐데. 밀려드는 걱정을 부러 억눌렀다.

    오슬오슬 몸이 떨렸다. 아무래도 감기에 걸릴 것 같은데. 몸서리칠 정도로 약해 빠진 몸뚱어리를 욕하며 이를 악물고 정신력으로 버텼다. 쓰러져도 여기서 쓰러져서는 안 된다. 적어도 늑대와 합류하기 전까진 안 돼.

    그렇게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눈을 뜨고 있던 이엘의 어깨 위로 무언가 나부끼며 내려앉았다.

    “일?”

    일라이저는 이엘이 말려 놓았던 제 겉옷을 벗어 그녀의 어깨 위로 얹어 주었다. 환자에게 받을 수 없다며 거절하는 이엘을 억지로 앉히고 그녀의 품에서 총을 빼앗아 들었다.

    “일!”

    소리쳐 봤자 들리지 않을 텐데. 이엘이 미간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일라이저가 한쪽 무릎을 꿇으며 시선을 맞춰 내려왔다.

    “내가.”

    “…….”

    “……할게요.”

    그 짧은 단어조차 완성하는 게 어려웠다. 일라이저는 열병을 앓고 난 뒤에 찾아온 뭉그러진 발음이 줄곧 부끄럽다는 생각만 했다. 그래서 말을 할 수 있음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젠 자신이 그 알을 깨고 나와야 할 때였다. 언제까지고 복수라는 이름에 가로막혀 현실을 외면해서는 안 될 일이다. 무엇보다 이건 부끄러워할 일도 아니다.

    ― 일. 무리하지 않아도……,

    “싫어요.”

    “…….”

    “당신이.”

    “…….”

    “아픈 게― 싫어요.”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띄엄띄엄 한 단어, 또 한 단어에 정성을 다해 말한다.

    언제나 저 갈색 눈동자는 힘이 없었다. 삶의 무게에 짓눌려 다소 지쳐 보였는데. 열 기운에 죄 날아가기라도 한 것처럼 생기가 보였다.

    ― 그래도 당신은 아직 다 낫지 않았잖아요.

    그녀의 말에도 일라이저는 완고했다. 기실 다 낫기도 했다. 이엘의 말과는 달리 이 정도면 금방 떨칠 수 있을 것이다. 그녀의 정성 어린 간호에 생사를 오갈 정도로 괴로웠던 호흡이 안정을 되찾았고 한기도 멎었다.

    오히려 그의 눈엔 이엘이 더 걱정이었다. 입술 색이 파랗게 질렸는데도 아랑곳 않고 제 간호를 하는 모습이 못내 마음에 걸린 것이다.

    ― 밤새 나를 끌어안고 있었나요?

    그의 물음에 이엘이 입을 다물었다. 열 때문인지 얼굴이 살짝 발개진 일라이저는 이엘을 제 얼굴색만큼이나 따뜻하게 내려보고 있었다.

    그는 손을 뻗어 이엘의 어깨에 걸쳐 놓은 제 겉옷을 잡았다. 그러곤 조금 더 앞으로 끌어당겨 단단히 여며 주었다. 그 덕에 조금 더 가까워진 두 사람의 숨결이 작은 공간에서 뒤섞였다.

    더운 숨이 엉기는 것이 민망해 이엘이 저도 모르게 눈을 내리깔았다. 일라이저의 숨결이 제 앞머리에서 바스러지는 것 같았다.

    “일, 조금……,”

    “고마워요.”

    그 온기를 기억한다. 어머니의 품이라고만 생각해서 정신을 잃고 매달렸는데도 저를 내치지 않았다. 짐짝밖에 안 되는 자신을 건져 와 밤새 온기를 나누어 주느라 상대방도 지친 낯이었다.

    뼈마디가 불거진 그의 커다란 손이 물기가 조금 묻어 있던 그녀의 뺨을 닦아 냈다. 아까 물을 급하게 마시다 흘린 모양이었다.

    일라이저는 한참이나 그렇게 지척에서 그녀를 바라보다가 손을 떼어 냈다. 그의 손이 떨어지자 이엘이 줄곧 내려뜨렸던 시선을 올렸다. 초록색 눈동자가 가만히 저를 향하니 일라이저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감각에 얼굴이 홧홧해졌다.

    너무, 너무 예쁜 눈동자를 갖고 있다. 황족이라고 다 같은 황족이 아니듯, 녹색 눈을 갖고 있다고 해서 다 같은 색이 아니었다. 일라이저가 가장 가까이서 보았던 황족은 황제와 황녀였다.

    그리고 지금, 이엘이 그와 비슷한 눈동자 색을 갖고 있다.

    만일 저분이 황족이시라면, 난 어떻게 해야 하지……. 그 생각에 열었던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만일 정말 황족이시라면 그가 감히 손을 내밀 수조차 없게 된다.

    신분의 고귀함을 말하는 게 아니라, 그의 가풍이 그러했다. 전쟁이 없었더라면, 황실에 절대적인 충성을 맹세한 아버지를 따라 그 역시 황실기사단에 입단해 황족을 섬겼으리라. 그러니 저분이 황족이시라면…… 나는 불충한 마음을 품을 수도 없게 되겠지.

    ― 일, 불편하면 수어로 해요. 괜찮아요, 저는.

    황자님이실까?

    정말 황족이시라면 황자님이실 테지. 그래. 그러면 말이 된다. 왜 제국을 재건하겠다고 했는지. 황족에 원한이 깊은 늑대를 어떻게 구워삶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영리하신 황자님이시라면 못하실 리도 없다. 그래. 황자님이시면 모든 게 말이 된다.

    하지만 왜일까. 왜 나는 황자 전하가 아니라…….

    ― 일라이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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