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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158화 (158/488)
  • 158화

    “저는 가지 않습니다.”

    “왜?”

    “여기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늑대의 미끼가 되겠다고?”

    분노 섞인 물음에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남자는 몹시 화가 난 듯했다.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하면서도 그녀의 앞이라 억눌러 참는 모양이었다. 한참 만에 이카르가 입을 열어 이엘을 타일렀다.

    “안 돼. 네가 누님의 딸인 이상, 늑대 새끼의 미끼 노릇 하는 꼴을 볼 순 없다.”

    “저는 죗값을 갚는 중이에요.”

    “그딴 죗값 누가 갚으라고 했는데!”

    깊은 숲에 숨어 있던 나무들이 화들짝 놀랄 만큼 쩌렁쩌렁한 고함 소리였다. 이엘도 내심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남자의 짙은 눈동자가 매섭게 저를 향했다.

    “너 미쳤어? 정말 죽고 싶나? 네 어미가 널 어떻게 살렸는데 그렇게 헛되이 목숨을 버려!”

    “만약 제 어머니가 리카르디스 론이 아니었더라면 당신은 나를 살려 뒀을까요?”

    “…….”

    “죗값을 갚을 필요가 없다고요? 내가 어머니의 딸이기 때문에? 당신이 어머니와 모르는 사이였다면, 그때에도 제게 동일한 말씀을 할 수 있나요?”

    삶의 의욕이 하나 없는 얼굴로 저렇게 말을 한다. 이카르는 맞받아치려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가 하는 말이 아예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까. 리카르디스의 딸이 아니었다면 제 손으로 단번에 숨통을 끊어 버렸을 것이다.

    이엘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한 채 이카르의 표정을 주의 깊게 보았다. 여타 왕들과는 달리 제대로 된 승계 수업을 받지 못한 그는, 긴 시간을 홀로 성장하며 완벽하지 못한 성체가 됐다. 이런 식의 계략을 쓰는 게 내키지 않았지만 이엘은 이카르의 도움이 절실했다. 그녀는 단 하나의 종족이라도 더 손에 넣어야만 했다.

    “이카르. 저는…… 제 아버지의 죄를 대신 갚아야 해요.”

    “늑대들이 그렇게 말했나? 네게 죗값을 대신 갚으라고.”

    “…….”

    “좋아. 놈들의 계획이 뭔지 내게 말해. 해치우고 너를 데리고 도망쳐 줄 테니.”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체온이 내려가는 탓에 입술이 새파래져 더욱 안쓰럽게 보였다. 그녀가 작게 미소 짓자, 이카르의 잘생긴 얼굴에 점차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웃는 것마저 제 가슴을 아프게 쑤시는 것 같다. 저 작은 얼굴 위로 리카르디스의 얼굴이 겹쳐 떠올라, 외면할 수 없게 만든다.

    “근 시일 내로 저는 뱀의 영지로 갈 거예요.”

    “뱀?”

    “거기서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게 조건이야?”

    그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카르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늑대와 뱀의 사이가 완전히 틀어졌다는 이야기는 그도 알고 있다. 몇 달 전엔 습격도 있었다고 했지……. 두 종족은 전쟁 이전에도 좋은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적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제 와 사이가 단단히 틀어졌다고…….

    신념이 곧은 늑대와 신념을 꺾어 버리는 뱀.

    “늑대가 뱀과의 전쟁을 준비하는 건가?”

    “조금 달라요. 아무튼 저는 그 일을 마치는 대로……,”

    “무슨 일인데. 말해, 내게.”

    이엘이 조금 주저하듯 말을 아꼈다. 이카르는 속이 타서 몇 번이나 그녀를 채근했다. 무겁게 내려앉았던 그녀의 입술이 마침내 떨어졌다.

    “자폭이요.”

    “뭐?”

    멍한 얼굴로 되물었다. 뭐라고? 그의 물음에 이엘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살 거예요.”

    “이봐, 나타니엘. 네가 지금 무슨 말을……,”

    “살게 되면 속죄받는 거예요.”

    “장난해?!”

    자폭이라니. 대체 그게 무슨……. 이카르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단어였다. 리카르디스의 딸이 죽어? 겨우 살아서 내가 보호하려 했는데 죽겠다고? 그것도 자폭이라고?

    “그러니까 계획이 자폭일 뿐이에요. 거기서 살아난다면 제겐 자유가 주어져요.”

    “늑대의 왕이 그래? 너더러 죽으래? 뱀과 함께 죽으라고 했냐고!”

    씩씩거리며 분을 터뜨리던 이카르가 이어진 침묵에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물론 늑대의 처사가 아주 나쁘단 뜻은 아니다. 늑대들 역시 인간에게 보란 듯이 배반당했다. 그러니 황족의 씨앗인 이엘을 죽이려는 게 이상할 건 없다.

    다만 앞서 말했듯 이건 늑대들의 신념 문제와 반한다. 제 손으로 죽이면 죽였지, 뱀과 함께 죽으라며 인간을 떠밀 늑대가 아니다. 게다가 이엘이 여자임을 알고 있다면……. 적어도 늑대에게 인간 여자는 약자다. 약자를 이용하는 짓은 늑대답지 않다. 그러니까 지금 저 계획은.

    “네가 하겠다고 했군?”

    “…….”

    “하, 네 어미가 너를 어떻게…… 어떻게 키웠는데!”

    “그런 건 하등 상관없어요. 어머니가 날 어떻게 낳았고, 어떻게 키웠는지가 무슨 상관인가요?”

    “너……!”

    “부모의 보호가 필요할 때 전쟁이 터졌습니다. 이유도 모르고 도망쳐야 했고, 살아남자마자 또 살기 위해 숨어야 했습니다. 저라고 아비의 죄를 대신 갚고 싶겠습니까? 제가 왜요. 학대하던 남자와 단지 피가 섞였다는 이유로 죽어야 합니까? 제가 왜요.”

    살고 싶은지, 살고 싶지 않은지. 도무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쏟아 낸다. 이카르는 멍청하게 그녀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목구멍에서부터 말이 막혀 버린 것이다.

    “어머니가 절 어떻게 사랑했는지가, 지금 제게 중요한가요?”

    “…….”

    “그건 어머니와의 추억을 곱씹을 수 있는 당신이나 가능한 얘기죠. 저는 어머니와 함께한 기억이 전부 사라졌어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고요.”

    자꾸만 말이 안에서 먹혀 나오질 않는다. 어쩌면 자신은 죽어 버린 누님과의 추억을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이 컸던 걸지도 모른다. 죄책감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해, 저 아이와 함께 예전의 행복했던 기억을 품고 살아가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준비하고 바라던 삶의 목표가 도무지 보이질 않으니까. 흩어지고 사라져 버린 동족들을 찾는 것에 자신이 없어서. 지난 10여 년의 시간처럼 앞으로 영겁의 시간도 헛되이 사라질 것 같아서. 영영 외톨이처럼 살다가 죽어 버릴까 봐.

    저도 모르게 종족의 우두머리라는 자리를 내려놓고 싶었던 걸지도. 이 버겁고 견디기 힘든 삶의 무게를 떠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전 살 거예요. 말했잖아요. 살면 되는 일이라고요.”

    “…….”

    “괜찮아요. 살 수 있어요. 살 거예요.”

    그러면 이 지긋지긋한 죗값에서도, 죄악감에서도 벗어날 수 있어요. 중얼거리며 초점을 잃어 가는 작은 소녀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성인인데도 이카르의 눈엔 한없이 작은 아이처럼 보였다. 오갈 데 없이 방황하는, 마치 토벌 직후 도망치던 제 어린 날처럼…….

    “말해. 내가 뭘 해 주면 되는지.”

    “이카르.”

    “대신 죽어 줄 순 없어. 나는, 해야 할 일이 많아. 그것 말고. 어떻게 하면 네가 사는데. 네가 살기 위해서 난 뭘 하면 되는데.”

    “그러지 않아도……,”

    “네가 죽는 건 안 돼.”

    “…….”

    “부탁이다. 살아 줘.”

    이엘은 그의 녹진한 말투에 입을 다물었다. 남자는 한참이나 그녀를 바라보더니 눈을 깊게 감으며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무언가 몹시 괴로워하는 모양새였다. 한참이나 그렇게 머뭇거리던 이카르는 눈을 뜨고 조심스레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미세하게 떨리는 손끝을 이엘은 보았다. 그리고 그의 떨리던 손이 그녀의 손 바로 앞에서 멈췄다가 뒤로 사라지는 것까지도.

    “미안해. 네게서 어머니를 빼앗아 가서.”

    무슨 의미일까. 어머니를 빼앗다니. 대체 어머니는…… 재규어와 얼마나 엮여 있던 걸까. 불안에 휩싸인 이엘이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다.”

    그게 당신의 잘못이 아니잖아요. 이엘이 그렇게 눈빛을 보냈지만 어느덧 이카르의 검은 눈동자가 축축하게 젖어 간다.

    왜? 왜 당신이 우는 거야? 그러나 물어볼 수 없었다. 어떤…… 알고 싶지 않은 어떤 진실이 밝혀질까 겁이 나서. 본능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러니까 말해. 내가 뭘 해 줄까?”

    “…….”

    “그 일을 마치면 네가 숨 쉴 만한 곳을 만들어 줄게. 약속해.”

    아니. 그 일이 끝나면 나는 또 숨 쉴 곳을 잃게 될 텐데.

    맥없이 떨어졌던 이카르의 고개가 위로 올라왔다. 축축하게 젖은 눈동자가 가만히 저를 응시한다. 다소 절박하게 느껴질 정도로 물기가 어려 있는 검은 눈동자에 이엘의 가슴 한구석이 따끔따끔 아파 왔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정말 아주 조금만 이용하려고 했다. ‘이용’이라는 단어를 쓸 때부터 양심이 찔렸지만, 그래도 조금만. 그가 제 어미에게 좋은 감정을 품고 있는 상대라는 걸 알았을 때부터, 조금만 이용하려고 했다.

    하지만 남자의 감정의 깊이가 이렇게 깊을 줄은 이엘도 예상하지 못했다. 죄악감이 밀려왔다.

    “그러니까 네 어머니를 미워하지 마. 그 사람은…… 리키는 널 정말 사랑했단 말이야. 네가 미워하면 리키가 너무 불쌍해. 가여워. 그러니까 미워하지만 말아 줘.”

    부모도, 친지도 잃은 아이 둘이 서로 부둥켜안고 엉엉 우는 것 같다. 의지할 데 없이 성인이 되어 버린 미성숙한 두 사람이 한참이나 서로를 쳐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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