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그리고 마침내 이엘의 손목이 덜덜 떨릴 때가 되어서야 일라이저의 입에서 물이 푸르륵 터져 나왔다.
“일라이저!”
여전히 귀가 먹먹했다. 천근만근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려 시야를 확보하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일렁거리는 무언가가 자신을 바라보며 연신 입을 벙긋거리고 있었지만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일라이저는 다시 눈을 감고 깊은 잠에 빠졌다. 온몸이 열에 취한 것처럼 뜨겁게 타올랐다. 꿈속에서 자신은 아주 어린아이였다. 몸이 뜨거워 엉엉 우는 어린 일라이저의 곁엔 언제나처럼 다정한 어머니와 사랑스러운 누나들이 함께였다.
‘일, 괜찮아. 열은 금세 내릴 거란다.’
‘얼른 나으면 축제에 데려가줄게.’
‘언니가 과일 사탕 사 준대. 어서 털고 일어나자, 일!’
어머니가 그를 따뜻하게 안아 주었다. 뜨겁고 차갑기를 반복하는 제 몸을 어머니가 끌어안아 주었다. 분명 꿈이라는 걸 알고 있는데도 정말 제 몸엔 작은 온기가 찾아온 것처럼 느껴졌다. 일라이저는 살기 위해 제 품에 들어온 온기를 꽉 끌어안았다. 여기서 죽으면 안 돼. 그 자식의 목을 내 손으로 동강 내기 전까진 죽을 수 없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여전히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허덕이던 일라이저가 간신히 눈을 떴다. 어머니인지 누구인지 모를 존재가 자신을 끌어안고 있었다. 보석처럼 예쁜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며 연신 입을 벙긋거렸다. 왠지 모르게 눈물이 왈칵 치솟아 일라이저는 입술을 깨물었다.
“……어, 어머니…….”
이엘은 눈물로 얼룩진 채 추위에 몸을 덜덜 떠는 일라이저를 안쓰럽게 쳐다봤다. 아직도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모양인지 헛소리를 내뱉고 있었다.
대충 장작을 구해 와 불을 지폈지만 좀처럼 온도가 오르지 않는 탓에 서둘러 일라이저의 옷을 벗기고, 자신 역시 속옷만 남겨 두고 옷을 벗었다. 다행히 스완과의 계약 덕에 몸은 물에 젖지 않았고 옷도 금세 말랐다.
이엘은 바싹 마른 제 옷으로 그를 잘 덮고 체온을 나눠 주기 위해 일라이저를 끌어안았다. 그러나 남자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일라이저, 괜찮아요. 안심해도 돼요.”
그가 정말 루시우스 러셀의 아들이라면…….
그 생각을 한 뒤로 그녀는 남자를 보는 게 고통스러웠다. 루시우스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르네에게 맞서다 그의 칼에 목숨을 잃었다. 끝끝내 이엘을 지키기 위해 퇴로까지 확보해 주었지만 스스로의 마지막은 허망하게 스러졌다.
부채감.
모두가 그녀에게 느끼는 부채감을, 자신은 일라이저에게 느끼고 있었다. 당신의 아버지가 나와 이온에게 보여 주었던 그 숭고한 희생을 나는 잊을 수가 없어. 나에겐 너무 소중한 스승님이었으니까.
황제의 명령으로 이온만을 데리고 탈출했던 그 남자는 이온의 명령으로 제게 되돌아왔다. 엉엉 울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그녀에게 미안하다며 진심으로 사죄했다. 레타의 도둑들에게서 자신을 지켜 주고 불구덩이가 된 황궁에서 구해 주었다. 그리고 이종족으로부터 자신을 지켜 주다 목숨까지 잃었다.
그리고 루시우스와 르네가 나누었던 대화들을 어렴풋하게 기억한다. 이엘은 참담함에 한숨을 속으로 삼켰다.
어쩌면…… 르네의 여동생을 러셀 경이…….
“괜찮아요. 조금만 더 자고 일어나요.”
이엘이 일라이저의 젖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넘겨 주며 다시금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모닥불이 타는 소리에 맞춰 그의 너른 등을 손으로 다독거렸다.
자신보다 두어 살 정도 많을까. 그러니 일라이저 역시 전쟁이 터졌을 때 사위 분간도 못 하는 어린아이였을 것이다. 그 어린 귀공자가 이렇게 초라하게 살아남을 때까지 얼마나 많은 시련과 고통이 있었을지. 자신만큼 다난한 세월이었으리라.
일라이저는 좋은 사람이다. 단편적으로 꿈에 의지해 그를 선택한 게 아니라, 인품과 성품을 비롯한 모든 게 훌륭한 남자였다. 거기에 명석한 두뇌는 말할 것도 없었고. 그녀가 요구하는 게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할 정도로 눈치도 빨랐다. 이엘은 제 목에 걸린 어머니의 반지를 가만히 만지작거리며 눈을 감았다.
아무래도 이 남자를 놓쳐서는 안 될 것 같다.
*
이엘은 뜬눈으로 일라이저의 곁을 지켰다. 새벽이 지나고서야 남자와 제 체온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이엘은 일라이저가 눈을 뜨기 전에 서둘러 자신의 옷을 입고, 그에게도 마른 옷을 대충 입혀 주었다. 워낙 감기에 잘 걸리는 터라 몸이 으슬으슬 떨렸지만 정신력으로 버텨 냈다. 여기서 자신까지 쓰러지면 곤란하다.
옆에서 바르작거리는 기척이 느껴져 일라이저가 눈을 겨우 떴다. 누가 때리기라도 한 것처럼 온몸이 욱신거렸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땅을 짚고 몸을 일으켜 세운 그의 앞에 검은 머리카락이 촤르륵 떨어져 내렸다. 바로 지척에 이엘의 얼굴이 다가와 있었다. 일라이저는 움찔하며 눈을 들어 그녀와 시선을 마주했다.
― 여기서 조금만 기다려요. 먹을 것을 구해 올게요.
―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혼자는 위험해요.
― 아직 미열이 있어요. 움직이면 안 됩니다. 걱정 마세요. 제 몸 하나는 건사할 수 있으니까요.
이엘을 혼자 보내는 게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말대로 지금의 자신은 짐짝밖에 되지 않는다. 결국 그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엘은 떠나기 전 일라이저의 안색을 확인하며 손을 뻗어 그의 이마 위에 얹었다.
얼굴이 홧홧해졌다. 아직 열이 남았나? 중얼거리는 이엘을 쳐다보며 일라이저는 손을 꾹 말아 쥐고 말았다. 심장이 쿵쿵 세차게 뛰었다. 그녀의 손목에서 뻗어 나온 미세한 체향은 줄곧 제 코에 머물러 있던 것과 같았다.
……그렇다면 꿈이 아니었구나. 저 소년이 밤새 자신을 안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 생각을 하니 부끄러움과 수치가 동시에 몰려왔다. 이 얼마나 꼴사나운 일인지…….
― 일. 괜찮겠어요? 누워 있어요. 금방 올게요.
― 네. 죄송합니다. 폐를 끼쳐서…….
― 전혀요. 괜찮아요.
새빨갛게 변한 일라이저의 얼굴을 걱정스레 바라보던 이엘은 황급히 자리를 벗어났다. 동굴 입구를 잘 막아 두고 장총을 등에 제대로 고쳐 멨다. 웬만하면 총을 쓰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는데.
여전히 총을 사용하는 게 불안하다. 늑대의 영지에서 앤디의 도움으로 노력해 봤지만, 총은 여전히 불안했다. 그러니 쓸 일이 없기를 바란다. 그 생각을 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먹을 만한 열매나 해열에 좋은 약초를 찾느라 바쁜 그녀의 머릿속에 스완이 찾아들었다.
― 오헬. 어떻게 된 거야! 중간에 사라져서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지금은 괜찮아? 괜찮겠지. 내 목숨이 아직 붙어 있으니까. 어디야? 대답 좀 해!
다시 수다쟁이로 돌아왔네. 이엘이 작게 웃으며 멀쩡한 자신의 상태를 전했다. 그녀의 신호에 스완이 안도한 듯 몇 번의 한숨을 쉬며 농담을 던졌다.
이엘은 스완의 생각에 대꾸해 주면서도 목적을 잊지 않았다. 먹을 수 있는 버섯과 열매를 잔뜩 따서 품에 한 아름 안았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 눈치챈 뱀이 있어.
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 네 냄새가 강하게 나기 시작했어. 걱정하지는 마. 근처를 배회하던 뱀들은 늑대가 모조리 씹어 먹어 버렸거든. 아마 로빈인가 뭔가는 모를 거야. 그리고 눈치챈다고 해도 확신하진 못할 거야. 늑대처럼 후각이 예민하지 않으면 알아채는 데도 시일이 걸릴 거래.
무서운 소릴 예쁘게 하네, 스완은. 이엘의 실없는 농담에 스완이 또 몇 번 툴툴거렸다. 그녀는 스완의 목소리를 들으며 다시 허리를 숙이고 버섯을 땄다. 여기까진 예상한 결과니까 큰 걱정은 없다.
― 정말 냄새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어? 전에 먹던 약은? 다시 못 만들어?
응, 시간이 오래 걸린대. 괜찮아, 이런 건 하등 상관없어.
― 여유로운 소리 하지 마. 나는 정말 죽겠단 말이야.
절대 너 안 죽게 한다니까? 이엘의 중얼거림에 스완이 바락 소리를 질렀다. 내가 지금 내 목숨 때문에 이래?! 그의 한마디에 이엘이 또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웃을 수 없는 상황인데도 웃음이 나오는 게 신기하다. 귀밑으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이 거추장스러워 대충 쓸어 올리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 당분간은 안심해. 뱀의 영지가 쑥대밭이 됐거든.
왜? 이엘이 스완의 말에 대꾸해 주며 천천히 시선을 돌리는데 저 멀리 그늘진 그림자를 보고 멈칫했다. 움직임을 최대한으로 죽이고 자세를 낮춘 이엘은 등에 멨던 총을 품으로 끌어 내렸다. 누구지? 흐릿해지는 시야를 간신히 붙잡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 레온인가 뭔가. 그쪽 왕이 뱀의 눈을 돌리겠다고 습격했어.
전쟁을 바란 게 아닌데. 씁쓸하지만 덕분에 한숨을 돌리긴 했다. 며칠 전에 스완이 전하기로는 레온이 몹시 화가 났다고 했는데. 자신이 인간들의 마을에 숨어든 것에 큰 반발을 했다고 한다.
그래도 그는 무척 자상하고 다정해서, 역시나 나를 외면하지 못한다. 총을 쥔 손에 힘을 더하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 그리고 독수리의 왕도. 매의 둥지를 역습했다고 했어. 완전히 뱀의 시야를 차단할 생각이래.
스완은 혹시나 이엘이 걱정할까 덧붙인 말들이었지만, 되레 이엘은 그 말에 마음이 무거웠다.
― 그러니까, 내 반쪽. 걱정 말고. 응? 늑대가, 아니. 늑대의 왕이 널 항상 지켜보고 있어. 네가 머무르는 그 인간 마을. 거기에 수백 마리의 늑대가 널 지키려고 뜬눈으로 감시하고 있어. 그러니까 걱정 말고 넌 네 자신만 생각해. 응?
스완이 나더러 내 몸을 생각하라고 하는 날이 오다니. 그 이기적이던 백조가 말이다. 이엘이 나지막이 웃었다.
바스락. 저 멀리 서 있던 형체가 나뭇잎을 밟으며 점차 거리를 좁혀 오기 시작했다. 이엘도 총구를 그쪽으로 조준했다.
― 내 반쪽. 보고 싶어. 이건 진짜야. 냄새나는 늑대들 말고 네가 보고 싶어.
투정을 부리는 스완을 잘 달랬다. 이엘은 급하게 스완과의 연결을 끊고 온 신경을 한곳에 집중시켰다.
내키진 않지만 쏴야만 한다면 해야겠지. 마른침을 삼키며 한쪽 눈을 감아 초점을 맞췄다. 슈프를 구하기 위해 인간들에게 총을 쐈던 그날 이후로 총을 제대로 잡아 보질 못해서 손끝이 살짝 떨렸다. 방아쇠를 당기기 직전, 숨을 깊게 내쉬던 이엘이 갑자기 눈을 크게 뜨더니 총을 내려놓았다.
형체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감시가 너무 심해서 따돌리는 데 애 좀 먹었어.”
심드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엘이 일어나 그의 흔적을 찾으려 했지만 작아진 형체는 도무지 보이질 않는다.
“이카르?”
그녀의 부름에 이카르가 웃었다. 이내 이엘의 코앞에서 커다란 재규어가 쏙 나타났다. 나타났다기보다는 어느 틈에 가까워져 크기를 다시 돌린 거겠지만. 그리고 그가 곧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왜, 나타니엘?”
자연스럽게 제 이름을 불렀는데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떠나기 전과 달리 병색이 완전히 사라진 남자는 그녀를 향해 미미한 미소를 지었다. 여전히 웃을 때마다 햇빛이 그에게만 쏟아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상처로 보일 정도로 깊은 보조개가 그를 더 인상적으로 만들었다.
이카르는 정말, 결이 좋은 백금발이 아름다운 미소와 몹시 잘 어울리는 찬란한 미남자였다.
“늑대들에게서 널 구출하려고 왔어.”
“…….”
“아무래도 네가 내 사정거리 내에 있어 줘야 할 것 같거든.”
말투나 표정, 행동에서 그의 배려가 보였다. 자신을 아르세니온으로 착각할 때완 상이한 태도였다. 이카르는 마치 쉽게 깨질 유리처럼 대하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녀가 겁을 먹지 않도록.
이엘은 멍하니 이카르를 바라보다가, 그와 헤어졌던 마지막 날을 떠올리며 안부를 먼저 물었다.
“몸은……,”
“그건 내가 묻고 싶은데. 너 열나는 것 같아.”
그는 거리낌이 없었다. 성큼성큼 다가와 이엘의 이마 위에 제 이마를 붙였다. 오랜 시간을 야생에서 자라 예법과 거리가 멀었다. 뜨겁군. 걱정인지 귀찮음인지 모를 탄식이 그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젊은 남녀가 서로 이마를 맞대고 있는 모습은 일상적인 일이 아니었다. 만약 여기가 수백 마리의 늑대들이 지켜보던 인간 마을이었다면, 이카르는 갈기갈기 찢어졌을지도 모른다.
그건 이엘도 마찬가지였다. 평소였다면 밀어냈겠지만 이엘은 긴장이 풀리며 찾아온 탈력감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더운 숨을 내뱉으며 비틀거리는 이엘을 부축하다시피 잡아 세웠다. 괜찮다며 거절하는데도 이카르는 막무가내였다.
“걷기 힘들면 내 등에 올라타.”
“아닙니다. 괜찮아요.”
“쓰러질 것처럼 비틀거리면서 뭐가 괜찮아.”
“너무 놀라서 그래요. 하마터면 당신을 쏠 뻔했잖아요.”
그녀의 말에 이카르가 총을 힐긋 쳐다봤다. 한때는 황제의 위용을 떨치던 자랑스러운 방패였던 시절도 있었다. 몸의 크기를 자유자재로 변화시킬 수 있는 재규어는 그 어떤 총과 검 앞에서도 무적이었다. 흉포한 바다의 것들조차 가볍게 제압할 만한 공격력도 갖추고 있었다.
차라리 처음부터 그 전투력으로 인간에 대항했다면 이토록 허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모든 이종족이 그러했듯, 그들은 인간들의 방패를 자처하며 공생을 도모했다. 그리고 돌아온 결과는 멸족이었다.
공생? 황제는 공생이 아닌 희생을 강요했다. 그리고…….
‘……내가 지킬게. 반드시 탈출시킬 거야. 그러니까…… 그러니까 이카르, 제발. 제발 너만이라도 도망치렴.’
아랫입술을 깨물며 치밀어 오르는 울분을 삼켰다. 인간을 사랑했다는 이유로, 너무 많은 희생을 감당해야 했다.
“이카르?”
리카르디스와 비슷한 목소리를 가진 여자가 제 이름을 불렀다. 인간 여자가 몰살당했기 때문에 당연히 그녀의 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 보니 그렇게 생각했던 게 우스울 정도로 리카르디스를 빼다 박은 딸이다.
그렇다고 그녀만을 오롯이 닮은 건 아니었다. 살인 욕구를 불러일으킬 만큼 끔찍한 선황의 얼굴도 적절하게 섞여 있다.
웃음이 났다. 양가감정이 들게 만드는 빌어먹을 얼굴을 바라보며, 남자는 그 어떤 마음도 먹지 못했다.
“이카르. 괜찮아요?”
“그래서 배신도 못 하겠네.”
“네?”
아직도 눈만 감으면 귓전에서 리카르디스와 카시온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맴돈다. 방계 쪽 혈통이었던 카시온은 토벌 전쟁이 일어나자마자 적통이었던 자신의 탈출을 도왔다. 당시 어린 우논에 불과했던 이카르는 어떻게든 같이 가자며 울고불고 난리를 쳤지만 카시온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카시온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 토벌의 진짜 목적이 무엇이었는지를.
론 후작가의 영애는 아버지의 서재에서 토벌 계획을 엿듣자마자 재규어들을 피난시키려 갖은 노력을 했지만, 갓 성인이 된 영애가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었다. 그녀는 사랑하는 남자의 종족의 멸망을 막기 위해 최선의 선택을 했지만 황제는 그녀와의 약속을 저버렸다.
‘리, 리키! 어, 어떡해……. 어떡해! 아버지가…… 혀, 형님이……!’
‘잘 들어, 이카르. 너라도 도망치렴. 너라도 살아야 해. 알겠니?’
‘하, 하지만……!’
‘카시온을 쉽게 죽이진 않을 거야. 괜찮아. 차라리 그가 잡힌다면 내가 수를 쓰기 쉬워. 괜찮아, 이카르. 그러니까 너라도 도망쳐.’
리카르디스는 카시온과 합치점을 찾았다. 무리를 반 이상 잃고 형편없이 도망치는 재규어를 위해 숨을 곳을 마련해 주었다. 황후가 된 뒤로도 그녀는 할 수 있는 온 힘을 다해, 다 죽어 가는 재규어 무리를 비호했다. 황제의 눈을 가려 그가 찾을 수 없도록 헌신했다.
물론 그것도 1차 전쟁 때는 무의미했지만.
“이카르?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외면할 수 없다. 리카르디스의 딸이 저기 저렇게 살아 있다는데. 내가 어떻게 그녀의 딸을 외면하겠는가? 오히려 잘됐다. 그녀의 딸을 만난 것에 신께 진심으로 감사했다. 이 끔찍한 세계에서 내가 저 아일 지켜야 한다.
어쩌면 이카르는 꺼져 가는 제 삶의 목표를 되살릴 희망이 없어, 우연히 마주한 그녀의 딸에게 억지로 매달리는 건지도 모른다. 자신이 살기 위해 저 아이를 살려야 한다는 일념으로.
“나타니엘. 시간이 없다.”
“무슨……,”
“네가 머무를 만한 곳을 만들어 놓느라 시간이 좀 오래 걸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