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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156화 (156/488)
  • 156화

    “불가피한 일이야.”

    “불가피? 아니. 그렇지 않아. 네 영지에 꼭꼭 숨겨 놓으면 되잖아.”

    “…….”

    “말했지. 이번엔 절대 안 된다고.”

    어머니 같은 존재였던 루나가 죽어 버렸던 그때가 여전히 눈앞에 선하다. 그렇게 또 허망하게 죽도록 놔둘 생각은 없다. 그땐 가진 게 없어서 눈 뜨고 당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금이라면 반드시 지킬 수 있다. 꼭꼭 숨기면 된다. 곰과 같은 이종족 여럿과 동맹을 맺어 수적으로 우세해지면. 그깟 인간들 따위가 뭘 어쩌겠는가.

    그깟 뱀 따위 다 먹어 버리면 되는데.

    “우리가 먼저 선수 치자.”

    타오를 것처럼 뜨거워진 레온의 눈동자가 노아를 종용했다. 위협이 된다면 다 먹어 치우면 되잖아. 자신들은 포식자 중에서도 최상위 종족이다. 뱀이 말썽이라면 연합해 모조리 먹어 버리면 될 일이었다. 그의 말을 잠자코 듣던 노아가 긴 침묵 끝에 운을 뗐다.

    “재규어를 기억하나?”

    “갑자기 무슨 재규어 이야기야?”

    “한 종족이 사라졌을 때, 이 세계가 어떻게 됐는지. 기억 안 나?”

    “…….”

    “뿐만 아니라 그 이전에 있었던 뻐꾸기 대학살은.”

    재규어가 일부 개체만은 살아남은 것에 비해 뻐꾸기를 비롯한 몇 종족은 아예 전멸했다. 그때 먹이사슬이 크게 흔들리며 연쇄적으로 몇 종족이 또 사라졌다.

    “뱀을 전부 죽일 셈이야?”

    “그럼 어쩌려고? 로빈이 오헬을 노린다며. 뱀을 살려 두면 언제까지고 그 애한테 집착할 텐데?”

    “오헬은.”

    말을 차분히 잇다가 말고 노아가 침묵했다. 그 역시 내키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한참 만에 노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오헬은 뱀도 제 편으로 만들 생각이다.”

    “하. 무슨 수로?”

    “……그걸 모르겠다.”

    “노아! 그게 지금 무슨……!”

    “나도 초조해. 그래서 네 도움이 절실하다, 레온.”

    노아는 스스로를 조롱했다. 자신은 입만 산 놈이다. 앞에선 그러겠노라 담담하게 말했지만 여전히 속은 썩어 문드러질 것만 같았다. 자신이라고 레온과 같은 생각을 왜 안 했겠는가. 할 수만 있다면 이엘을 제 영지에 숨겨 아무도 찾지 못하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의 반려가 그걸 원치 않는단다. 그런 삶을 살고 싶어서 땅을 올라온 게 아니란다. 땅 아래서, 그렇게 바라던 삶이 그게 아니란다.

    자신은 이엘을 땅 아래로 밀어 넣은 장본인이었다. 죽은 듯이 살았던 그녀의 10년을 무엇으로도 보상할 수 없었다. 햇빛 한 점 없는 축축하고 어둑한 곳에서 성장기를 보내느라 뼈에 문제가 생겼다고 했다.

    그녀의 신분도, 성별도, 건강도, 심지어 생명까지도. 모조리 앗아 버렸는데 내가 어떻게 반대를 해.

    그토록 원하던 삶이 저런 거라는데. 내가 무슨 수로.

    “그러니까 네가 좀 도와줘, 레온.”

    “…….”

    “뱀에게서 그녀를 반드시 되찾아 올 거니까.”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반드시 되찾아 와야 하니까. 노아는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몇 번이고 되뇌었다.

    *

    ― 정말 괜찮습니까?

    ― 네. 고마워요, 일.

    이엘이 웃으며 그가 건넨 목걸이를 받았다. 아무것도 없던 어머니의 반지를 세공해 홈을 파고 그 안에 검은색 돌을 끼워 넣었다. 밋밋해 보였던 반지가 언뜻 값비싼 보석으로 탈바꿈한 듯했지만 실상은 전혀 아니었다. 일라이저는 반지를 주면서도 불안함에 미간을 좁히고 있었다.

    ― 위험할 텐데, 계속 차고 계실 건가요?

    ― 그럼요. 언제든 써야 하니까요.

    ― 오헬. 제가 당신 손을 잡은 건 위험에 빠뜨리고자 함이 아닙니다.

    ― 알고 있어요. 당신이 걱정할 일은 없을 거예요, 일.

    이엘은 만족스러운 미소로 일라이저를 향해 살짝 고개 숙여 감사를 표했다. 그는 정말 대단한 인재였다. 이엘이 생각한 것 이상으로. 그래서 반드시 그와 손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무 욕심 없이 선하고 바른 사람을 찾는 건 어려운 일이니까.

    ― 오늘은 강을 타고 서쪽 경계 지역으로 가요.

    ― 궁금한 게 있습니다.

    ― 물어보세요.

    ― 늑대들이 도움을 주고 있습니까?

    마을 사람들은 이엘이 늑대들에게서 쫓겨난 것이라 추측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라이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시시때때로 마을 주변을 멍하니 쳐다보는 그녀의 태도만 봐도 그게 아님을 알 수 있다. 게다가 늑대들이 얼마나 이엘을 챙기는지도, 그는 그들의 영지에서 잘 보고 왔으니까.

    ― 네, 맞아요. 추격대가 꾸려져 흔적을 찾았어요. 어제 산 어귀로 접어들었다고 하더군요. 이대로 진입하면 늑대들과 합류해서 아이들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 솔직히 저는 당신이 왜 이 일에 열심인지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오헬. 미안해요. 당신의 호의를 거절하는 건 아니지만…… 잘 모르겠어요.

    ― 저는 무척 이기적이에요, 일라이저.

    ― 네?

    ― 저는 제 욕심을 위해 움직이는 거예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의 연속이다. 일라이저가 인상을 찌푸리며 표정으로 되물었지만 이엘은 미미한 웃음을 지으며 시선을 돌렸다. 늑대들에게도 말했지만 이건 자신이 성자와 같은 마음으로 행동하는 게 아니었다. 정말 지독하게 이기적이고 이기적인 마음 때문에.

    언젠가 내 행동으로 인해 누군가는 울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이엘은 그 생각에 마음 한구석이 씁쓸해졌다.

    짐을 꾸려 마을을 빠져나온 두 사람은 빠른 걸음으로 제도를 벗어났다. 울창한 숲에 진입했을 땐 이미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이었다. 그럼에도 쉬지 않고 내달려, 결국 하루 만에 거대한 강기슭에 도착했다. 아직 강을 건너 서쪽 지역으로 가려면 한참 더 걸리겠지만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 속도다.

    ― 일. 오늘은 여기서 야영을 해야겠어요.

    ― 아뇨. 강을 건너는 건 어떨까요? 힘드십니까?

    ― 그럴 리가요. 저는 괜찮지만 당신의 다친 발이 걱정이에요.

    중상은 아니었지만 하루를 쉬지도 않고 내리 달리느라 피로가 쌓인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일라이저는 고개를 흔들며 눈을 들어 넓은 강폭을 주시했다. 아무리 늑대가 추격하는 것에 성공했다고는 해도 자신의 눈으로 보기 전까진 안도할 수 없다. 피는 안 섞였지만 그에겐 소중한 가족이었다.

    일라이저는 고개를 돌려 이엘을 슬쩍 보았다. 차가운 강물을 두 손에 담아 세수하듯 땀을 닦아 내는 모습이 자신보다는 덜 지쳐 보였다. 이전에 있었던 몇 번의 추격 때도 느꼈지만 이엘은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내면이 더 강하고 단단한 사람이다. 되레 자신이 이엘에게 짐이 되는 것 같았다. 그러니 더는 속도를 지체해서는 안 돼.

    ― 가요. 야영은 강을 건너서 하는 게 어떨까요?

    ― 괜찮겠어요, 일? 무리하지 마요. 조급할수록 일이 더 틀어지니까요. 아이들은 무사할 거예요. 저를 믿어요.

    스완은 아이들이 무사하다고 그녀에게 전해 주었다.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마치 추격대를 기다리는 것 같다고 했다. 아이들은 그저 미끼일 뿐이고 자신과 일라이저를 기다리는 건 아닐까. 차라리 그렇다면 다행이다. 적어도 아이들의 안전은 어느 정도 확보된 거니까.

    그게 아니어도 추격에 성공한 늑대가 주시하고 있기도 하니 큰 걱정은 되지 않았다. 여차하면 늑대들이 먼저 공격을 하겠다고도 했고. 그러니 지금은 조급함을 버리고 안전하고 정확한 길을 걷는 게 낫다.

    하지만 일라이저가 한사코 거절했다. 자신 때문에 추격 속도가 느려지는 것을 싫어하는 모양이었다. 결국 두 사람은 밤을 타, 강을 건너기로 합의를 보았다.

    ― 제가 앞서 건널게요. 조심히 따라와요, 일.

    그녀의 말에 일라이저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이었다면 물을 건너는 건 꿈도 못 꿨을 일이었지만 지금은 스완과의 계약 덕분에 어렵지 않았다.

    젖지 않는 제 몸을 확인하듯 쳐다보던 이엘이 먼저 강에 발을 넣고 천천히 물살을 헤치며 나아갔다. 강의 폭은 상당히 넓었지만 물살이 세지는 않았다. 이대로라면 무리 없이 건널 수 있을 것이다.

    앞서 건너며 중간중간 뒤를 돌아 일라이저를 확인했다. 그는 그 단단한 몸으로 물살을 잘 버티며 그녀의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이 좋지는 않았다. 역시 발목에 무리가 간 건 아닐까. 이엘은 불안함에 자꾸만 뒤를 돌았다.

    ― 괜찮아요. 앞을 봐요, 오헬.

    수어 대신 입을 크게 벌려 입 모양으로 그녀를 안심시켰다. 하지만 일라이저 역시 조금씩 느껴지는 부하에 고통을 삼키며 참아 내고 있었다. 아무리 물살이 약하다고는 하나 그걸 거스르며 건너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어떻게든 견뎌야 하는데…….

    이엘이 완전히 강을 건너고 뭍으로 올라서자마자 뒤를 돌았다. 그녀는 재빨리 들고 왔던 밧줄을 풀어 물속에 있는 일라이저를 향해 던졌다.

    “일! 잡아요!”

    소리를 내질렀지만 일라이저는 듣지 못했다. 일순 제 머리가 핑 도는 느낌을 받고 뒤로 주춤했다.

    눈앞이 흐려졌다. 무언가 들리는 것 같았는데, 무언가 보인 것 같았는데……. 그러나 그게 뭔지 깨닫기도 전에 눈앞이 아득해졌고, 순식간에 들이닥친 급류에 휩쓸려 버렸다.

    *

    ‘일라이저!’

    ‘일, 정신 차려!’

    ‘일!’

    어머니와 누나들의 목소리가 귀에 들렸다. 환청이겠지. 소리를 못 듣게 된 지 10여 년이 됐으니 진짜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알면서도 넋이 빠지는 걸 막지 못했다. 스스로 부정했지만 사실은 잃어버린 청각을 간절히 원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렇게 환청까지 듣게 된 거고.

    환청에 시달리던 일라이저는 일순 누군가 제 다리를 잡아 바닥으로 끌어당기는 느낌을 받았다. 분명 수심이 깊지 않았는데 어느새 머리끝까지 물에 잠겨 죽어 가고 있었다. 뒤늦게 알아차리고 어떻게든 살기 위해 바동거렸지만 오히려 더 깊게 내려앉을 뿐이었다.

    “일라이저!!”

    이대로 죽으면 안 되는데. 아직 난 그 개자식을 보지도 못했는데……. 미련스레 잡고 있는 생의 목표마저 눈앞에서 바스러져 간다. 편해지고 싶다는 욕망이 내면에서 들끓었다. 인간이란 이렇게나 나약해서, 편한 죽음 앞에선 아득바득 붙잡고 있던 삶의 집착은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그것 하나만 바라보며 살았는데도…….

    “정신 차려요, 일라이저!”

    희뿌연 시야가 암전됐을 때, 누군가 제 멱살을 잡아채는 게 느껴졌다. 억센 아귀힘에 줄곧 내려앉던 제 몸뚱어리가 조금씩 물 위로 떠오르는 것 같았다. 아니. 여전히 발이 무거웠지만 천천히, 그리고 착실히 위로 떠오르고 있다.

    “일라이저. 제발……!”

    거세지 않다고 해서 물살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이미 떠내려가듯 흘러간 일라이저를 잡아, 흐르는 물을 역류해 건져 내는 건 이엘에게 상당히 힘들었다. 그녀가 일라이저를 간신히 잡았을 땐 이미 그가 정신을 잃고 난 뒤였다. 늘어진 성인 남자를 온 힘을 다해 건져 낸 이엘은 그를 물 밖에 끌어 올리자마자 그의 숨부터 확인했다.

    숨을 쉬지 않는다. 창백해진 일라이저의 안색을 확인하며 이엘은 서둘러 그의 가슴 중앙에 손바닥을 올리고 그 위에 나머지 손을 깍지 껴 올렸다. 가슴 압박 후엔 일라이저의 턱을 들고 코를 막아 인공호흡을 이었다.

    역시 오늘 원정은 나 혼자 오는 편이 좋았다. 아냐, 지금은 그런 생각 하지 말자. 이엘은 부정적인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응급처치에 심혈을 기울였다. 제발……. 자신도 물살에 저항하느라 기운이 없었음에도 이엘은 온 힘을 다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모를 정도로 그를 살리는 것에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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