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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155화 (155/488)

155화

약속대로 노아는 그녀의 뒤를 단단히 지켜 주고 있었다. 늑대들의 보호막은 상상 이상으로 철통같아서, 은신이 가능한 뱀조차 뚫을 수 없었다.

“형. 정말 릴을 찾을 수 있어?”

“걱정 마.”

그리고 사흘 전. 마을의 아이들 일부가 사라졌다.

아이들만 노린 범죄라고 보기엔 다음 날 죽어 버린 뱀들의 출현이 마음에 걸렸다. 역시 뱀은 인신매매를 포기하지 못한 걸까. 왜 하필 아이들만 노린 걸까. 아까 뱀들에게서 도망친 스토브는 건드리지 않고 오히려 풀어 주기까지 했는데. 왜 목표가 아이들인 걸까.

어쩌면 생각보다 더 악랄한 방법으로 나를 찾아내고 있는 걸지도 모르고.

이엘과 일라이저는 일대를 뒤지며 추격 중이었다. 그들이 머물고 있는 마을은 약자들이 대다수였기 때문에 많은 수의 장정들을 꾸릴 순 없었다. 그래서 대부분은 마을에 머물러 경비 단계를 높이고, 이엘과 일라이저만이 아이들을 수색하기로 한 것이다.

― 일. 오늘은 그냥 쉬는 게 어때요? 수색은 제가 다녀올게요.

― 당신을 혼자 보낼 순 없습니다.

― 걱정은 감사하지만 저는 제 몸 하나쯤 건사할 수 있어요.

― 아니요. 어쨌든 혼자는 안 됩니다.

강경하게 나오는 일라이저를 만류할 순 없었다. 그의 말대로 혼자 행동하는 건 꽤 위험했다.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진 아이들을 찾는 일을 혼자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럼 오늘은 무리하지 말아요. 그녀의 말에 일라이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엘의 이야기를 접한 늑대가 추적을 시작해 냄새를 맡았다는 소식이다. 계약으로 영혼이 묶이게 된 이엘과 스완은 아주 미세하지만 생각을 일부 공유하게 됐다. 오드의 말에 의하면 극히 드물지만 간혹 계약자들 간에 생각을 주고받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아무튼 그 덕에 뱀들의 감시를 피해 늑대들과 접선하지 않고도 소식을 전할 수 있었다.

이엘은 쥐고 있던 스푼에 힘을 주어 분노를 삼켰다. 턱수염과 그 일당들이 모조리 죽었기 때문에 악순환을 끊었다고 생각했다. 아니. 끊는 것까진 바라지도 않았다. 조금이라도 늦췄다고 생각했는데…….

어디선가 나타난 또 다른 인간 무리들이 어린아이들을 납치해 뱀에게 팔고 있었다. 역시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도무지 바꿀 수 없는 세계다.

“형아. 스튜가 다 흘러.”

“응. 고마워.”

깊은 생각에 잠겨 스튜가 스푼 밖으로 흐르는 것도 몰랐네. 아이의 머리를 쓸어 주며 이엘이 부드럽게 웃었다.

건너편에 앉아 있던 일라이저는 그녀와 아이들의 대화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수어가 없이는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오랜 시간을 그렇게 살아온 그는, 그게 그다지 불편하지 않았다. 때론 알고 싶지 않은 타인의 이야기를 자연히 차단할 수 있어 마음이 편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저는 괜찮습니다.’

‘오드가 도와줄 거예요. 가능할 수도 있어요. 선천적인 문제가 아니라면……,’

‘이렇게 오랜 시간을 살았습니다. 괜찮습니다, 저는.’

나자르의 손이 닿는 곳에 성력이 퍼졌다. 오드는 이곳에 도착해 병들고 아픈 사람들을 하나하나 손수 치료해 주었다. 일라이저처럼 후천적으로 장애가 생긴 인간들에게도 기꺼이 치유의 손을 뻗었다.

하지만 일라이저는 고개를 저었다. 딱히 불편하지도 않았고, 설령 귀가 들린다고 해도 어눌해진 제 발음을 고치려면 시간이 꽤 오래 걸릴 테니까.

게다가 그가 억지로 붙잡고 살고 있는 이 삶. 어머니와 누이들의 목숨을 앗아 간 그 이종족을 죽일 생각으로 삶을 이어 가고 있었다. 이 삶에서 망가져 버린 귀는 복수를 잊지 않게 해 주는 자극제였다. 그러니 일라이저는 오드의 손길을 거절한 것이다.

“걱정 마. 우리가 반드시 구해 올 테니까.”

“정말? 진짜?”

“응. 그러니까 너흰 여기서 꼼짝도 하지 말고 있어야 돼. 밖으로 나가면 안 돼. 누가 불러도 따라가서도 안 되고. 알겠지?”

“응!”

아이들의 눈동자가 초롱초롱 빛이 났다. 일라이저는 그 눈동자를 받아 내며 연신 입을 열어 무언가 설명하는 이엘의 입술에서 좀처럼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듣고 싶다. 단 한 번만이라도 들어 보고 싶다.

저 사람의 목소리를 단 한 번만이라도…….

‘폐하. 황녀 전하를 저런 누추한 곳에 머무시게 할 수는 없습니다.’

‘짐이 후작에게 그런 걸 요구하였나?’

‘폐하. 하오나……,’

‘그래, 네가 러셀 후작의 막내로구나. 이리 가까이 오거라.’

황제가 영지 시찰을 위해 황궁을 떠나 일라이저의 영지에 왔을 무렵이었다. 일라이저는 당시 아주 어렸지만 그날을 지금까지 잊지 못한다. 인자한 말투로 자신을 안아 주던 황제를 앞에 두고도 어린 일라이저는 떨지 않았다.

그러나 처음 황제를 알현하는 자리에서도 의연하던 소년은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찾았던 별장에서 얼음처럼 굳어 버렸다.

구불거리는 검은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어 올린 소녀가 손에는 목검을 쥐고 열심히 수련 중이었다. 외따로 떨어진 곳에 있는 별장이라 제대로 정리도 되지 않은 곳이었음에도 황녀는 개의치 않았다. 황자는 황제와 함께 후작의 성에서 성대한 대접을 받고 있었지만 그녀는 누추한 별장에서 홀로 머물고 있었다.

그럼에도 작은 소녀는 화를 내거나 기분 나쁜 기색 없이 제 할 일에 집중하고 있었다.

‘거기 누구세요?’

작은 기척인데도 기민한 감각으로 알아챈 황녀가 소리를 질렀다. 당당히 제 신분을 밝히면 되는데, 일라이저는 저도 모르게 큰 나무 뒤로 몸을 숨기고 말았다.

얼굴이 잔뜩 붉어졌다. 그토록 만나고 싶었던 분이 저기 계실 줄은 전혀 몰랐으니까. 갑작스런 만남은 소년의 심장을 요동치게 만들었다.

‘이온?’

환희에 찬 목소리가 들렸으나 당연히 제 이름은 아니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소년의 마음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이온은 누구일까……. 누구기에 저렇게 기쁘게 찾으시는 걸까? 소년은 입술을 깨물며 저도 모르게 들고 온 것을 바닥에 내려놓고 멀찍이 물러나고 말았다.

황녀는 한참이나 그렇게 서 있다가 뚜벅뚜벅 걸어, 일라이저가 처음 숨었던 나무 뒤로 다가왔다. 멀리서 소년이 지켜보는 줄도 모르고 황녀는 물끄러미 바닥을 내려보고 있었다. 일라이저는 조금 전보다 더 가까워진 소녀의 모습에 심장이 쿵쿵 뛰었다.

일라이저는 두어 달 전, 아버지와 어머니의 대화를 몰래 들었던 것을 떠올렸다.

‘각하. 부디 재고해 주셔요. 저는…… 저는 원치 않습니다.’

‘부인. 확실한 건 아닙니다. 그저 폐하께서 거론하셨을 뿐입니다. 가볍게 하신 말씀이니 확실치 않아요, 안심하세요.’

‘저는 우리 일이 황궁으로 가는 걸 원치 않아요. 황녀 전하의 부군이라니요……. 가당치도 않아요. 분명 암투에 휘말릴 거예요.’

귀족들은 이른 나이에 약혼을 하는 게 풍습이었으니 슬슬 이야기가 돌 때가 됐다. 일라이저 역시 어느 귀족가의 영애와 약혼을 하겠거니 싶었다. 하지만 그 상대가 황녀일 줄이야. 부모님의 이야기를 훔쳐 듣게 된 소년은 서둘러 제 방으로 뛰어가 침대에 몸을 숨겼다.

그때부터였다. 자신도 모르게 가슴속에 작게 피어난 꿈은.

황녀에 관한 소식은 죄 부정적인 것뿐이었지만 일라이저는 자신의 아비에게서 다른 이야기를 들었다. 아름답고 기품 있으며, 배려와 따뜻함이 넘치는 사랑스러운 분이라고. 믿음직한 아버지에게서 듣는 얼굴도 모르는 황녀에 대한 이야기가 어느새 풋사랑으로 자리 잡았다.

그렇게 상상만 했던 황녀가 지금 제 눈앞에 있었다. 일라이저는 마른침을 삼키며 잔뜩 긴장한 채 황녀를 몰래 지켜봤다. 그녀는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감사해요.’

일라이저가 놔둔 것을 품에 가득 안고 황녀가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어린 일라이저의 얼굴이 뜨겁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자신이 상상했던 것과 똑같다. 목소리가 참 예쁘고 또렷하고 따뜻하다. 그가 꿈꾸었던 황녀님이 지척에 있었다.

쿠당탕! 무언가 뒤집어지는 소리로 인한 어수선한 분위기에 일라이저가 상념에서 벗어났다. 식사 자리가 엉망이 돼 있었다. 아이들 몇이 바닥에 나동그라진 채 장난치느라 바빴다. 이엘이 인상을 쓰고 잔소리를 하자 아이들은 잽싸게 제자리로 돌아와 툴툴거리며 스푼을 손에 쥐었다.

“편식하면 안 돼. 얼른 먹어.”

“그치마안…….”

“자, 이렇게 먹으면 괜찮지?”

그때 들었던 소녀의 목소리를, 청각을 잃은 지금까지도 기억한다. 눈앞에 앉아 있는 저 소년. 마치 그녀가 살아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할 정도로 닮은 저 소년의 목소리를, 일라이저는 듣고 싶어졌다.

똑같을까? 아니, 당연히 다르겠지만 그래도……. 비슷할까? 비슷하다면…… 나는 정말 행복하지만 동시에 괴로울 텐데.

그래도 듣고 싶다. 저 소년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 일라이저는 오드의 손길을 거부한 것이 조금은 후회가 됐다.

*

“곰이 협력했다고?”

“전쟁 때 우리 쪽에 도움을 받았어. 그때의 빚을 청산해 달라고 했거든.”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레온을 바라보는 늑대들의 시선이 황당함으로 물들어 갔다. 까다로운 종족 중 하나인 곰을 포섭하다니. 레온은 생긴 걸로만 치면 가장 무르고 어리숙해 보이는데 잇속 챙기는 일엔 치고 빠지는 수준이 높았다. 시작도 하기 전에 가장 어려운 종족부터 끌어들일 줄은 정말 몰랐다. 노아마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넌 정말…….”

“그 아이에게 도움이 된다면.”

“…….”

“무엇이든 할 수 있어, 난.”

“…….”

“그게 무엇이 되었든. 난 할 거야.”

해야 돼. 소년에 더 가까운 레온의 눈동자에 농밀한 애정이 진득하게 들러붙어 있었다. 사정을 전혀 몰랐던 늑대들은 입을 벌리며 놀란 눈을 했다. 특히 앤디는 놀라다 못해 뒤로 나자빠질 정도였다. 뭐, 뭐야……?! 레온 님이 무슨……. 영지에서 오헬의 목줄을 쥐고 흔들던 게 엊그젠데? 당황해서 말도 제대로 못 했다.

“오헬이 머무르는 거처 주변에 우리 애들도 있어.”

“…….”

“늑대를 못 믿는 건 아니지만, 안심이 되는 것도 아니야.”

솔직히 말하면 레온은 지금 이 상황이 매우 못마땅했다. 이엘은 르네와 레온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다. 무엇이 됐든 함께하려는 르네에겐 늑대들과 같이 모든 계획을 털어놓았지만 레온에겐 아니었다. 두루뭉술하게 큰 그림만 그려 주었을 뿐, 그 안의 세세한 것들은 말하지 않았다.

그러니 그녀가 영지를 떠난 것 또한, 레온은 알지 못했다. 그가 늑대의 영지에 도착했을 땐 이미 이엘은 인간들이 사는 곳으로 떠난 뒤였다.

“뱀은 안 돼.”

이게 제일 마음에 안 들어. 레온은 조급함에 저도 모르게 손끝을 잘근잘근 씹었다.

“노아. 너 정말 제정신이야? 오헬을 뱀에게 보낼 셈이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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