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폐하.”
“…….”
바람을 타고 노아의 시원하고 무거운 향기가 전해졌다. 노아. 다시금 그의 이름을 불렀으나 노아는 이엘을 끌어안은 채 아무런 대답도 해 주지 않았다. 정신을 차렸다는 스완의 보고에도 그는 이엘의 방을 찾지 않았다. 곧장 오고 싶었지만 밀린 일을 처리하느라 못 온다는 말만 전할 뿐이었다.
노아. 이엘이 그의 이름을 또 한 번 불렀다. 그제야 제 허리를 단단하게 감싸던 억센 팔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몸을 돌려 노아와 눈을 마주친 이엘은 짤막한 한숨을 흩뿌렸다. 그의 표정이 너무 좋지 않았으니까.
“새벽에 어딜 가려고 했어.”
채근하는 말투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정말 궁금해서 묻는 것도 아니다.
“그런 표정 하면 내가 못 떠나잖아요.”
“……그러면 안 되지. 가야 하니까.”
후유증을 남긴 뱀의 독을 치료해야 하니까. 고개를 주억거리며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이엘은 노아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그 커다란 손가락을 조심스레 잡았다.
“잠깐 별저로 돌아가려고요.”
“안 돼. 아직 열이 나잖아. 혼자 있으면 위험해.”
“괜찮아요. 또 금세 내려요.”
아픈 건 자신인데 도리어 그의 얼굴이 더 아픈 것처럼 보였다. 무언가 억눌러 참는 모양새로 노아는 한참이나 말을 잇지 못했다. 그 모습에 이엘이 웃으며 운을 뗐다.
“폐하. 많이 힘드세요?”
“사흘이나 네가 사경을 헤맸는데, 내가 멀쩡하겠나?”
“사경까진 아니에요. 과로라고 했잖아요. 잠을 통 못 자서.”
“엘.”
“네?”
“절대 네게서 눈을 떼지 않을게.”
그것만큼 큰 위로가 어디 있겠는가. 이엘이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농담 아니다. 네 곁에 수많은 늑대들의 눈이 지켜보고 있으니까 절대로 네가 다칠 리 없어.”
“네. 믿어요.”
“그러니까…… 위험하면 꼭 도망쳐. 응?”
“…….”
“약속 좀 해 줘. 제발.”
뭐가 그렇게 두려운 거예요? 그렇게 묻기도 전에 그의 조급한 입술이 이엘의 둥그런 이마 위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마치 제 흔적을 남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짙고 무거웠다. 차게 식어 버린 눈동자에 살기 비슷한 감정이 어렸다.
“네 몸에 손끝이라도 댔다가는 모조리 죽여 버릴 거야.”
“…….”
“나는 그 정도 각오로 네 뒤에 있는 거야.”
“네.”
“어차피 나에겐 네가 없는 이 세계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네게 조금이라도 위해를 가한다면 종족의 명예를 걸고 모조리 죽일 테니까.”
그러니까 너는 부디.
“네 할 일을 마치고 안전하게 내 품으로 돌아와 줘.”
내가 정말 이곳을 무너뜨리지 않도록. 나 좀 도와줘, 제발.
*
“힘들진 않아?”
“전혀. 오히려 더 좋아졌어.”
이엘이 싱그럽게 웃으며 대꾸하자 오드도 부드러운 미소로 응했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고질병이었던 무릎의 통증도 이곳에 온 뒤로 많이 줄었다. 심지어 비가 올 때도 전과 달리 걷는 것에 무리가 없었다.
며칠 전 옆집 아저씨가 했던 말이 불쑥 떠올랐다. 인간은 인간끼리 어울려 살아야 한다는 말이. 그 말이 아예 틀린 말은 아닌 모양이다.
얼굴에 흙을 잔뜩 묻힌 이엘이 주변에 몰려든 아이들과 장난을 치다가 고개를 뒤로 홱 돌렸다.
“왜 그러냐, 오헬? 거기 뭐가 있냐?”
호미를 들고 밭을 일구던 중년의 남자가 그녀를 향해 묻자 이엘이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그녀의 말에 사람들이 다시 제 할 일에 집중했다. 이엘은 저 멀리 우거진 숲에서 느껴지는 날카로운 눈빛을 마주했다. 오늘도 변함없이 늑대들이 그녀를 지키고 있었다.
일구어 놓은 밭은 아직 엉성하기 짝이 없었으나 그래도 모양새가 보기 좋게 갖춰져 간다. 여전히 그녀를 향한 불신의 눈초리가 곳곳에 남아 있기는 했지만, 대다수는 이엘과 오드를 몹시 반겼다. 영리한 인간 소년과 사라진 줄로만 알았던 나자르.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두 사람은 사람들에게 씨와 모종을 선물했다.
“나자르 님. 축복의 나무를 찾았다는 전갈이 도착했어요!”
“알겠습니다. 같이 가도록 해요.”
이곳에 온 뒤로 이엘만큼이나 오드도 바쁜 나날이 이어졌다. 이종족의 영지에서도 그랬지만 인간들의 터전에서도 나자르인 그는 모두에게 꼭 필요한 존재였다. 제국이 무너지기 전엔 그렇게나 박대하던 종족을 이제 와 고귀하게 여기고 있다는 게, 그녀로서는 참 서글픈 현실이었다.
“다녀올게, 엘. 너도 조심히 다녀와.”
“응. 무리하지 마, 오드.”
이엘의 둥그런 이마에 짧게 입술을 부딪친 오드가 빙긋 웃으며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돌렸다.
축복의 나무. 온갖 맛과 향이 나는 과실이 열리는 나무를 이르는 말이었다. 신이 창조 후에 인간들에게 선물한 가장 귀한 나무였다. 이곳에서 열리는 실과는 각종 기후, 환경, 그리고 들어간 정성과 성력에 따라 다양한 향취와 맛을 냈다. 그러니 이 거대한 나무 하나로 인간들은 풍요로운 식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축복의 나무는 신의 역할을 대신하는 오드와 같은 종족의 성력으로 보존됐다. 신과 인간의 관계가 지금보다 좋았을 땐 굳이 그들의 능력이 없이도 잘 자랐으나, 인간이 신을 떠나면서 나무도 생명을 잃어 갔다. 그나마도 나자르인들의 성력으로 간신히 명맥을 이어 갔지만, 그들이 모조리 죽게 되면서 나무도 하나둘 사라졌다.
축복의 나무가 사라지고 농작은 할 수도 없게 되니, 궁지에 몰린 인간들이 목숨을 걸고 이종족 사냥을 다시 시작하는 게 무리도 아니다. 그러니 사라진 축복의 나무를 찾아 살리는 게 우선이었다.
“오헬! 스토브 아저씨가 돌아왔어!”
상념에 젖어 있던 이엘을 깨운 건 꼬마 아이의 음성이었다. 그녀는 흙이 묻은 머리를 한 번 털고는 서둘러 아이가 말해 준 곳으로 달려갔다. 이미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털이 수북하게 난 남자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제 무용담을 풀어놓느라 정신이 없었다.
“말도 마! 아니, 그 뱀들이 얼마나 무서운지!”
“그래도 약탈은 안 당했네요?”
“그놈들 참 이상하단 말이야. 뭔가를 찾는 거 같긴 한데 우리가 가져온 것들엔 관심이 없어 보였어.”
제도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인간들이 한데 어우러져 사는 민가가 있었다. 인간들은 전쟁 이후 이종족의 영지에서 노예 생활을 하는 인간과 탄광지에서 일을 하는 인간들, 대체로 두 부류로 나뉘어져 살았는데 그중 상당수는 탄광지에서 일을 하며 근근이 살아갔다. 그런 인간들이 사는 곳이 대륙의 동쪽 부근이었다.
최근 이 마을의 인간들은 동쪽 지역과 교류를 시작했다. 이 또한 전부 이엘이 제안한 계획이었다. 스토브라는 남자는 동쪽 사람들과 교역을 위해 떠났다가 돌아온 참이었다. 그는 한참이나 열변을 토하다가 문득 근처에 다가와 있던 이엘을 발견했다. 그러곤 눈을 크게 치뜨더니 검지로 그녀를 가리키며 소리를 쳤다.
“맞아! 나자르 어디 갔냐?!”
“오드는 조금 전에 떠났어요. 축복의 나무를 발견했다는 전갈이 도착했거든요.”
“맙소사! 뱀들이 나자르를 찾고 있던 모양인데…….”
뱀이 하는 이야기를 언뜻 들어 보니 은빛 머리카락이 어쩌고저쩌고. 들고 있는 지팡이를 어쩌고저쩌고. 그땐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건 전부 오드를 가리키는 말들이었다. 스토브가 당황한 채 횡설수설 수다를 떨었고 몰려들었던 사람들은 모두 이엘의 눈치를 살폈다.
“나자르 님께 연락해서 돌아오라고 해야 하는 거 아냐?”
“나자르 님이 위험하신 것 같은데…….”
“괜찮아요. 아직까진 괜찮습니다.”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이엘을 조금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사람들은 이내 수긍했다. 저 아이가 아니라면 아닌 것이다. 지난 몇 주간 마을 사람들의 신뢰가 조금씩 쌓인 덕에 화제는 금세 바뀌었다.
때마침 식사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배식받을 곳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이엘은 홀로 남아 공터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다시 또 시선을 습관적으로 풀숲이 있는 곳에 박았다.
― 식사하세요.
조금이라도 늑대들을 느끼고 싶었지만 오늘도 기척 하나 느껴지지 않는다. 이엘은 제 앞에 나타난 금발의 남자에게 기운 없는 시선을 주며 의미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라이저는 그런 그녀를 내려보며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 얼굴이 또 마르셨습니다. 저와 약속하신 것 잊으시진 않으셨겠죠. 식사를 잘 하셔야 합니다.
― 네. 그럴게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형식적인 안부가 오갔다. 이엘은 일라이저를 향해 가벼운 묵례를 하곤 사람들이 달려간 방향으로 걸음을 틀었다. 일라이저는 한참이나 그녀의 뒷모습을 응시하다가 고개를 뒤로 돌려 우거진 숲을 보았다. 울창한 숲은 언제나처럼 고요하기만 했다.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작은 인기척조차 느껴지지 않는 곳이었다.
그런데도 저 사람은 언제나 저곳을 응시한다. 마치 누군가 지켜보고 있는 것처럼.
일라이저가 편지를 보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엘과 오드가 인간 마을에 찾아왔다. 그녀의 얼굴을 알아본 마을 사람들이 일라이저에게 눈짓을 보냈지만, 일라이저는 편지에 쓴 대로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았다. 마음 같아선 그녀를 돕고 싶었지만 이건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잘 적응해 주었다. 불신으로 점철된 사람들의 마음을 잘도 파고들어 영민한 조력자로 자리매김했다.
― 일. 당신도 어서 와서 먹어요.
배식을 받고 아이들과 함께 식사를 하던 이엘이 일라이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근데 형도 수어 할 줄 알아?”
“응.”
“누구한테 배웠어?”
“어릴 때. 선생님한테 배웠지.”
얼버무리듯 말을 돌린 이엘이 주변을 세심하게 살피며 다시 식사를 이어 갔다. 맞은편에 자리를 잡은 일라이저는 그 일련의 행동을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는 인상을 찌푸리는 일이 거의 없었다. 마을 사람들이 무리에 가까운 일을 요구할 때도 고개를 끄덕여 해낼 뿐이었다. 처음 올 때보다 마른 얼굴이었지만 힘들어 보이진 않았다. 되레 개운해 보여 내심 안도했다.
문득 일라이저의 눈에 이엘의 손등이 들어왔다. 며칠 전 지반이 무너진 집의 복구 작업 때 다쳤던 곳이었다. 작은 손등에 자잘한 흉터가 여전히 남아 있다. 일라이저는 무의식중에 손을 뻗어 스푼을 쥐고 있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일?”
이엘의 입에서 제 이름이 나왔지만 일라이저는 당연히 듣지 못했다. 그는 한참이나 이엘의 손을 잡고 손등에 난 상처를 바라보았다. 제때 지혈을 했어야 했는데 복구 작업에 신경 쓰느라 다친 줄도 몰랐다. 흉터가 꽤 오래 남을 것 같은데.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
“형 왜 저래?”
“몰라.”
아이들이 호기심을 달고 일라이저와 이엘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갑자기 쏠린 시선들이 불편해진 이엘이 그의 손아귀에서 제 손을 쏙 뺐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일라이저가 시선을 올렸다. 미안하다, 웅얼거리려던 것을 꿀꺽 삼키고 수어로 대신했다. 이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라이저의 귀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다행히 조금 길어진 머리카락이 귀를 덮고 있어 망정이지, 하마터면 모두에게 들킬 뻔했다.
최근 들어 그는 계속 이런 상태였다. 마치 꿈이라도 꾸는 것처럼 몽롱한 상태에서 자신답지 못한 행동을 했다. 이를테면 저 소년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해, 발을 접질린 어제와 같은 일들.
안다. 저 사람은 절대 자신이 알고 있는 그분이 아니다. 그럴 리가 없는 걸 빤히 아는데도…….
― 일. 괜찮겠어요? 오늘은 저 혼자 갈까요?
― 아뇨. 같이 가요.
― 괜찮겠어요? 어제 발도 다쳤잖아요.
― 이 정도는 괜찮아요. 같이 가요.
그의 고집에 이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 정도는 혼자 가볍게 다녀올 수 있는데도 일라이저는 꼭 함께 가겠다며 고집을 부렸다. 며칠 전에 있었던 습격 때문에 예민해진 걸까.
이틀 전 마을 경계에서 거대한 뱀의 사체가 몇 발견됐다. 죄 물어뜯긴 걸 보니 이종족끼리 영역 싸움이라도 났나 싶었다. 인간들이 모두 혀를 차며 마을로 돌아갈 때, 이엘은 죽은 뱀의 사체에서 늑대의 흔적을 발견했다.
아무래도 뱀들이 예상보다 빠르게 이엘의 냄새를 맡은 모양이었다. 예정일보다 빨리 그들을 만나선 안 될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