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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153화 (153/488)
  • 153화

    *

    온몸이 무거웠다. 불에 타는 듯한 감각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이어졌다. 어릴 때부터 이랬다. 이상하리만큼 자주 앓았다. 그래도 어머니가 살아 있을 땐 서러울 정도로 괴롭진 않았는데……. 그런 생각을 하니 불현듯 레온이 떠올랐다. 역시 그를 두고 온 게 마음에 걸린다.

    그 후로도 어둠 속에서 한참을 헤맸다. 분명 정신은 말짱한데 눈이 도무지 떠지질 않아서. 곁에서 소리를 치며 소란을 피우는 노아의 목소리도 또렷하게 귀에 들렸고, 오드가 몇 번이나 오가는 것도 분명하게 느껴졌다. 로날드의 훌쩍임까지 들었는데도 이엘은 눈을 뜨지 못했다. 아니, 뜰 수 없었다.

    차라리 어둠 속에 홀로 남겨지는 편이 더 나은 세상이 되어 버려서.

    의연하게, 아무렇지 않게. 그렇게 행동하고 계획했지만 못내 무섭다. 두렵다. 왜 나에게만 이런 시험이 오는 걸까. 나는 많은 걸 바란 게 아니었는데. 나는 많은 걸 갖고 있던 것도 아니었는데.

    흔들렸다. 앞으로도 감당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아서. 차라리 내가 이기적이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차라리 내가 아비처럼 폭군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열병 속에서 그런 단편적이고 일차원적인 생각이 든 것도 당연했다.

    “왜 이렇게 열이 나지? 대체 왜 이렇게 자주 아프냐고!”

    “폐하. 인간은 원래 그렇습니다. 진정하십시오.”

    “멀쩡했잖아. 갑자기 쓰러지는 게 말이 되나?”

    “과로입니다. 그리고 최근, 신경 쓸 일이 많았으니 더 그렇겠죠. 부디 진정하십시오, 폐하.”

    안드로가 제 왕의 노기를 누그러뜨리려 부단히 노력하는 목소리도 선하게 들렸다. 노아도 최근 들어 힘들어했는데……. 그 생각을 하니 억지로라도 눈을 떠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이엘은 온 힘을 다해, 무겁게 내려앉았던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희뿌연 인영이 심하게 일렁거렸다.

    “나타니엘!”

    사경을 헤매는 것처럼 괴로워하던 레온이 식은땀을 흘리며 저를 향해 웃어 주었을 때. 이엘은 그때를 떠올렸다. 그것만큼 안도되는 것도 없었는데.

    그래서 자신도 마찬가지로 노아를 향해 웃어 주려 했지만 그것까진 어려웠다. 끝내 다시 무거운 눈꺼풀을 닫아 버렸고, 그 뒤로는 기억이 통 나질 않는다.

    다시 이엘이 눈을 떴을 땐 땅거미가 내려앉을 무렵이었다. 여전히 온몸이 뜨거웠지만 눈을 못 뜰 정도로 버겁진 않았다. 눈을 두어 번 깜빡거리던 그녀의 시야에 분홍빛 머리카락이 걸렸다.

    “깼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스완이 허겁지겁 이엘의 이마 위에 제 손등을 올렸다. 아직 미열이 남아 있었지만 쓰러졌을 때와 비교하면 많이 내렸다. 안도하듯 풀썩 자리에 앉은 스완의 앞에 이엘의 하얀 손이 힘겹게 다가왔다.

    “미안해…….”

    목이 잔뜩 잠겨 듣기 싫었을 텐데도 스완은 인상 한 번 찌푸리지 않았다.

    “네가 뭐가 미안해.”

    “네 목숨.”

    “…….”

    “위험하게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

    그 말에 스완이 미간을 찌푸렸다. 깨자마자 제 걱정이 아니라 내 걱정이야? 한심스러울 정도로 답답한데…… 도무지 미워할 수가 없다. 스완은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다시 그녀의 곁으로 의자를 당겨 앉았다.

    “스완.”

    “왜.”

    “후회하지?”

    “뭘.”

    “5년이나 계약 연장한 거 말이야.”

    부러 분위기를 바꾸려는 건지 이엘이 웃으며 말을 건넸다. 그녀의 말에 스완은 한참이나 인상을 쓰다가 한숨 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곤 흐트러진 이불을 끌어와 제대로 정리해 주었다.

    “후회 안 해.”

    “정말?”

    “응. 정말.”

    “의외네.”

    “마음 같아선 몇십 년이고 연장하고 싶어.”

    “그렇게 땅에서 살고 싶어?”

    “그럴 수도 있고.”

    네가 좋아서일 수도 있지. 뒷말은 속으로 삼켰다. 말을 하다가 마는 스완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이엘이 다시 입술을 뗐다.

    “하루 정도 지났나? 나 아픈 지.”

    “사흘.”

    “그렇게나?”

    “후유증이 심하대.”

    “아……. 뱀…….”

    그녀의 나지막한 말에 스완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독할 정도로 강하다. 로빈이 그때 던져 준 해독약은 애매할 정도의 흔적을 남기고 독을 치료했다. 그 교활한 뱀이 노린 게 분명하다. 순순히 약을 주는 게 이상하다 싶었는데……. 잊을 만하면 통증이 찾아왔다. 기어이 자신을 찾아오라고, 술수를 쓴 것이다.

    “그래서 늑대의 왕이 허락했어.”

    “…….”

    “네가 뱀에게 가는 걸.”

    마지못한 허락이다. 이건 로빈이 직접적으로 능력을 거둬 가지 않는 이상, 언제까지고 그녀에게 남아 있을 테니까. 그렇게나 원치 않던 일이었는데도 거기에 이엘의 목숨이 달려 있으니 노아는 자신이 고집을 포기하는 걸 택했다.

    스완은 제 가슴이 쿵쿵 아프게 뛰는 걸 느꼈다. 그와 영혼이 연결된 이엘의 상태가 상당히 좋지 않다는 뜻이었다. 그녀가 죽어 버리면 자신도 죽는다. 그게 계약의 내용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든 그녀를 살려야 하는 게 맞는데. 그러려면 그녀가 위험을 감수해서라도 뱀에게 가는 게 맞는데…….

    “근데 난…… 반대해.”

    “스완.”

    “우린 늑대와 같은 상급 포식자 계층이 아니기 때문에 2차 전쟁 때 참여하지 않았어. 1차 전쟁으로 암컷이 다 죽었어도 분노할 능력이 없었으니까. 그럴 만한 힘이 없었으니까. 솔직히 강 건너 불구경이었어, 내겐. 우린 자기 목숨 지키며 살기에도 바쁜 종족이니까.”

    “…….”

    “이렇게 위험한 세상일 줄, 정말 꿈에도 몰랐어.”

    심약한 자신이 이엘의 입장이었으면 죽고 싶었을 거다. 이 얼마나 끔찍한 세계란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망을 잃지 않고 어떻게든 상황을 타개하려는 모습이, 너무나 인간다웠다. 백조는 인간이 될 수 없으니까, 영원히 그녀를 이해할 수도 없겠지.

    “뱀이 네게 집착한다는 소릴 들었어.”

    “…….”

    “너…… 그곳에서 어떻게 살아남으려고 그래.”

    “언젠가 한 번은 거쳐야 할 일이었어.”

    “…….”

    “괜찮아, 스완. 나를 믿어.”

    한번 흙을 밟아 보니 다시는 땅 아래에서 살 수 없게 되었다. 언제까지나 목숨을 위협당하며 숨어 살 수만은 없었다. 그건 사람답지 못한 삶이었다. 죽느니만 못한 삶을 살기 위해 아득바득 살아난 게 아니었다. 그래서는 황궁 생활과 다를 게 없었다.

    적어도 이온이 준 목숨을 그렇게 버리고 싶진 않았다. 이엘은 짧더라도 가치 있는 삶을 살기로 마음먹었다. 그게 스스로의 삶을 시작하고 매듭짓기 위한 첫 번째 결심이었다.

    되레 스완이 그녀에게서 위로를 받았다. 제 하얀 손등을 덮은 마른 손바닥의 감촉에 마음이 더없이 무거워졌다. 백조 무리는 늘 스완에게 철이 없다는 소릴 했다. 세상 물정 모른다며. 물론 스완은 그들의 말을 가볍게 무시했다. 알 거 다 아는데 무슨.

    하지만 이엘을 만나고, 그녀와 이야기할수록 자신이 얼마나 터무니없이 맑은 삶을 살아왔는지 절감했다.

    “내 반쪽.”

    “응.”

    “내가 도울 일은 없을까? 나도 널 돕고 싶어.”

    “왜 없어. 5년 동안 내가 마음껏 부려 먹을 건데.”

    “…….”

    “황위에 오르면 네 도움이 절실해져. 그러니까 그때까지 너도 늑대들과 잘 지내 줘.”

    자신의 종족이 가진 능력이 제일 뛰어나다고 자부했다. 특히나 겨우 방어 목적 정도로밖에 사용할 수 없는 다른 개체완 달리, 자신은 공격용 그 이상으로도 사용이 가능했으니까. 하지만 막상 뭍으로 올라오니 크게 쓸모가 없었다. 지금 당장 전쟁이 난다면 고작 도망치는 용도로밖에 사용할 수 없다. 늑대들처럼 그녀에게 큰 도움을 줄 수 없었다.

    “알겠어. 그럼 나도 여기서 네 보조를 준비할게.”

    지금으로서는 이렇게밖에 도울 수가 없다. 스완은 주먹을 꽉 쥐며 아쉬운 대로 물러나는 걸 택했다. 여전히 지끈지끈 아픈 머리를 감싸며 이엘이 몸을 일으키는 걸 곁에서 도왔다. 그녀는 저가 정신을 잃은 사흘 동안의 바깥 상황을 알고 싶어 했다.

    “네 말대로 지하 감옥에서 풀려난 인간들은 곧장 뱀들을 찾아갔어.”

    “그래. 갈 곳이 거기밖에 없을 테니까.”

    그들이 늑대의 지하 감옥에 있는 사이, 턱수염과 함께했던 잔당들은 모조리 뱀에게 먹혀 버렸다. 그나마 겨우 목숨을 부지한 자들마저 하이에나에게 죽임을 당했다. 감옥에 있던 인간들은 그 사실을 모를 테니 탈출하자마자 뱀을 먼저 찾았으리라.

    “그리고 뱀들이 인간들의 마을을 뒤지기 시작했고.”

    탈출하는 인간들에게 거짓 정보를 흘렸다. 분노한 늑대들이 이엘과 오드를 영지에서 쫓아 버렸다는.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흘리지 않았지만, 인간들에게 건네 들은 로빈은 알아챘을 것이다.

    세잔티노에서 그녀에게 던져 주었던 황자의 반지. 뱀들의 영지에 있는 각종 자료들. 아무리 멍청한 종족이라고 해도 그것 하나 추리하지 못할 리 없지.

    아르세니온. 이엘이 그 황자라는 게 밝혀져 오드와 함께 늑대의 영지에서 쫓겨났다. 분명 로빈은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니 이엘과 오드가 갈 곳이라곤 인간의 영지뿐. 그래서 수색을 시작했을 테고.

    “그리고 편지도 도착했어.”

    “편지라면…….”

    “일라이저. 네가 말한 그 남자가 보냈어.”

    귀퉁이가 살짝 구겨진 편지가 그녀의 앞에 다가왔다. 스완의 손에서 건네받은 편지를 펼쳤다. 정갈하고 유려한 필체가 그녀를 반기고 있었다.

    「함께하겠다는 말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당신이 말씀하신 것을 충분히 숙고했고, 약속하신 대로 도움을 주신다면 제가 거절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제 독단적인 생각일 뿐이고 당신은 저와 함께하는 이들에게 확실한 허락을 얻어 내야 할 겁니다. 준비하셨다는 선물을 갖고 와 주세요. 기다리겠습니다.」

    모든 준비를 마쳤다.

    *

    달빛이 어스름히 들어올 즈음 눈을 떴다. 이엘은 누군가에게 두들겨 맞은 것처럼 무거운 몸을 이끌고 방을 나왔다. 쓰러진 그녀를 별저에 둘 수 없어, 노아는 제 성에 거처를 마련했다. 그러나 여기선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 없을 것 같아, 이엘은 원래 머물던 저택으로 가기 위해 램프를 들었다.

    모두가 잠든 새벽이니 커다란 복도엔 인기척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커다란 슬리퍼를 질질 끌다시피 무기력하게 걸음을 옮겼다. 긴 계단을 내려와 그대로 성을 나가려 문고리를 잡았지만 문을 열 수는 없었다. 뒤에서 누군가 그녀를 와락 끌어안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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