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왕.”
“뭐?”
“왕이 갖고 싶어.”
왕이 되고 싶단 소리야? 처음엔 말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그렇게 물었다. 그러나 패티스의 물음에 피시는 고개를 저었다.
늘 물기가 어려 있던 눈동자에 강한 집념이 번져 가기 시작했다. 하이에나 특유의 지독한 집착이 제 형에게서 보이자, 패티스는 그를 채근하려던 입을 다물고 말았다.
“아니. 나 말고.”
“그러니까 어떤 왕을 갖고 싶단 거야. 말을 제대로 해.”
“내가 갖고 싶다고 하면…… 세워 줄 거야?”
“일단 들어 보고. 생각해 놓은 인재라도 있어?”
그럼 그렇지. 어차피 제정신이 아니다. 대충 달래서 방으로 돌려보내는 쪽이 덜 피곤하다. 패티스는 그 생각을 하며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한 조이나의 침대에 걸터앉았다. 이렇게 앉고 보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언제나 이곳에서 자신을 반겨 주던 그녀가 떠올라서.
‘또 철없이 굴었다간 혼날 줄 알거라, 패티.’
‘누님은 늘 제게만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쌍둥이임에도 패티스는 늘 그녀를 공대했다. 그건 암컷을 향한 존경과 사랑이었다. 틀림없이 차기 백작 위에 오를 제 누이를 향한 경애였다. 언제나 늠름하고 공의롭고 아름다운 제 손위 누이는 역대 백작 위를 지낸 모든 암컷들 중에 가장 뛰어난 존재였다. 그의 자랑스러운 상관이었다.
그렇게 쉽게 죽어 버릴 여자가 아니었다.
그의 세계에서 쉽게 사라질 존재가 아니었다고.
‘그래도 좋지 않니. 나는 이 땅이 참 좋다. 바다와 근접해 있다고 버려두기엔 너무도 아름다운 땅이 아니니. 패티, 늘 좋은 것만 보고 생각하렴. 긍정적인 생각을 해야 네 삶이 풍요롭지. 난 너희와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족해.’
아직도 침실엔 조이나의 냄새가 가득했다. 언제까지고 이 방에 있을 줄 알았는데. 늘 자신들을 지켜 주던 누님의 마지막을, 패티스는 보지 못했다. 저 멍청한 형님이 넋 놓고 지켜보는 새에 주군이 죽어 버렸다.
목숨을 걸고 지켰어야 할 그의 소중한 누이가, 주인이, 군주가…… 허망하게 사라졌다. 저도 모르게 쥐고 있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오헬.”
“뭐?”
그런 패티스를 상념에서 빠져나오게 한 건 피시의 다음 말이었다. 패티스는 제 귀를 의심하며 되물었다. 뭐? 누구?
“오헬을 나의 왕으로 세울래.”
“…….”
“그렇게 해 줘, 패티스.”
“아무리 내가 네 미친 소리에 장단을 맞춰 주기 위해 왔다지만, 그건 정도가 심하지 않나?”
어떻게 그딴 소릴 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분노가 치민 패티스가 가슴을 크게 들썩거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다름 아닌 인간이다. 우리를 그렇게 죽여 버렸던 인간. 나에게서, 그리고 너에게서, 우리에게서 조이나를 앗아 갔던 인간이라고! 금방이라도 피시를 때릴 것처럼 주먹을 세게 쥐던 패티스의 앞에 피시가 무언가를 내밀었다.
“이거.”
“뭐야, 그거.”
“반지.”
붉은 루비 반지가 잠깐 반짝거렸다. 피시가 건넨 반지를 받은 패티스는 미간을 좁히며 입을 다물었다.
“황녀의 반지로 알려져 있어.”
“어디서 난 건데.”
“세잔티노에서 도망쳤던 인간 남자.”
“…….”
“그 남자가 갖고 있던 거야.”
의외긴 했지만 사실 황녀의 반지는 큰 의미가 없다. 태어나는 황녀들에게 만들어 선물하는, 하고많은 보석 중 하나일 뿐이다. 반지를 손에 들고 무심하게 돌려 보던 패티스가 흥미를 잃고 다시 피시에게 던졌다.
“갑자기 웬 반지 타령이야. 필요 없어. 보석이라면 우리도 차고 넘치잖아.”
“원래 오헬 거였어.”
“뭐……?”
“너도 느꼈잖아.”
“…….”
“그 아인 황족이야.”
피시의 눈에 더없이 따뜻한 감정이 어렸다. 역겨운 황족 이야기를 하는 것치곤 그는 너무 행복해 보였다. 조이나의 뒤를 따라 자진하려던 놈치고는 너무나 생기가 넘쳐 보인다. 마치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은 것처럼.
잠깐. 뭐?
패티스는 자리에 벌떡 일어선 채 제 형제를 가만히 쳐다봤다. 머리가 나빠,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그런데도 직감이, 본능이 무언가 말하고 있다. 덜덜 떨리는 패티스의 주먹을 바라보던 피시가 다시 황녀의 반지로 시선을 돌렸다.
그 아이의 냄새가 묻어 있는 것 같아. 지금 나랑 함께 있는 것 같아. 작게 중얼거린 피시가 반지를 감히 껴 보지도 못하고 주머니에 고이 넣었다. 마치 그녀를 대하듯 더없이 소중하게.
“너도 곧 알게 될 거야.”
“…….”
“그 아인, 우리의 왕이 될 수밖에 없어.”
이번만큼은 미친 소리라고 힐난할 수 없었다.
*
결국 내쫓아 버렸다. 상처가 온전히 치료된 건 아니었지만 계속 두기엔 다소 위험한 종족이었다. 이엘도 그를 내쫓는 것에 딱히 반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노아는 왕성으로 돌아오자마자 우논들을 시켜 이카르를 영지 밖으로 완전히 내쫓았다.
“아까는 놀랐다고요!”
심통이 난 앤디가 노아를 향해 소리를 쳤다. 노아는 듣는 시늉도 하지 않고 제 옆에 있는 이엘의 손목을 부드럽게 그러쥘 뿐이었다.
억세게 잡아챈 탓에 그녀의 손목에 아직도 붉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 이래서 내키지 않았던 건데……. 이엘은 그런 노아를 향해 작게 웃어 주었다. 그런 두 사람을 못마땅하게 쳐다보던 앤디가 이번엔 이엘을 향해 한 소리 했다.
“너도 말이야. 뭔가 계획이 있었으면 미리 언질을 줬어야지!”
“저도 갑작스러운 일이었어요.”
“끝까지…….”
부들부들 몸을 떨며 눈을 가늘게 뜨고 이엘과 노아를 노려봤다. 도중에 저 둘이 무슨 눈빛을 주고받는 것까진 알아챘는데 뭔 계획을 꾸미는 것인지는 알지 못했다. 애당초 눈빛만으로 그녀의 마음을 알아챈 노아가 대단한 거지만.
“이카르는 폐하의 말씀대로 곧 돌아올 거예요.”
“아무리 재규어라고 해 봤자, 혈혈단신으로는 여기 접근하지 못해. 머릿수로 밀리는 걸 빤히 알 텐데.”
“재규어는 완전히 멸족되지 않았어요. 그 수가 극히 줄어들었을 뿐이에요.”
그건 맞다. 1차 전쟁이 있기 전, 모종의 이유로 선황―당시엔 황태자―이 명령을 내려 재규어는 일찌감치 파멸을 맞았다. 그 이후로 일족이 흩어져 살았고 1차 전쟁 땐 인식표 추적기로 숨어 살던 극소수의 암컷들마저 모조리 죽었다.
뭉쳐 사는 다른 종족에 비해 죽었을 확률이 클 뿐이지, 전부 죽은 것은 아닐 것이다. 애당초 재규어는 단독 생활을 즐기는 종족이기도 했고. 흩어졌다고 해서 모두 죽었을 리 없지.
다만 노아를 비롯한 다른 늑대들이 재규어의 멸족을 단언했던 건 수십 년 동안 그들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2차 전쟁 때도 그들을 본 종족이 없었다. 원한을 갚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을 텐데도 나타나지 않았다는 건 멸종했거나, 복수 따위 꿈꿀 수 없을 만큼 열악한 위치이거나 둘 중 하나일 터였다.
“그나저나 환심은 어떻게 산 거야?”
앤디가 줄곧 궁금했던 것을 질문하자 이엘은 씁쓸하게 목걸이를 매만졌다. 이건 신의 인도일까, 악마의 계략일까. 순탄한 길이 펼쳐진 걸까, 아니면 비극적인 길에 들어선 걸까. 웃을 수 없는 상황에 웃음이 나왔다.
“신의 안배였어요.”
아, 또 그 소리야? 맥이 풀린 앤디가 투덜거렸다. 쟨 말하기 싫으면 꼭 저렇게 말을 돌리더라. 그의 투정에 이엘이 애써 웃었다. 그러곤 노아를 향해 입을 뗐다.
“폐하. 혹시 제국서 같은 책을 구할 수 있을까요?”
“제국서는 왜?”
“궁금한 게 생겨서요.”
사실 제국서는 어릴 때도 봤으니 별 도움은 안 될 것이다. 재규어의 멸족은 표면적으로는 황실에 대한 명령 불복종에 의한 처벌이었다. 병력을 차출하라는 황실의 명령에 유일하게 반발한 종족이었고, 끝내 역모라는 죄명이 내려져 황실기사단이 멸족시켰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이유. 정확히는 당시에 있었던 황실 연구 때문인 것으로 알고 있다. 황실은 이전부터 이종족의 능력을 이용할 실험을 진행 중이었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게 타이곤과 라이거였고.
그리고 또 다른 실험들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이종족의 능력을 뽑아내 인간에게 접목시키는 것이 그중 하나였다. 피험자로 먼저 오르내리던 종족이 바로 재규어였다. 재규어는 몸의 크기를 줄이거나 키울 수 있었는데, 그게 인간이 갖고 있는 호르몬과 상응할지 모른다는 의문이 제기된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헛된 의문이었으나, 그 헛된 의문 하나 때문에 재규어는 멸살됐다.
“재규어 때문인가?”
노아의 물음에 이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서엔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이유만 적혀 있다. 그건 최근에 그 책을 꼼꼼하게 읽은 노아가 더 잘 알고 있다.
“재규어에 관한 이야기는 별로 없어. 역모죄로 죽여 버렸다는 게 전부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서요.”
이엘이 확인하고자 하는 건 그게 아니었다.
그 기간. 재규어 토벌 명령이 내려왔던 시기. 분명 이카르는 그렇게 말했다.
‘내가 무사히 도망칠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했고.’
어머니가 어디까지 엮여 있는 건지 모르겠다. 기억이 맞다면 재규어 토벌전은 어머니가 혼례를 올리기 전이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알고 있었던 걸까? 알고 있었다면 왜 아버지와 결혼한 걸까. 물론 황실과의 결합을 어린 영애의 반대로 간단히 미룰 수 있는 건 아니다. 게다가 어머니의 외척 가문은 이종족을 끔찍하게 생각하는 쪽이니 더더욱 그랬을 것이고.
다만 마음에 걸리는 건 어머니의 이후 행보였다. 재규어는 멸살됐고, 자신은 억지로 황태자와 결혼을 했다. 그냥 한낱 풋사랑으로 치부하기엔 그녀는 자신과 이온에게 첫사랑 이야기를 해 줄 정도로 얕은 감정이 아니었음을 내보였다.
무려 종족 하나가 멸망했다. 그 안에 제 어미가 사랑하는 남자도 있었단다. 그런데도 모든 걸 용서하고 감내하며 살았다? 어머니는 인자하고 너그러웠지만 겁이 많거나 순종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그 순간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기 시작했다. 무언가 머릿속을 박박 긁고 있는데 그게 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어라. 그토록 원한다면 친히 해 주지.’
억―! 갑자기 숨통이 막힌 것처럼 새하얗게 질린 이엘이 바닥에 고꾸라졌다. 깜짝 놀란 늑대들이 그녀에게 다가왔지만, 이엘은 저를 향해 다급한 손을 뻗는 노아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눈을 감아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