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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151화 (151/488)
  • 151화

    동시에 씁쓸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녀가 자신과 이온을 사랑했다는 사실과는 별개로, 정말로 제 어미는 다른 이와 혼인을 하려 했구나 하는. 놀랍고, 안타깝고, 섭섭한…… 그런 기분.

    목걸이를 받아 목에 걸었다. 의미 없이 반지를 만지작거리는 그녀를 힐끗 보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누님이 네게 형님 이야기를 했나 봐? 알고 있었나?”

    “어릴 때 들었어요. 상대가 재규어라고는 말하지 않았지만요.”

    “론 후작가는 이종족을 심하게 배척하는 가문 중 하나였어. 그녀의 아비가 형님을 달가워할 리가 없지.”

    “…….”

    “썩 좋은 결말은 아니었으니 네게 상대가 이종족이란 말도 하지 않았을 거다.”

    불현듯, 그런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재규어 멸살에 어머니의 일이…… 관련된 건 아니겠지. 아니길 간절히 바랐다.

    “네 눈알과 머리색.”

    “…….”

    “기분 나쁠 정도로 알렉산드로를 닮았군.”

    선황의 이름을 씹어뱉듯 말하는 남자의 말에는 깊은 혐오감이 배어 있었다.

    “하지만 네가 리카르디스의 아들이라면…….”

    그가 검은 눈동자를 굴려 이엘의 목에 걸린 반지로 시선을 돌렸다. 씁쓸한 기분이 드는 건 저쪽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남자는 한참 만에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손댈 마음 없으니까.”

    되레 내가 보호해 줘야 하는 건 아닌가 싶군. 어울리지 않는 농담까지 내뱉은 남자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대충 쓸어 정리했다. 애써 환기시키려 말을 돌렸다.

    “아르세니온……이라고 불러야 하나? 내 이름은 이카르다. 멸족당해 버린 재규어의 유일한 직계이자 네 어머니의 오랜 친구지.”

    과거엔 소백작으로 불리던 시절도 있었는데. 이카르는 그 시절을 떠올리며 속으로 쓴웃음을 삼켰다. 이제 와 옛날이야기를 해 봤자 뭐가 달라지겠는가. 백작가가 무너진 것도 사실이요, 제 종족이 죄 죽어 버린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씁쓸하고 괴로운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토록 바라던 이종족의 세상이 도래했는데도 자신은 그 광영을 누리지도 못한다.

    그 찬란했던 재규어가, 이제는 겨우 하루 사냥으로 한 날의 목숨을 연명하고 있다는 게 수치스럽고 비탄스러웠다. 심지어 지금 이 상처는 새끼 코끼리를 사냥하려다 무리에게 짓밟혀 생긴 것이 아니던가. 몸을 작게 만들어 도망치지 않았더라면 꼼짝 없이 죽었을 것이다.

    비참하고 비참해서, 이카르는 매일매일 눈 뜨는 게 고통스러웠다.

    “어머니를…… 잘 아십니까?”

    “말했잖아. 나에겐 친누님 같은 존재였다고.”

    “…….”

    “내가 무사히 도망칠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했고.”

    하지만 결국 그게 시발점이 되었던 걸까. 이카르는 무거운 마음을 억누르며 깊게 숨을 뱉었다. 일단 그건 그거고.

    “근데 넌 왜 늑대의 영지에 있는 거지? 늑대는…… 황족에게 원한이 깊을 텐데.”

    누군들 아니겠냐마는. 이카르 자신도 황족이라면 눈알을 죄 뽑아 버리고 싶을 정도로 원한이 컸다. 눈앞에 있는 소년은 단지 리카르디스의 아들이기 때문에 예외를 둔 것이고.

    그러나 늑대는 아닐 텐데. 냉정하기 짝이 없는 늑대들이 왜 황족을 제 무리에 둔 걸까. 정체를 숨기고 있는 건가? 그게 아니면 납치라도 됐나? 여러 가정을 담은 그의 눈빛에 이엘은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운을 뗐다.

    “그 전에 하나만 물어봐도 되나요?”

    “뭔데.”

    “당신은 늑대들과 원한 관계인가요? 단순히 먹이사슬을 두고 싸우는 것 말고요.”

    “개인적으로 늑대를 싫어하긴 하지. 알면서도 모른 척했거든.”

    “…….”

    “분명 소공작…… 이젠 왕이 됐으려나? 그 자식은 토벌전을 알고 있었을 거다. 알면서도 묵인하는 것 역시 똑같아. 설령 몰랐다고 해도 우리가 멸족당한 것에 함께 분노하지 않았어. 여전히 인간과 살가운 관계를 유지했지.”

    “…….”

    “그러니 놈들도 배신을 당한 거다. 인간 따위 믿어서는 안 되는데.”

    “그런가요.”

    “그것 말고는 딱히 원한이 있진 않아. 지금은 다른 이종족에게 그런 마음을 가질 여유도 없고.”

    그런 건 왜 묻냐는 표정으로 이카르가 이엘을 쳐다봤다. 이엘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알겠습니다. 상처가 많이 회복되어 다행이네요. 아마 새벽쯤에 늑대들이 쫓아낼 거예요. 다음에 다시 만나게 될 때까지 몸 건강하길 바랍니다.”

    “내 질문에 답하지 않았잖아. 넌 왜 여기 있냐고.”

    “늑대에게 의탁하고 있어요.”

    “뭐?”

    무슨 말도 안 되는……. 눈을 크게 치뜬 이카르를 향해 이엘이 감사를 담아 공손히 인사했다.

    “어머니의 유품, 감사합니다.”

    “아르세니온.”

    “그 이름으로 부르지 말아 주세요.”

    “…….”

    “저는 아르세니온이 아니에요.”

    미간을 좁힌 남자를 향해 이엘이 맥없이 말을 이었다.

    “딸입니다.”

    “…….”

    “어머니의 이름을 가운데 이름으로 받은, 딸이에요.”

    다소 충격적인 발언이었던 건지 이카르는 그 자리에 굳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차피 오늘 새벽이면 영지를 떠날 텐데 굳이 제 정체를 밝힐 필요는 없었다. 정말 이쯤에서 관계를 끊을 생각이었다면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돌려보내는 게 옳았다.

    하지만 이엘은 그러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와 깊은 유대 관계를 가졌고, 자신이 황족임을 알면서도 보복하지 않고 되레 누그러진 눈빛을 보냈다. ……그리고 꿈에 나왔지.

    일종의 도박이다.

    “너 어떻게…… 어떻게 살아남은 거야?”

    “정신을 차려 보니 홀로 살아남았어요.”

    “…….”

    “오빠는 저를 대신해서 죽었고요.”

    담담하게 말하는 그녀를 바라보며 이카르가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신분을 숨겨야 할 처지라서…… 늑대에게 의탁하는 중이에요.”

    “늑대가…… 알면서 받아 줬다고?”

    “사정이 있었지만 받아 주기로 했어요.”

    리카르디스의 딸. 암컷과 인간 여자가 모조리 죽어 버렸는데…… 누님, 당신의 딸이 살아 있다고? 그의 짙은 눈동자가 옅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가만히 지켜보던 이엘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애써 웃었다.

    “괜찮아요. 늑대는 강한 편이고 다른 곳에 있어도 제 처지는 똑같으니까요. 이곳이 그나마 낫습니다.”

    “그나마 낫다니. 늑대는 널 이용해서……!”

    “주둥이를 나불거리는 걸 보니 지금 당장 쫓아내도 되겠군.”

    문이 박살 나듯 벌컥 열렸다. 들이닥친 늑대들은 금방이라도 휘두를 것처럼 검을 이카르에게 겨누었다. 어제와 다를 게 없었다. 이카르는 조금 전까지 이엘을 바라보던 시선과 정반대의 감정을 담아 늑대들을 노려봤다. 다른 종족을 향한 원한을 품을 여유 따위 없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인내하고 싶지도 않았다.

    “소공작, 아니. 이젠 왕이라고 불러야 하나?”

    노아를 향해 비죽거리며 웃었다. 이카르의 기분 나쁜 웃음소리에 늑대들이 잔뜩 흥분해서 달려들 듯 굴자, 노아가 그들을 말렸다. 마치 최후의 변론을 들어 주기라도 할 것처럼 고요하고 우아한 동작이었다. 이카르는 부리부리한 눈으로 노아를 쳐다보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모든 건 그대 때문이다.”

    “…….”

    “그대가 내 종족의 멸망을 두고 보지만 않았다면. 1차 전쟁 같은 건 없었을 테지.”

    말도 안 되는 책임 전가였다. 늑대들이 광분해서 이를 세우고 크기를 부풀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노아가 서늘한 얼굴로 요지부동이었기 때문에 나서서 공격할 순 없었다. 그러나 왕의 신호가 떨어지는 대로 달려들어 재규어의 숨통을 끊어 놓을 생각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카르는 늑대들을 비웃으며 노아를 향해 싸늘하게 말했다.

    “멍청하게 그 칼날이 그대에게 돌아갈 거라는 걸 정녕 몰랐나?”

    “너를 소백작 취급해 주는 건 거기까지다. 지금 네가 입을 함부로 놀려서 좋을 게 전혀 없을 텐데.”

    “왜? 내가 머릿수로 밀려서?”

    “…….”

    “비겁하게 머릿수로 밀어붙이는 건 늑대들의 교묘한 사냥법 아니었나?”

    주먹을 쥔 노아의 손등 위로 푸른 핏줄이 섰다. 분노로 인한 게 아니었다. 아니란 걸 알면서도 재규어의 말이 너무 비수가 되어 박혀서. 잊고 싶었던 기억이 자꾸만 그를 괴롭혀서. 노아는 거친 숨을 억눌러 삼키며 말을 아꼈다.

    “그런 식이라면 전부 제 잘못이 됩니다.”

    침묵하던 이엘이 입을 열었다. 이카르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제 아비가 벌인 일이니 책임은 오롯이 제 것이지요.”

    “이상한 소리 마. 넌 죄 없다.”

    그 말을 노아가 아닌 이카르 쪽에서 나오자 늑대들이 되레 놀랐다. 뭐야? 뭔데 오헬 편을 들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이엘은 씁쓸하게 웃으며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그러니 제가 이곳에 있는 겁니다.”

    “…….”

    “제 아비의 죄를 갚기 위해서요.”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냐는 표정으로 늑대들이 이엘을 쳐다봤다. 앤디가 대체 뭔 소리냐며 뭐라고 하려는 것을 노아가 서둘러 말렸다. 그는 뚜벅뚜벅 걸어가 이엘의 옆에 섰다. 그러곤 그녀의 어깨를 팔로 감싸 제 품으로 강하게 끌어당겼다. 노아답지 않은 강압적인 행동에 늑대들이 미간을 찌푸렸다.

    노아는 이카르를 향해 비웃듯, 싸늘한 말을 던졌다.

    “왜. 너 역시 선황에게 원한이 깊지 않았던가?”

    “…….”

    “원한다면 황족의 씨앗을 네게 넘겨줄 수도 있다.”

    마치 이엘을 물건 취급하는 노아의 말투에 기함한 건 늑대들이었다. 앤디가 멍청하게 눈을 끔뻑거리다가 이엘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정작 이엘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네 손으로 죽이고 싶다면, 이걸 기꺼이 네게 주겠다.”

    “…….”

    “그렇게라도 네 일족에 대한 예우를 표하지.”

    노아는 제 품에 파묻히듯 갇혀 버린 이엘의 가느다란 숨소리를 들으며 피식 웃었다. 결국 재규어까지 끌어들이겠다고. 여전히 내키지 않지만…… 네가 원한다면. 내가 어떻게 반대를 하겠는가.

    “다만 힘을 키워 돌아와라. 그따위로는 내게 적수가 되지 못한다.”

    적당히 속을 뒤집어 놓고는, 끌고 가다시피 이엘을 데리고 그 공간을 빠져나갔다.

    *

    “피시는?”

    “조이나 님의 침실에 계십니다.”

    “한심하긴.”

    신하의 면전에 대놓고 제 형제를 욕한 패티스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하여간 도움이 되질 않는 형님이다. 조이나가 살아 있을 때도 무능하긴 했지만 저 정도로 멍청하진 않았는데. 그녀의 죽음은 가슴 아파할 만하다. 자신 역시 그녀의 죽음으로 인해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그건 그거고 현실은 현실이다. 와해되어 멸족당할 뻔한 종족을 겨우 하나로 뭉쳐 놨는데 왕자란 자가 아직도 현실과 꿈을 구별 못 하고 멍청하게 헤매는 꼴이란. 이래서 수컷들은 쓸데가 없다. 혀를 쯧 차며 조이나의 침실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돌렸다.

    침실 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패티스의 옅은 색채의 눈동자가 데로록 굴러 새하얀 침대 시트에 닿았다. 침대 아래 깔린 카펫에 무릎을 꿇고 시트에 얼굴을 파묻은 그의 형제가 그곳에 있었다.

    보기만 해도 부아가 치밀어, 패티스는 발소리가 크게 날 정도로 피시를 향해 무서운 기세로 다가갔다.

    “피시. 계속 이딴 식으로 할 거야?”

    “…….”

    “널 내쫓으란 여론을 누가 잠재우고 있는지 정말 몰라?!”

    패티스가 신경질적으로 들고 있던 서류 다발을 내던졌다. 하루가 멀다 하고 앞으로 쏟아지는 청원들에 골이 아플 지경이었다. 최근 들어 정신을 차린 것 같았는데 세잔티노 사건 이후로 또 저 모양이다.

    “네 꼴을 보고 죽은 누님이 퍽이나 좋아하겠어.”

    “…….”

    “다시 탑에 가둬 줘? 평생 그렇게 살고 싶으면 말해. 그렇게 해 줄 테니까.”

    “……패티.”

    “말해. 대체 왜 이러는 건데?”

    “나 갖고 싶은 게 있어.”

    “뭐?”

    “정말…… 너무 갖고 싶어.”

    시트를 쥐고 있던 손이 바르르 떨렸다. 줄곧 파묻고 있던 얼굴을 들어 올렸다. 안경을 쓰지 않은 피시의 맑은 얼굴과 패티스의 일그러진 얼굴이 극과 극이었다. 닮은 듯, 닮지 않은 얼굴이 한참이나 서로를 응시했다.

    “뭔데.”

    꼴도 보기 싫은지 미간을 잔뜩 구긴 패티스가 지겹다는 말투로 물었다. 순수한 소년의 눈동자가 그를 향해 몇 번 깜빡거렸다. 긴 침묵이 이어졌지만 패티스는 의외로 끈기 있게 제 형의 다음 말을 기다려 주었다. 속 터지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기다리는 게 뭐 어렵겠는가.

    그러나 마침내 터져 나온 피시의 말은 예상외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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