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앤디가 살짝 눈가를 구겼다. 그런다고 오헬이 모를까요? 그의 물음에도 노아는 아무 말 없이 턱짓을 했다. 시끄러우니 입 다물고 나가란 소리였다. 속으로 혀를 찬 앤디는 고개를 숙이곤 집무실을 나갔다. 노아는 커다란 창이 있는 곳에 습관적으로 다가갔다.
다시 정원을 출입하기 시작한 이엘이 그곳에서 늑대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녀는 고개만 들면 곧바로 자신이 보인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작게 웃으며 떠드는 것에 집중하고 있었다.
“손…… 조심해야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들고 있던 가위에 이엘이 손을 다칠 뻔한 것이다. 괜히 저가 움찔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렇게 웃지만 말고 앞을 보는 게 좋을 텐데. 그러나 이엘은 뭐가 그렇게 웃긴 건지 연신 웃음꽃을 피우며 대충 가위를 휘두르고 있을 뿐이었다. 그 모습에 결국 노아도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바싹 말라서 보는 사람을 애타게 만들었던 몸에 어느 정도 살이 올라 안타까움은 면했다. 여전히 군데군데 마른 곳이 보여 안쓰러웠지만 처음 이곳에 왔을 때와 비교하면 상당히 나아졌다. 그만큼 네 생활이 안정됐다는 뜻이기도 하겠지.
‘종족 번식을 들먹이겠죠.’
‘뭐?’
‘그녀가 이길 승산은 그것 하나뿐입니다, 폐하.’
낯빛 하나 바뀌지 않은 안드로가 그 말을 내뱉었을 땐 노아의 얼굴은 참담하게 무너졌다. 그게 어떻게…….
‘물론 강제할 수도 있겠지만요.’
‘…….’
‘이종족이 암컷을 간절히 바라는 건 성욕 때문이 아닙니다. 종족 번식. 그 이유가 큽니다. 우리의 첫 번째 본능이니까요. 제 추측이지만…… 만일 오헬이 새끼를 낳아 주는 조건으로 이종족들과 거래를 한다면, 어떤 종족이라도 찬성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건…….’
‘또 모르죠. 선택받은 종족에게만 새끼를 낳아 주겠다고 하면, 다른 형태의 전쟁이 벌어질지도요.’
‘…….’
‘선택을 받기 위해 이종족 간 맹목적인 전쟁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하다. 가장 가능성이 있는 추측. 이종족은 인간과 다르기 때문에 암컷을 다른 수컷, 특히 타 종족과 공유할 마음 따윈 없다. 만일 이엘이 나서서 몇몇의 종족에게만 후손을 보겠다고 한다면, 안드로의 말처럼 그녀를 사이에 두고 이종족끼리 대치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역시 이종족이 강제할 수도 있다는 점이…… 조금 걸리는군요.’
‘무슨 일이 있어도 안 돼.’
‘…….’
‘절대 안 된다, 그건.’
깔깔 웃는 소리가 노아를 상념에서 현실로 끌어냈다. 정원에서 가지치기를 하던 이엘은 장난치기 바쁜 테르들과 뛰어다니며 눈부실 정도로 예쁘게 웃고 있었다. 펄럭거리는 옷 사이로 하얀 팔다리가 순간순간 보였다. 노아는 미간을 좁히며 주먹을 바르쥐었다.
솔직히 말해 볼까. 그는 그녀에게 종족 번식의 의무 따위를 지우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이엘을 제 반려로 인식한 것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저렇게 가느다란 몸에 또 다른 생명을 잉태하는 건, 그것도 이종족의 씨를 갖는다는 건 상상도 못할 온갖 고난을 동반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물론 노아 자신도 이종족이었다. 그 역시 종족 번식을 향한 욕구가 가장 크다. 그녀를 닮은 아이. 자신을 닮은 아이. 이 너른 들판에 그 아이가 뛰어놀 모습을 생각하니 심장 한구석이 몹시 설레고 기뻤다.
하지만 자신은 이미 사랑에 눈이 멀어 버린 멍청이가 되었으니.
제 새끼를 보는 것보다 이엘이 상처 하나 없이 눈앞에 존재하는 게 더 중요했다. 구태여 위험 부담을 안고 임신하는 모습을 원치 않는다. 물론 어디까지나 그녀가 원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서. 그녀가 원한다면 무엇인들 못 하겠는가.
다만 우리의 죄로 벌어진 일에 네가 책임을 져서는 안 되니까.
‘뱀들이 가만히 있진 않을 겁니다.’
‘…….’
‘암컷을 만드는 일에 가장 혈안이 되어 있는 건 놈들이니까요.’
노아는 주먹을 꾹 쥐며 짧게 호흡을 내뱉었다. 그래서 이 계획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가뜩이나 그녀에게 이상할 정도로 집착하고 있는 로빈인데, 이엘이 여자라는 게 밝혀진다면……. 그 미친 뱀이 어떻게 나올지 짐작도 되지 않는다.
나는 되도록 네가 평탄한 길을 걷길 바라는데. 내가 망쳐 버린 네 인생이 비단길이 되지 못할 것을 알기에, 최소한 가시밭길은 아니길 바라는데.
아무리 네가 외면당하던 황녀였다고 한들, 지금의 삶보단 그때의 황궁 생활이 더 낫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걸 내가 모조리 망쳐 버렸는데도 넌 내게서 아무것도 받지 않으려 해.
‘황자는…… 아르세니온 황자는 제게 숨을 쉴 수 있는 유일한 피난처였어요.’
어느 날의 이엘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피를 나눈 오라비가 그녀의 괴로운 황궁 생활의 유일한 피난처였다고.
‘내가 가지고 있던 유일한 내 소유였지만…….’
뒷말은 하지 않고 웃으며 말을 돌렸다. 이엘은 황자의 이야기만은 하지 않으려 했다. 전쟁 이전의 삶에 관해선 무엇이든 말을 줄였지만 아르세니온 황자의 이야기는 정도가 심했다. 무언가 감추려는 것 같기도 했고, 떠올리기 싫어하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확실하다. 그녀의 유일한 소유였다는 그 쌍둥이를 죽여 버린 건 노아였다.
그러니 정말로 내가 네 모든 것을 망쳐 버린 셈이다. 네가 갖고 있던 것을 몽땅 빼앗아 버린 게 바로 나였다. 노아는 따끔따끔하게 느껴지는 간헐적인 가슴 통증에 눈을 깊게 감았다.
*
“쫓아낸다고?”
“응. 어른들이 하는 얘기 들었는데 새벽에 성 밖으로 쫓아낸다고 했어.”
매정한 처사이지만 이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재규어는 과거, 작위를 받을 정도로 위협적인 맹수였다. 새끼도 아니고 성체인 맹수를, 다른 맹수인 늑대의 무리에서 보호할 이유는 없었다. 이엘 역시 어디까지나 제 꿈을 증명하기 위해 데려온 셈이었으니, 치료를 마친 지금에선 돌려보내도 문제 될 건 없었다.
“근데 너를 찾는 것 같았어.”
나를? 그녀의 물음에 로날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의도치 않게 첩자 노릇을 하게 된 로날드는 이걸 말해도 되나 싶은 낯으로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언제나 그렇듯 로날드는 이엘에게 비밀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리카르디스, 라고.”
“뭐?”
“리카르디스 어쩌고의 아들이냐고 그러던데. 중얼거리는 걸 밖에서 엿들었어.”
“…….”
“다른 말은 잘 모르겠는데 리카르디스는 네 가운데 이름이잖아.”
이엘이 입술을 짓씹었다. 그녀는 서둘러 옷장에서 긴 망토를 꺼내 몸에 걸쳤다. 어딜 가느냐며 소리치는 로날드를 향해 쉿, 입단속을 시켰다.
“나 잠깐 재규어에게 다녀올게.”
“같이 가.”
“조용히 다녀올게. 괜찮으니까 여기서 기다려. 혹시 우논 님들이 오면 적당히 둘러대 주고. 응? 그래 줄 수 있지, 로니?”
“하지만……. 알겠어. 대신 빨리 다녀와. 위험하니까 이거도 가져가.”
벽에 걸어 두었던 검집을 물어 그녀의 발치에 내려놓았다. 고맙다며 로날드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이엘은 서둘러 저택을 빠져나왔다. 왕의 후원이니 누구의 출입도 없겠지만 혹시나 눈에 띌까 잰걸음으로 재규어가 거하는 곳을 향했다.
경비가 삼엄했다. 오늘 새벽에 쫓아낸다는 말이 사실이긴 한 모양인지 우논들이 잔뜩 모여 열띤 토론을 하고 있었다. 이엘은 늑대들이 냄새를 맡지 못하도록 바람을 이용해 재규어가 있는 곳으로 숨어들었다. 이러고 있으니 마치 첩자라도 된 것 같아 마음이 못내 불편하긴 했지만.
“찾아올 줄 알았다.”
문을 열고 들어선 그녀의 앞으로 장검이 다가와 있었다. 어느 틈에 검까지 빼돌린 건지. 차갑게 굳은 이엘의 얼굴을 마주하던 남자는 이내 검을 거두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백금발을 가볍게 쓸어 넘긴 남자가 눈을 가늘게 뜨며 이엘을 위아래로 훑었다.
“누님과 소름 돋을 정도로 똑같군.”
“무슨 소릴 하는 건지 모르겠군요.”
“리카르디스 론.”
“…….”
“네 어미의 이름 아니던가?”
눈앞에 있는 남자의 머리카락은 어머니의 말처럼 정말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백금발이었다. 저렇게까지 아름다울 수 있을까?
제법 긴 침묵이 오고 갔다. 내 목이라도 쥐어틀까? 이엘이 마른침을 삼키며 남자의 눈동자를 가만히 받아쳤다. 두 사람의 눈동자가 서로를 잡아먹을 듯이 맹렬하게 맞붙었다. 결국 이엘이 침묵을 견디다 못하고 먼저 운을 뗐다.
“그럼 당신이 어머니가 사랑했다던……,”
“아니.”
“…….”
“그건 내 형님이고.”
단호하게 일갈한 남자는 뼈마디가 굵은 손을 뻗어 이엘의 턱을 잡아 올렸다.
“나는 두 사람을 응원하던 쪽이라.”
“…….”
“그녀를 빼닮은 널 보니 못내 그 시절이 생각나네.”
그 시절의 리카르디스 론을 빼닮았다. 이건 친족이 아니고서는 설명이 안 되지. 눈을 뜨자마자 보았던 저 얼굴에 남자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이엘의 턱을 잡고 있던 손을 놔주었다. 반가운 기분이었던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역겨운 기분도 들었다.
저 빌어먹을 검은 머리카락과 녹색 눈동자 때문에.
“잠깐 이야기 좀 할까.”
“…….”
“너와 내가 이 빌어먹을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는가에 관해.”
너도 바라던 바였잖아? 그의 물음에 이엘은 떨리는 손을 뒤로 숨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날 거뒀다는 이야길 들었는데. 늑대들 사이에서 위치가 꽤 되나 봐?”
“하고 싶은 말씀이 그건가요?”
“일단 숨 좀 돌려. 검도 내려놓고.”
남자는 자신이 먼저 들고 있던 검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미간을 좁히고 남자의 동태를 살피던 이엘도 검을 내려놓았다. 늑대들이 위험 요소로 인식한 것과는 달리 남자는 태연자약해 보였다.
반면 이엘은 가슴이 세차게 뛰어 호흡이 자꾸만 흐트러졌다. 어머니의 첫사랑. 솔직히 그게 이엘에게 큰 의미를 갖는 건 아니었다. 다만 그 상대가 재규어였다는 사실과, 역사서 너머로 보았던 재규어 토벌전. 그 시기가 비슷하다는 게 마음에 걸릴 뿐.
“죽은 네 쌍둥이가 살아 있었더라면 그녀와 소름 끼치도록 닮았겠군.”
“자꾸 죽은 사람들 이야기를 하시네요.”
“응. 내 전부였으니까.”
“…….”
“아, 물론 오해는 마. 형님과 치정극은 아니었다. 그녀는 내게 좋은 친구였을 뿐. 아니…… 친누님 같은 존재였지.”
그 말을 하면서 남자가 선선히 웃었다. 미소를 따라 오른쪽 볼에 깊은 보조개가 움푹 팬 게 드러났다.
줄곧 무뚝뚝하기만 했던 얼굴에 그림 같은 미소가 걸리자 비로소 살아 있는 존재처럼 보였다. 빛이 한 점 들어오지 않는 곳인데도 남자가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올리니 그쪽에만 빛이 쏟아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렇게 잘생긴 얼굴로 피식 웃음을 터뜨린 남자는 이내 표정을 갈무리하고 이엘을 쳐다보았다.
“네 쌍둥이는 전쟁 때 죽었나?”
“…….”
“너라도 살아서 다행이군.”
싸늘한 눈동자가 그녀를 위아래로 훑었다. 분명 싸늘하기 짝이 없는데도 이상하게 차갑게 느껴지진 않았다.
그는 물끄러미 이엘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목에 걸고 있던 무언가를 빼기 시작했다. 그의 손에 들린 건 웬 목걸이였다. 남자는 제 손바닥에 올려놓은 목걸이를 그녀에게 건넸다.
“리카르디스…… 그러니까 론 영애가 갖고 있던 것이다.”
“이건……,”
“론 후작가 대대로 내려오는 반지야.”
“…….”
“그녀가 형님께 주었던 거라 갖고 있었는데. 나보단 네가 갖고 있는 게 낫겠군.”
아무런 무늬도 보석도 박혀 있지 않은 단순한 금반지였다. 후작가의 가보라기엔 다소 밋밋한 장신구였다. 그러나 흔하디흔한 반지임에도 어머니의 유품이라는 말 때문인지 괜스레 이엘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