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148화 (148/488)
  • 148화

    *

    “폐하. 잠깐 들어가도 괜찮을까요?”

    “들어와.”

    며칠 만에 허락된 만남이다. 이엘은 걱정을 안고 노아의 침실로 들어섰다. 그는 피로한 얼굴로 그녀를 맞아 주었다.

    “폐하. 식사도 거르셨어요? 안색이 안 좋으세요.”

    “…….”

    마른 웃음을 지어 준 노아는 이엘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무슨 의미인지 몰라 주저하던 이엘은 그 커다란 손 위에 제 손을 얹었다. 노아는 그 손을 돌려 손가락 사이사이에 제 손가락을 끼워 넣었다. 손가락이 서로 얼기설기 엮인 채 한참이나 정적이 흘렀다. 먼저 민망해진 이엘이 손을 빼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그가 그대로 움켜쥐어 당긴 것이다.

    “가장 친했던 친구가 있었다.”

    “…….”

    “그리고 난 처절하게 배신당했지.”

    종족이 다르단 건 그런 의미였다. 결국 어떠한 종류의 감정도 종족의 경계를 넘지 못한다. 그 안에 자신의 이해관계가 엮이게 되면 곧장 남보다도 못한 사이가 되는 것이다. 노아는 지친 얼굴로 가만히 이엘을 응시하다가 씁쓸하게 물었다.

    “네 작은 어깨에 조금만 기대도 될까?”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도 그 순간만큼은 주인에게 버려진 늑대의 모습이었다. 노아가 이렇게나 힘들어하는 모습은 처음 본다. 언제나 냉정하고 언제나 흔들림 없었는데. 오늘의 노아는 잔뜩 흐트러져, 마치 술에 취하기라도 한 것처럼 한껏 음울해 보였다.

    이엘은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그의 얼굴이 제 어깨에 내려앉았다.

    “숨이 막혀.”

    “폐하.”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나 아픈 것 좀 알아 달라고 말하는 모습이 정말 노아답지 않다. 그는 이엘의 앞에서만큼은 자신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내려놓고 싶었다. 나도 쉴 곳이 필요하지 않나? 그게 너였으면 좋겠다.

    “결국 전쟁에서 친구를 죽였다. 내 손으로 죽인 것과 다름없어.”

    “…….”

    “내 스스로가 너무 경멸스럽군.”

    루시우스를 죽여 버리겠다며 이를 가는 르네에게 그러지 말라는 말 따위 할 수 없었다. 그때의 노아 역시 저를 배신한 남자를 죽여 버리고 싶었으니까.

    그는 다를 거라고 믿었다. 신념이 올곧고 바른 루시우스가 자신을 배신할 리 없다고 믿었다. 그러니 그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으리라. 하여 노아는 르네에게 그러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정말 루시우스는 르네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그의 목이 바닥을 나뒹구는 걸 보는 제 마음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괴로웠다.

    양가감정.

    기쁘고, 슬펐다. 후련하면서도 답답했다. 결국 자신이 루시우스를 사지로 내몰았다. 그가 1차 전쟁에 관한 언질을 하지 않았던 것처럼, 자신도 그에게 2차 전쟁에 관한 언질을 주지 않았다.

    똑같다. 결국 나도 똑같았다.

    모든 게 엉망이었다. 그래서 노아는 그날의 기억을 죄 잊고 살려 노력했다.

    하지만 며칠 전 자신이 데려왔던 그 금발의 남자. 눈동자 색만 벽안이었더라면 완벽한 루시우스 러셀의 모습이었다. 생각해 보니 루시우스에겐 두 명의 딸과 한 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렇다면 전쟁 통에 아들은 살아남았던 걸까?

    장성한 친우의 아들일지도 모르는 남자를 바라보는 모습이 어찌나 고역인지……. 숨도 쉬지 못할 만큼 괴롭기만 했다.

    “벌을 받았어. 내가…… 나도 사실 외면했거든. 동맹이 아니라는 이유로 종족 하나가 사라지는 걸 그냥 방관했어. 안일했지. 그땐 내 종족만 지키면 된다는 생각밖에 없었으니까.”

    “노아.”

    “그래서 결국 이 사달이 난 거야. 그때 바로잡았더라면…….”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자신은 어느 시점으로 돌아가고 싶은 걸까. 잘 모르겠다. 노아는 눈을 감고 그녀의 작은 어깨에 이마를 파묻은 채 숨을 돌렸다.

    “나는 완벽한 왕이 아니다.”

    “알아요.”

    “세상에 완벽한 성군은 없어.”

    “…….”

    “어떤 식으로든 그 위치는 독이 될 거야.”

    그가 고개를 들고 지친 표정으로 한참이나 이엘을 바라보았다. 내키지 않는다. 그 위험하고 무서운 자리에 네가 오르는 걸, 나는 내키지 않아. 어떻게든 상처받을 거고 어떤 식으로든 위협받을 것이다.

    “그런데도 하고 싶어?”

    “네.”

    결연한 눈동자가 오롯이 그를 향했다. 노아는 숨 막히게 아름다운 얼굴을 내려보다가 한참 끝에 그녀의 이마 위에 제 입술을 붙였다. 애정이 담겨 있던 평소의 입맞춤이 아닌, 경건하고 경외가 담긴 의식이었다.

    “그렇다면 기꺼이 너의 검이 될게.”

    “노아 님.”

    “가시밭길이 될지 모르는 그 길에.”

    “…….”

    “나는 네 발이 땅에 닿지 않도록 너를 태우고 갈게.”

    늑대들에게 부탁한 건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 내 검이 되어 달란 소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엘은 노아에게 그러지 말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오늘따라 그의 새카만 눈동자가 너무도 우울해 보여서.

    “엘.”

    “네, 폐하.”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널 지킬 거야.”

    “…….”

    “그러나 내 목숨을 바치지는 않을 거다.”

    죽어 있던 눈동자에 다시금 요요한 빛이 돌았다. 노아는 조금 전과 달리 감정이 담긴 입술을 그녀의 뺨 위에 지분거렸다.

    “너를 살리려면 언제까지고 네 곁에 있어야 하니까. 죽지 않아.”

    언젠가 이엘이 그에게 말했다. 죽지 말라고. 제발 죽지 말라고. 세차게 떨리는 손끝으로 그의 생명을 확인하듯 더듬으며 말했다. 제발 죽지 마세요―라고.

    “내가 죽으면 네 곁에 어떤 잔챙이들이 들러붙을지도 모를 일이고.”

    “…….”

    “그건 정말 죽어도 보기 싫거든.”

    이엘이 피싯 웃자, 노아도 그녀를 따라 작게 미소 지었다. 그의 입술이 따뜻하게 움직였다. 핏줄이 팔딱거리는 목덜미에 내려앉았을 땐 이엘은 저도 모르게 몸을 흠칫 떨며 숨을 멈춰야 했다. 노아는 그녀의 허리를 한 팔로 끌어안고 마음껏 향기를 취했다. 정염이 섞인 입술은 끝을 향하지 않고 어깨 위에서 아쉽게 떨어졌다.

    “그러니 너도 나를 선택해 줘.”

    “…….”

    “네가 황위에 오를 때에, 나를 이용해도 좋으니.”

    부담스럽지 않게. 놀라지 않게. 그가 스며들 듯 가까워졌다.

    “너의 마지막까지 함께할 동반자로, 반려로, 친구로, 그리고 가족으로.”

    평생 가져 보지 못한, 가져 보지 못할 단어들이 나열되는 순간 이엘은 저도 모르게 울컥했다.

    “나를 선택해 줘, 나타니엘.”

    기다리는 거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으니까. 자신 있으니까. 우린 인간을 제일 좋아했던 종족이니까. 황실에 충성을 다했던 기사였으니까.

    이번에도 나는 네게 전부를 걸게.

    *

    “샅샅이 뒤져! 잃어버리면 안 된다!”

    우논의 명령에 늑대들이 일제히 뛰쳐나갔다. 정찰을 나갔던 스완에게서 긴급 연락이 왔다. 백조들이 있던 곳에 뱀들이 쳐들어왔다는 소식이었다. 스완은 제 무리에게 바다가 뱉어 내는 보호석의 수집을 부탁했다. 그러던 와중에 뱀들에게 급습을 당한 것이다.

    사실 백조는 무리를 지었을 때 능력이 증폭되는 특성이 있기 때문에 뱀들의 공격 따위 가볍게 방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뱀의 목표는 백조가 아니었다. 무리를 뒤흔들어 그들이 모았던 보호석을 흩어 버린 것이다.

    어리숙하게 당했지만 보호석의 대다수는 수거했다. 뱀 역시 환각으로 전부 쫓아 버렸고. 문제는 강물을 타고 흘러가 버린 보호석 몇 개였다.

    “이대로 강물을 타고 흘러가면 인간들의 손에 들어갈지 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늑대들을 쳐다보며 이엘이 조용히 읊조렸다. 노아의 권역 밖에 숨어 동태를 살피는 뱀의 눈을 피하기 위해 일부만 데리고 이곳을 찾았다. 그리고 오지 못한 노아를 대신해 이엘과 앤디가 이곳의 사령탑을 맡았다.

    보호석을 찾는 일은 독수리의 능력이 절실히 필요했지만 급한 일이라 연락을 취할 시간도 없었다. 게다가 그쪽은 매의 감시가 점점 심해져서 찾아가는 것조차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니 어떻게든 우리끼리 마무리를 지어야 한다.

    각자 맡은 지역을 샅샅이 뒤지는 늑대들을 지켜보다가, 이엘도 빠르게 움직이며 풀숲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나마 스완의 경고로 수거한 보호석의 개수를 미리 세어 두었던 덕에 잃어버린 보호석 개수를 알고 있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잃어버린 것의 개수는 총 네 개. 적은 수였지만 결코 적지 않은 수다.

    “찾았습니다!”

    저 멀리서 테르 하나가 소리를 질렀다. 연이어 두 마리의 보고도 이어졌다. 세 개를 모두 회수했다. 남은 건 딱 하나.

    “오헬! 잠깐만 이쪽으로 와 봐!”

    저 멀리 수색을 하던 로날드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처음으로 성체들과 함께 작전에 투입된 로날드는 그 어느 때보다 더 열정적으로 수색에 참여하고 있었다. 재차 저를 부르는 로날드의 음성을 따라 엉킨 수풀을 헤치고 안으로 들어간 이엘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 자리에 멈춰 서고 말았다.

    “아.”

    “다친 새끼 같은데?”

    로날드가 고개를 기우뚱 기울이더니 커다란 발로 아주 작은 생명체를 툭툭 건드렸다. 캬앙―! 울음소리를 내던 짐승이 다시 맥없이 눈을 감았다.

    피를 철철 흘리며 쓰러진 짐승은 기껏해야 이엘의 손바닥 길이가 될까 말까 할 정도로 작았다. 갓 태어난 새끼도 이 정도로 작진 않을 것이다. 마른침을 삼킨 이엘이 조심스럽게 제 품에 새끼를 안아 들었다.

    어지러울 정도로 박혀 있는 검은 반점들에 이엘은 눈을 뗄 수 없었다.

    “만지지 마, 오헬! 그렇게 보여도 맹수란 말이야. 갑자기 달려들면 어떡해? 내가 대신 들게.”

    로날드가 연신 소리쳤지만 이엘은 저가 안은 새끼를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 공격을 받아 상처를 입은 짐승이 앓는 소리를 냈다. 어쩌면 이렇게 작을까. 이렇게 작은 크기의 이종족은 없다.

    그 종족 외에는.

    “데리고 돌아가자, 로니. 어서 따라와.”

    “잠깐만! 오헬, 그게 뭔지 알아? 그거 맹수라니까?”

    “알아.”

    “…….”

    “내가 찾고 있었던 종족이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