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레온은 명백하게 늑대와 동맹관계였다. 그러니 그에게 이 터무니없는 계획을 제안하는 쪽도 늑대들인 편이 더 수월했다. 하지만 늑대가 나서기도 전에 이엘이 처리했다. 그것도 너무 쉽게.
“관여하지 않는 편이 좋아요.”
“이런 식으로 전부 설득할 생각이야?”
“아니요. 설득이 되는 종족이 있고, 안 되는 종족이 있죠.”
“…….”
“안 되면…… 글쎄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이엘이 배시시 웃었다. 근데 어째 웃는 모습이 얄밉기까지 하다.
사실 여전히 늑대들 사이에선 의견이 분분했다. 그날 귀족회의에서 충격적인 계획을 연이어 토해 낸 이엘의 말에 모두가 기함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은 그럴싸했다. 오히려 지나치게 이상적이라 꺼림칙할 정도로.
마치 모든 게 잘 짜인 각본처럼, 이상적인 결말이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그러나 그 결말로 가기 위한 과정이 문제였다. 이엘은 전부를 말하지 않았다. 일부를 숨겼다. 대가 없이 그런 결말이 찾아오리라고, 늑대들 중 누구도 그런 생각은 하지 않는다.
“정말 끝까지 말 안 해 줄 거야?”
“다 말하면 재미없잖아요.”
“그런 식으로 자꾸 넘어갈 거냐고.”
“걱정 마세요. 늑대들을 위험에 처하게 할 마음은 절대 없으니까.”
“늑대 말고 너는?”
아― 이제야 알겠다. 앤디는 최근 들어 느꼈던 이상한 기분이 뭔지 이제야 알아차렸다.
“너 요새 좀 이상해.”
“저요? 저는 늘 똑같은데요?”
“언제든 떠날 것 같은 얼굴이야.”
왜 자신의 왕께서 그토록 조급해하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노아는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다. 제 품 안에서 그녀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떠나긴 해야죠. 그게 계획의 일부였잖아요.”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저기 전령이 오네요?”
이엘이 빙긋 웃으며 손가락으로 성문을 가리켰다. 작은 소년이 허겁지겁 뛰어 들어오는 게 보였다. 언제나 수고롭게 두 종족 사이를 오가는 로였다. 로는 저 멀리서부터 이엘을 발견하곤 신이 나서 손을 흔들며 달려오고 있었다. 소년은 무언가를 잔뜩 짊어지고 오는 중이었다.
“오헬. 말했지만 널 위험에 빠뜨리는 일은 절대 하지 않을 거야. 넌 내 동생이고, 나의 왕께서 바라시는 단 하나의 반려야. 알지? 늑대들에게 알파의 반려가 어떤 의미인지. 우린 목숨을 바쳐서라도 널 지켜.”
“저도 제 목숨을 바쳐서 늑대들을 지킬게요.”
“넌 네 목숨 안 바쳐도 돼, 제발.”
“이상하네요.”
“…….”
“앤디 님은 제가 죽으면 슬퍼하실 거잖아요.”
“당연한 소릴……,”
“저도 마찬가지예요.”
아주 찰나의 순간에 그녀의 녹안이 축축해졌다가 건조해졌다. 순식간의 변화라 앤디도 그렇게 느껴졌을 뿐이었지만.
“저도 앤디 님이 죽으면 슬퍼요.”
“…….”
“그러니까 그럴 땐 내 목숨을 바쳐서 널 지켜 줄게―가 아니라. 같이 살자―라고 하는 거예요.”
“오헬.”
“더는 제 앞에서 저를 대신해 누가 죽는 꼴 따위 보기 싫어요.”
그래서 가는 거예요. 그렇게 덧붙인 여자가 듬직하게 느껴졌다면, 모두가 자신을 비웃을까? 앤디는 일순, 저 작은 인간 여자가 그 어떤 이종족보다 크고 단단하게 느껴져 헛웃음이 나왔다.
그는 항변하려던 입을 꾹 다물었다. 맞다. 그녀는 주드의 죽음을 바로 눈앞에서 목격했고, 심지어 죄책감을 여전히 떨치지 못한 채 살고 있다. 그 상실감과 부채감을 영영 버리지 못할 것이다.
“알겠어. 그럼 같이 살자. 꼭 같이 살아남자. 그렇게 되도록, 우리가 너를 도울게.”
이엘은 앤디를 향해 작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 꼭 그래야 한다. 그래야 아깝지 않아.
어느새 로가 가까워져 있었다. 작은 다리로 벅찬 숨을 쉬면서도 환하게 웃으며 자신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온다. 로가 들고 온 것은 아마도 레온의 응답이리라. 결국 그도 자신과 함께하기로 답했다.
“그럼 저게 그 씨앗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씨앗까지 흔쾌히 내어주실 줄은 몰랐는데……. 앤디는 속으로 감탄했다. 동맹관계이니 함께하겠다는 뜻을 표현한 것까지야 어느 정도는 예상했지만. 레온의 씨앗이 갖고 있는 의미가 어떤 건지 앤디는 알고 있다.
이전에 보았을 때만 하더라도 이엘을 죽일 것처럼 달려들었는데, 도대체 그 영지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럼 혹시.
“하이에나들에게도 연락했어?”
그의 물음에 이엘이 고개를 저었다.
“하이에나는…….”
역린을 건드릴 순 없었다.
“그쪽은 제안하지 않을 생각이에요.”
“그 미친 왕자…… 흠흠, 그 셋째 왕자님께선 네 말이면 죽을 것처럼 굴잖아.”
“그러니까요.”
“…….”
“정말 제 말이면 죽을 것 같아서요.”
이젠 자신에게 조이나를 투영하는 짓은 완전히 멈췄지만 여전히 이엘은 피시를 대하는 게 안타깝고 불편했다.
이 더러워진 세상에서 가장 어울리지 않는 존재가 있다면 그건 단연 피시였다. 진흙탕 같은 싸움판에 그가 끼어드는 게 싫었다. 그 순수한 얼굴을 되도록 지켜 주고 싶다는 주제넘은 생각이 들었으니까.
그러니까 하이에나는 안 된다.
“그보다 말씀드린 건은 어떻게 됐나요?”
“폐하께서도 허락하셨어. 근데 인간은 잘 설득한 거야? 아까는 협상이 결렬됐다고 그랬잖아.”
“아니요. 분명 응답이 올 거예요. 설령 오지 않더라도 저게 제 손에 있으면 문제 될 건 없어요.”
이엘이 로를 가리켰다. 정확히는 로가 짊어지고 오는 레온의 선물을.
앤디는 끙 앓는 소리를 내며 고민에 잠겼다. 아직도 지하 감옥엔 이전 습격 때 잡아 온 인간들이 몇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보스였던 턱수염은 하이에나들에게 잡혀 목숨을 잃었다. 잡혀 있는 인간들은 사실상 득보단 실이 컸다. 그래서 이엘은 그들을 풀어 주기로 한 것이다.
“네 말대로 정찰병이 그러더라. 뱀들이 우리 영지와 인간들의 마을을 주시하고 있다고.”
“곧 스완이 돌아올 거예요. 마찬가지겠죠. 분명 뱀들은 보호석을 수집하고 있어요. 처음엔 위험한 물건이었기 때문에 수집했을 거예요. 하지만 지난 세잔티노 습격 때 우리의 목적과 방법을 알아차렸을 겁니다.”
“그럼…….”
“오드를 찾을 거예요, 어떻게든.”
황실에 있던 모든 자료, 특히 금서가 모조리 뱀들에게 있다. 난해한 내용이라고 해도 아예 해석이 불가능한 건 아니다. 만일 그 안에서 보호석의 생성과 변형, 그리고 파괴의 방법까지 알게 된다면 뱀들은 반드시 오드를 잡기 위해 눈에 불을 켤 테지.
“저는 오드도 지켜야 해요.”
“너 참 바쁘다, 바빠.”
부러 농담을 섞어 웃으며 말했다. 그런 앤디의 노력에 이엘도 잠깐 미소를 지었다. 그의 말대로 정말 바쁘다. 땅 아래에선 이런 일로 바쁠 줄 정말 몰랐는데. 내가 이온이 아닌 다른 것에 목숨을 걸 줄은 정말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땐 이온을 살리는 게 삶의 목표였는데, 이젠…….
문득 든 생각에 이엘은 고개를 돌려 앤디를 쳐다보았다.
“왜?”
“언젠가 돌려드릴게요.”
“뭘?”
“……검술 훈련값이요.”
뭔 이상한 소릴 하냐? 앤디가 심드렁하게 되물었다. 검과 총을 손에서 잡지 못한 지 꽤 오래되자, 이엘은 결국 노아와 앤디에게 도움을 청했다. 아무래도 대련을 해 줄 사람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앤디는 뜬금없는 이야기를 하는 이엘을 보다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근데 너 어릴 때 황궁에서 검술 수업도 받았어? 황녀인데?”
“제가 억지를 부렸더니 스승님께서 선황에게 허락을 구하셨어요.”
“스승님? 그때 스승이면…… 음, 누구지? 나도 아는 사람인가?”
“앤디 님이 계셨던 1기사단이 아닌 2기사단이었으니, 모르실 수도 있고요. 얼굴만 아시는 사람일 수도 있겠네요.”
“누군데? 나도 그땐 조무래기여서 잘 모를 것 같긴 한데.”
“루시우스 러셀.”
“…….”
“러셀 경이요.”
앤디의 얼굴에 순간 먹구름이 몰려들었다가 사라졌다. 앤디 님? 이엘이 그의 이름을 부르자 앤디는 다시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래. 그 사람 2기사단 단장이었지?”
“네, 맞아요. 원래는 황자의 검술 스승님이셨어요.”
대단한 악연이군. 남모르게 탄식을 내뱉으며 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일이 참 복잡하게 됐다. 왜 하필 이런 때에 자꾸만 그 남자의 이름이 거론되는 건지 모르겠다. 그 남자의 존재는 늑대에게도 독수리에게도 불편하기만 한데.
“아, 그러고 보니…….”
이엘은 머릿속에 갑자기 어떤 얼굴이 떠올라 당혹감에 젖어 말을 끊었다. 그 사람이랑 조금 닮은 것 같다.
“왜 그래, 오헬?”
“갑자기 뭔가 떠올라서요.”
“…….”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하지만 이엘은 저를 바라보는 앤디의 눈동자에서 자신과 비슷한 유의 이채를 발견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일까? 아니……. 살아남았을 수도 있다.
루시우스 러셀. 그의 아들이.
*
“헉……! 허억…….”
타오를 것처럼 뜨거운 귀를 부여잡고 남자가 눈을 번쩍 떴다. 습관적으로 귀를 손바닥으로 눌렀지만 다행히 피가 흐르진 않았다. 그러나 양쪽 귀가 터져 버릴 것처럼 여전히 뜨겁고 아팠다. 마치 11년 전 그날처럼.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고통이 잠잠해질 때까지 온몸을 파들파들 떨었다.
‘일! 도망쳐야 한다!’
‘어머니! 누님!’
‘어서 도망쳐, 일!’
몸 상태가 좋지 않은 날이면 어김없이 그날의 악몽을 꿨다. 후작가의 어린 영식은 집사의 손에 이끌려 어머니와 누나들의 곁을 떠나 도망쳤다. 어차피 모조리 죽어야 했다면 그때 어머니와 누나들을 떠나선 안 됐는데……. 그게 천추의 한이었다. 차라리 그 곁에서 함께 눈을 감는 편이 그에겐 나은 생이었을 텐데.
전쟁은 일라이저에게서 모든 걸 앗아 갔다. 단란했던 가족을 전부 잃었다. 자신이 보는 앞에서 전부 죽어 버렸다. 가기 싫다며 집사에게 울며불며 매달렸지만 도망치는 길에 뒤돌아본 저택은 불에 타 버렸고 그렇게 어머니와 누나들은 목숨을 잃었다. 습격한 이종족에 의해, 허탈하게 죽어 버렸다.
아버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황실에 충성했던 아버지는 전쟁이 터진 순간에도 가문에 돌아오지 않고 그곳에서 목숨을 잃었다.
일라이저는 그런 아버지를 원망하진 않았다. 그에게 제 아비는 언제나 곧고 견고한 존재였다. 아버지는 마땅히 자신의 도리를 한 셈이니 오히려 자랑스러울 뿐이다.
하지만 아버지가 계셨더라면 어머니와 누님들은 살지 않았을까?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인 것을 알면서도 그런 미련을 버릴 수가 없었다. 제국의 제일 검으로 불리던 존재 중 하나였다. 그런 아버지가 있었더라면, 적어도 그렇게 비참하고 무력하게 가족을 떠나보내진 않았을 것이다. 주먹을 꾹 쥐며 거센 숨을 몰아쉬었다.
“아우흐…….”
눈물이 섞인 탄성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자 짐승의 울음소리와 비슷하게 느껴졌다. 전쟁은 그에게 가족만 앗아 간 게 아니었다. 집사가 어린 일라이저를 지키기 위해 온몸으로 감쌌지만 거세게 터진 폭약은 그의 고막을 찢어 버렸다. 그리고 유일하게 남아 있던 집사의 목숨마저 가져가 버렸다.
‘이종족들은 이기적이지 않아요.’
그러니 그 소년이 한 말에 동의할 수 없는 것이다.
이종족이 이기적이지 않다고? 그렇게 무참히 짓밟았는데 이기적이지 않아? 손바닥에 손톱자국이 패일 정도로 주먹을 세게 쥐었다. 어떻게 같은 인간이면서 그런 소리를 하지? 당신은…… 당신도 가족을 잃었잖아…….
깊은 한숨을 쉬며 끝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오랜만에 휴식을 얻었는데 역시 자신은 불침번을 서는 편이 더 낫다. 일라이저는 천막과 다를 바 없는 허름한 집을 나왔다. 저 멀리 총을 들고 꾸벅꾸벅 조는 남자를 툭 쳐서 깨웠다.
― 들어가서 자.
― 미, 미안……. 졸았던 건 아닌데…….
― 됐어. 며칠 동안 피곤했잖아. 들어가서 쉬어.
남자는 일라이저에게 미안하다는 표정을 짓고는 잽싸게 집으로 돌아갔다. 타닥타닥 모닥불 소리와 풀벌레 소리가 가득한 곳에 일라이저만 남겨졌다. 그에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런 조용한 경치를 좋아한다. 언제까지고 지속될 것만 같은 조용한 평화를.
‘제국을 재건할 겁니다.’
소년에 가까운 남자가 수어로 그 말을 했을 땐, 솔직히 일라이저는 제 눈을 의심했다. 순간적으로 자신이 잘못 해석했다고 느꼈다. 너무 터무니없는 소리를 했기 때문에.
하지만 그의 녹안은 진지했다. 어떤 인간의 것보다 더 확실하고 명료했다. 그는 진심을 말하고 있었다.
정확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소년은 자신에게 손을 내밀었고 그 손을 잡지 않으면 소년의 생각을 알 수 없을 것이다. 부러 여지를 남겨 둔 거겠지. 자신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위해 구미가 당길 만한 이야기만 넌지시 건넸을 뿐이다. 일라이저는 바닥에서 주운 돌멩이를 들고 바닥 위에 무언가를 쓰기 시작했다.
‘당신이 필요해요. 제 제안을 거절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그 검은 머리카락. 보석보다 더 아름다운 녹색 눈동자. 처음 만나던 날부터 잊히지 않는다. 그분을 너무 닮았다. 그래서 외면할 수 없었고, 그래서 화를 내지도 못했다. 한참이나 바닥에 글자를 끄적거리던 일라이저가 화들짝 놀라며 잽싸게 발로 흙을 덮어 버렸다.
나타니엘 리카르디스 르뷔아.
저도 모르게 그분의 이름을 적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