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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146화 (146/488)

146화

안드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엘은 정원이 있는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참 오랜만에 향하는 곳이었다. 그간 두문불출하다시피 별저에서 나오지 않는 통에 정원을 관리하는 건 온전히 테르들의 몫이었다. 이따금 꽃을 물어 오는 로날드를 통해 어떤 꽃이 피었겠거니 생각만 할 뿐, 그곳에 가진 않았는데…….

널따란 정원은 향기로운 꽃향기로 그득했다. 이엘이 정원으로 향하는 어귀에 첫발을 디뎠을 때, 저 멀리 보이던 인영이 움직이는 게 보였다. 이엘은 저도 모르게 긴장한 손끝을 오므리며 그가 서 있는 곳으로 차분히 걸음을 옮겼다.

남자는 오늘도 변함없이 단정했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반듯한 정복 차림으로 서 있었다. 커다랗고 단단한 남자의 등을 멀찍이 바라보았다. 어느새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제법 가까워졌지만 여전히 남자는 이엘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이엘은 머뭇거리며 걷던 걸음을 멈춰 버렸다.

뭐라고 먼저 운을 떼야 할까.

와 달라고 편지를 보낸 주제에 막상 얼굴을 마주하려니 어떤 말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다. 잘 지냈냐고 물어볼까? 아니면 영지는 어떠냐고 물어볼까? 마지막으로 르네와 대화했던 건 그에게도, 자신에게도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지 않을 테니 첫마디 꺼내는 게 이토록 어려운 것이다.

“내가.”

고민에 빠진 그녀를 향해 르네가 먼저 운을 텄다.

“네 편지에 얼마나 많이 웃었는지, 네가 알까.”

르네는 몸을 돌려 이엘과 마주했다. 그녀가 다가가지 못하는 거리를, 그가 대신해 좁혀 주었다. 터벅터벅 걸어와 정성껏 엮은 꽃다발을 이엘의 앞에 내밀었다. 그 꽃들은 이엘의 정원에서 피는 꽃이 아니었다. 모두 르네의 영지에서 피는 이름 모를 야생화들.

“네 필체에 얼마나 많이 설렜는지, 너는 모르겠지.”

“…….”

“몇백 번을 읽고 읽어서 이젠 눈을 감아도 네 필체가 눈앞에 둥둥 떠다니는 걸.”

“르네 님.”

“넌 알고 있나?”

정말, 지독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애틋하기 짝이 없는 고백이었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에 르네의 머리카락이 조금 흐트러졌다.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던 이엘이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붉은 머리로 향했다. 르네는 기꺼이 이엘을 위해 허리를 숙여 고개를 낮춰 주었다. 이엘의 웃음소리가 뺨에 닿자, 그도 웃었다.

그녀의 다정한 손길이 드디어 자신에게도 닿은 셈이었다.

“와 주셔서 감사해요.”

“기다렸다.”

“이건 폐하께서 피우신 꽃인가요?”

“내가 그런 쪽으론 소질이 없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

“혹시나 해서요. 그럼 역시 이건 야생화가 맞군요. 너무 예뻐요.”

아무렴 너만 할까. 그러나 부담을 줄 수 없어, 그 말은 속으로 삼켰다.

르네는 오랜만에 만나는 이엘을 가만히 내려보며 천천히 눈동자 속에 박아 넣었다. 보고 싶어도 쉽게 볼 수 없는 존재다. 무엇이든 다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 인간 여자는 마음껏 볼 수가 없었다. 르네는 지금 이 순간을 아로새기듯 좀처럼 눈을 떼지 못했다.

맘껏 꽃향기를 맡던 그녀가 르네를 향해 배시시 미소 지었다. 그 순간 르네는 제 마음이 뜨겁다 못해 터질 것처럼 벅차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정말 세상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미소다. 저렇게 미소가 잘 어울리는 존재가 또 있을까.

그녀는 그가 만난 그 어떤 이종족보다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존재다. 그 생각에 르네의 얼굴이 점차 화끈화끈 달아올랐다.

“사과를 꼭 드리고 싶었어요.”

“사과?”

“제가 폐하의 마음을 함부로 대했던 것 말이에요.”

그런 것쯤은 괜찮다. 물론 속이 상하고 답답했지만 그게 이엘에게 부담이 된다면 르네는 충분히 감당할 마음이 있었다.

다만 그때 그가 화가 났던 건, 이엘이 자신을 한없이 깎아내리는 듯한 말투 때문이었다. 그녀가 그럴수록 르네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고통스러웠다. 고귀하고 존귀하던 자리에서 지금의 자리로 끌어내린 게 자신의 탓 같아서.

“오헬.”

“감사합니다, 폐하.”

“…….”

“폐하의 소중한 마음을 감사히 받겠습니다.”

후련해진 기분이 들었다. 이엘은 머쓱해진 기분을 숨기려 꽃에 코를 박고 향기를 맘껏 들이마셨다. 르네의 시선을 피하고자 취한 행동이었지만 되레 그의 시선을 잡아 끌었다.

사실 르네는 그녀의 등장 이후로 줄곧 눈을 떼지 못했다. 좋은 답변을 들려주지 않을 거란 건 직감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르네는 그녀의 대답이 몹시 기뻤다. 기꺼웠다.

“기대하실 만한 답변은 못 드려서 죄송해요. 지금은 제게 그럴 여유가 없어요. 폐하의 마음을 쉽게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신중하고 깊게 생각하고 싶어요. 하지만 지금은 제게 그럴 만한 시간이 있질 않아요. 죄송합니다.”

“아니. 무언가를 바라고 말한 게 아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르네 님, 꽃 선물도 너무 감사해요.”

볼 위에 수줍은 미소를 덧그린 말간 얼굴을 바라보니 르네는 갈증이 났다. 말은 괜찮다고 했지만, 솔직히 속은 전혀 괜찮지 않았다.

그의 반려다. 그가 인식한 유일한 그의 반려. 마음 같아선 제 둥지로 끌어와 자신만 보게 만들고 싶은 그의 반려. 하지만 또 저렇게 예쁜 미소를 보고 있으니 욕심을 부릴 수가 없어서.

“난 네 웃음 하나면 족해.”

“…….”

“그거 지켜 주려고 네 곁에 있는 거니까.”

응답이었다. 제 편지에 대한 대답.

“노아에게 이미 들었다. 네게 편지가 오기도 전에 내게 전령을 보냈으니까.”

“노아 님께선……,”

“내가 반대하길 바라더군.”

노아의 행동은 웃기기 짝이 없었다. 자신이 반대하면 이엘에게 미움을 받을까, 대신하여 독수리의 반대를 은근히 바란 것이다. 그 유치한 행동이 우습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해했다.

노아는 언제나 이엘에게 관대했다. 그녀가 원한다면 간이라도 빼 줄 것처럼 행동했으니까. 제약할 마음이 전혀 없겠지. 그러니 자신을 통해서 이 계획을 막아 볼 생각인 듯했다. 이엘에겐 너무 위험한 도박이었으니까.

하지만 르네는 노아가 아닌 이엘의 편이 되기로 했다. 애초에 독수리는 늑대와 동맹관계가 아니었다. 종족의 왕이 서로 친분이 있는 것에 그칠 뿐이다.

그러니 르네의 온전한 뜻은 이엘이다. 몰려들 수난과 어려움이 걱정된다면 그걸 대신 맞아 주면 될 테니.

“내가 네 날개가 되어 주면 되는 것인가?”

“그래 주실 건가요?”

“그게 네게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이라면 기꺼이.”

“저는 폐하를 미워한 적도, 원망한 적도 없는걸요.”

농담인 줄 알고 작게 웃음을 터뜨렸지만 남자는 여전히 진지하고 굳은 표정이었다. 이엘이 조금 놀란 눈을 크게 뜨더니 지척에 서 있는 르네의 옷을 잡고 살짝 흔들었다.

“폐하. 정말 아니에요. 폐하를 미워하지 않아요. 이전의 일은……,”

“나는 아니다.”

“…….”

“하마터면 널 영영 못 볼 뻔했는데. 내가 어떻게 과거의 나를 용서할 수 있겠어.”

르네의 붉은 눈동자가 담담히 그녀를 담았다. 커다란 눈을 홉뜬 채 멈칫하던 이엘의 앞에 르네가 제 손을 내밀었다.

“나는 너를 한 번 죽였고, 너는 나를 한 번 살렸지.”

“르네 님.”

“그렇다면 다시 살아난 이번 삶은 온전히 너를 위해 살아도 좋지 않을까 싶군.”

“…….”

“황위에 오르는 걸 지지한다.”

이엘의 잘게 떨리는 손끝을 잡아 제 쪽으로 끌었다. 그러곤 원래대로라면 황녀의 반지가 있었을 검지 위에 입술을 깊게 묻었다. 마찰음에 이엘이 살짝 몸을 떨었다. 르네의 수려한 얼굴 위에 드물게 미소가 걸렸다.

“함께 걸어가자.”

너라면 믿을 수 있으니까. 신뢰가 물씬 담긴 붉은 눈동자와 마주하며 이엘도 고개를 끄덕이고 빙그레 웃었다. 그 어떤 말보다 값지고 소중한 응답이었다.

*

“어서 오십시오, 르네 님.”

짧은 대화를 마친 르네와 이엘은 함께 정원을 벗어나 왕성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향했다. 도중에 만난 앤디가 르네를 향해 공손히 인사를 했지만 어쩐지 그의 표정이 썩 좋지는 않아 보였다. 앤디뿐 아니라 모여 있던 모든 늑대들의 표정이 어두웠다. 아무래도 아까의 일 때문인 것 같은데. 걱정에 사로잡힌 이엘이 무언가라도 말하려 입을 열 때였다.

“죄송하지만 그녀의 호위는 제 몫이니 손을 놔주시겠습니까?”

웬 호위? 미간을 찌푸린 이엘이 뭔 소리냐고 묻기도 전에 앤디가 다가와 두 사람 사이를 갈랐다.

정원에서부터 줄곧 그녀를 에스코트하며 들어서던 르네는 황당함에 실소했다. 저를 바라보는 늑대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원수 보는 것과 별반 다를 게 없었던 것이다. 완전히 주인으로 인식하기라도 한 건가. 혀를 찬 르네가 선뜻 뒤로 물러나 주었다.

“르네 님. 폐하께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왕성의 문이 열리고 나타난 안드로마저 르네를 경계하듯 이엘에게서 떨어뜨렸다. 르네는 물끄러미 그녀를 보다가 미련 없이 돌아서 왕성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갑자기 싸해진 주변에 이엘이 미간을 찌푸리다가 옆에 서 있던 앤디를 툭 쳤다.

“왜 그러세요, 앤디 님?”

“뭐가?”

“조금 전에요. 르네 님께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 없었잖아요.”

“너랑 딱 붙어 있는데 내가 그럼 기분이 좋겠어?”

“안 좋을 건 뭐예요?”

게다가 딱 붙어 있던 것도 아닌데, 뭘. 이엘이 무심하게 중얼거리자 앤디가 혀를 차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얘는 늑대를 몰라도 한참 모른다. 네가 그러면 우리가 노아 님께 죽는다고! 괜히 흘겨보듯 이엘을 쳐다보던 앤디는 한숨과 동시에 말을 돌려 버렸다.

“그래서. 르네 님이 뭐라고 하셨어?”

“글쎄요. 정확한 건 노아 님과 말씀하시겠지만…… 잘될 것 같아요.”

처음부터 독수리는 제게 맡기라고 말하더니……. 앤디는 르네가 들어간 성문 쪽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탐탁지 않은 얼굴로 이엘을 쏘아봤다.

“너…… 독수리한테 홀랑 넘어간 거 아니지?”

“네?”

“잊지 마. 네 뒤를 단단히 지켜 주기로 한 건 우리야. 그리고 널 먼저 만난 것도 우리고, 네 형…… 아니지, 이젠. 흠흠, 네 오라비가 되어 주기로 한 건 나라고.”

오라비라는 낯간지러운 단어에 잠깐 몸을 흠칫하던 앤디는 헛기침과 함께 다시 한 번 검지를 펴서 주의를 주었다.

“독수리는 네게 흑심을 품을 수도 있어.”

“…….”

“그리고 쟤네가 얼마나 잔인한데. 무려 사체를 먹는다니까?”

“……식습성으로 평가하는 건 조금 무리 아닌가요, 앤디 님?”

“아니, 들어 봐. 독수리가 마음만 먹으면……,”

“곧 동맹이 될지도 모르는데 그런 소리 하시면 큰일 나요.”

이엘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자 앤디는 자존심이 상한 건지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그게 아니라! 아, 네. 듣는 둥 마는 둥 그의 말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이엘은 터벅터벅 걸었다. 앤디는 정말 답답한 모양인지 제 명치께를 주먹으로 쿵쿵 내려치며 소리를 질렀다.

“야! 진짜 너 독수리한테……,”

“앤디 님! 전령이 경계를 막 넘었습니다!”

“전령? 무슨 전령?”

“레온 님의 영지에서 온 전령이에요.”

벅찬 숨을 고르며 달려온 위병의 소식에 되묻는 앤디를 향해 답한 건 이엘이었다. 그 순간 앤디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너 설마…….”

“말씀드렸잖아요. 이종족을 설득하는 일엔 늑대들은 관여하지 않으셔도 된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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