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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145화 (145/488)

145화

“원하는 대로 해 줘. 그리고 속히 돌려보내.”

말을 마친 노아는 머리가 아프다는 말을 남긴 채 알현실을 빠져나가 버렸다. 그를 대신해 앞에 나선 안드로가 익숙하게 늑대들을 전부 돌려보내느라 바빴다. 혼란 속에서 이엘의 근처로 다가온 남자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거듭 감사의 인사를 표했다.

― 감사합니다.

― 제게 그렇게까지 격식을 차릴 필요 없어요. 부담스럽기도 하고요.

― 당신께서 불편하시다면 조심하겠습니다.

“오헬.”

대화를 끊고 안드로가 들어왔다. 그는 이엘을 데리고 구석으로 향한 뒤 조용히 속삭였다.

“만나는 것만 허락하도록 해라. 피터는 아는 게 많으니 돌려보내는 건 불가해.”

“…….”

“폐하께서 피곤하지 않으셨다면 허락하지 않았을 일이야.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겠지?”

애당초 이엘에게 시종을 붙여 주고 싶어서 데려온 아이였다. 천애고아에 나이가 어리고 말까지 하지 못하니 침묵을 지키는 일엔 최적의 조건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이상으로 피터는 순수한 아이였다. 며칠 전의 일로 피터도 이엘이 여자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꼬마는 놀랐지만 변함없는 태도로 제 주인을 섬기고 있었다. 이엘은 피터가 돌아가도 이상한 소리를 하지 않을 거란 걸 알았다. 그러나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그녀는 남자를 포기한 게 아니었으니까.

“네가 조금 전에 했던 건 수어라고 하는 건가?”

“네, 맞아요. 알고 계시는군요.”

“언제 배웠지?”

“자주 잊으시네요. 제가 황녀였다는 걸.”

“…….”

“황궁에서 자라면 모르는 게 거의 없어요. 배우지 않아도 될 것까지 전부 배우거든요.”

예를 들면 점자가 그런 것이었다. 독수리의 눈알로 앞을 보지 못하는 자들이 사라진 뒤로 점자라는 건 죽은 문자가 되어 버렸다. 수어도, 점자도, 그때 배워 두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쓸모가 없을 거라던 스승들의 말과는 달리, 그것들은 죽은 문자가 아니었다. 사람들이 죽여 버렸던 거지.

“그나저나 아직도 검을 쥐는 건 어려운 건가.”

“노력 중입니다. 근 시일 내로 다시 돌아갈 수 있어요.”

“무리하지 않아도 돼. 네가 무리라도 한다면 폐하께서 몹시 싫어하실 테고, 그 짜증을 곧장 내게 쏟아부으실 테니.”

농담을 진담처럼 말하는 안드로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이엘이 작게 웃었다. 그러곤 가만히 제 손바닥을 내려보았다. 그토록 좋아하던 일이었는데, 그토록 자신 있던 일이었는데. 순식간에 빼앗겨 버렸다. 덜덜 떨리는 손을 꼭 움켜쥐었다.

“언제나 네게 도움만 받는군.”

“저 역시 안드로 님께 큰 도움을 받았는걸요, 매번.”

“여전히 널 완전히 신뢰하는 건 아니지만, 네가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되는 건 인정한다. 너는 인간들 중에서도 유달리 영특하니까.”

“그건 제가 황손으로 자랐기 때문이에요.”

“…….”

“다른 사람들은 누리지 못했던 혜택을 받고 자란 거죠. 그러니 그만큼의 책임이 제게 있는 것이기도 하고요.”

“…….”

“잘하는 건 아니어도 제가 할 수 있는 한, 좋은 미래를 가져올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러니 안드로 님께서 노아 님을 설득해 주세요.”

그 말과 함께 이엘이 웃으며 돌아섰다. 영특하다는 말을 언제 들어 보았던가. 황궁 시절이 문득 떠올랐다. 다재다능한 이온을 이기겠다며 아득바득 기를 쓰던 제 어린 시절이 생각나 웃음이 피식 새어 나왔다.

언제나 이온은 이엘보다 한발 앞서 있었다. 불평등하게 주어지는 기회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걸 차치하고도 이온은 말 그대로 모든 면에서 수재였다. 부족한 게 전혀 없는 완벽한 후계자의 모습이었다. 마치 그러기 위해 태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이엘은 많고 많은 수업 중에서도 검술 수업을 가장 좋아했다. 당시 제국은 여자가 검이나 총기류를 잡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었다. 때문에 검술 수업에 황녀가 공식적으로 참여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엘은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수업만큼은 포기할 수 없었고, 결국 이온의 검술 교사에게 함께 훈련을 받는 것에 성공했다.

‘영민하십니다, 황녀 전하.’

‘스승님. 너무 과한 칭찬은 오히려 독이 됩니다.’

‘전하. 저는 기사단의 이름을 걸고 검술에 관해선 입을 함부로 놀리지 않습니다. 검술만큼은 황자 전하보다 황녀 전하께서 더 우위에 계신 건 진실입니다.’

루시우스 러셀. 그를 아직도 기억한다. 자신에게 기억이란 게 존재하던 시절부터 늘 함께하던 기사단장이었다. 황제가 크게 신임하는 자치고는 성정이 올곧고 바른 사람이었다. 그는 쌍둥이의 검술 스승을 자처했고 황제보다 두 황손에게 충성을 다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는 끝끝내 이엘을 지키다 목숨을 잃었다. 원래대로였다면 그는 자신이 아닌 이온을 지켰을 텐데.

그랬다면 이온이 살고 내가 죽었을지도 모른다. 늘 그 생각만 하면 복잡다단한 마음이 들었다. 이젠 검술 스승으로부터 배웠던 것들을 쓰지 못한다는 생각에 괜히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 감히 존함을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생각에 잡혀 있던 그녀의 앞에 금발의 미청년이 웃으며 말을 걸었다. 일순 그의 얼굴 위로 누군가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그 생각에 지끈지끈 아파 오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이엘은 그렇게 한참이나 말없이 그를 바라보다가 철자로 제 이름을 일러 주었다.

― 오헬, 이라고 부르는군요.

― 당신의 이름은요?

― 저는 일. 일라이저라고 합니다. 모두 저를 일이라고 불러요. 일이라고 불러 주세요.

― 일. 당신은 말을 할 수 없나요?

― 아니요. 말은 할 수 있습니다. 저는 듣지 못해요. 사고로 귀를 다쳤습니다.

귀를 다쳐 듣지 못하게 되고, 마음의 문까지 닫혔다. 어린 나이에 실어증이 찾아와 꽤 오랜 시간을 그렇게 두었더니 말이 점점 어눌해졌다. 교정할 수 없어 뭉그러진 이후로는 수어로 대화를 시작했다.

그에겐 수어가 숨통을 틀 수 있는 피난처였다. 굳이 발음을 또렷하게 하도록 노력하지 않아도 됐다. 억지로 발음을 교정하는 건 자신을 위한 방법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입으로 하는 대화보다 손으로 하는 대화를 선택했다.

― 당신께선…….

일라이저는 그녀를 향해 무슨 말을 하려다가 말았다.

그는 제 눈앞에 있는 검은 머리카락과 녹색 눈동자를 알고 있다. 저건 황족의 상징. 게다가 분명 어릴 때 본 적이 있는 분…… 그분과 너무도 닮아 있는 얼굴이었다. 꼭 그분이 자라면 저렇게 될 것처럼. 그러나 전쟁 통에 가장 먼저 목숨을 잃어버리셨으니 그분은 아닐 테지.

그럼 눈앞에 있는 사람은 살아남은 황족의 방계쯤 될지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위기에 빠졌던 이엘을 외면할 수 없었다. 곁에 있는 늑대가 마음에 걸렸지만 이미 정신을 차렸을 땐 그들을 향해 도움의 손길을 보낸 후였다.

― 일?!

안드로의 지시로 왕성에 들어온 피터가 저 멀리서 두 사람을 쳐다보다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입 모양으로 웅얼거리듯 일라이저의 이름을 부른 피터가 그 작고 날랜 발걸음으로 뛰어들었다. 소년은 익숙하게 일라이저의 품 안으로 안겨 왔다. 이엘은 두 사람의 재회를 바라보며 뒤로 물러났다.

일라이저는 서둘러 피터의 안색을 살폈다. 다행히도 낯이 오히려 이전보다 더 좋았다. 넉넉지 못한 형편에 하루가 멀다 하고 배를 곯았던 시절보다 더 살이 올랐다.

그간 하지 못했던 회포를 푸느라 엉망이었다. 피터는 얼굴이 눈물범벅이 된 채 일라이저에게 매달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이엘은 괜히 제 마음이 시큰해져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 잘 지냈어, 피터?

― 응. 형아도?

― 응. 다들 널 기다려. 우리 돌아가자.

― 아니. 그건 어려울 거야……. 잠깐 만나는 것만 허락해 주신다고 했거든.

― 피터. 하지만……,

― 괜찮아! 나 정말 잘 지내고 있는걸. 형아도 나 걱정하지 말고. 응?

사실상 돈을 주고 노에를 산 것과 다름없으니. 피터의 말대로 늑대들이 허락하지 않으면 돌아갈 수 없다. 일라이저는 낙심한 얼굴로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여기서 잘 지내니 다행이지만……. 역시 내 눈앞에 보이지 않으면 걱정이다.

그가 무언가 말하려던 찰나였다. 이엘이 먼저 두 사람의 대화를 끊고 파고들었다.

― 일라이저. 당신에게 다시 제안하고 싶어요.

― …….

― 피터를 볼모로 잡고 말하는 게 아니에요. 저는 그저 좋은 조건으로 제시하고 싶은 겁니다.

― 피터를 보여 주고, 볼모가 아니라고 말하다니. 당신이 늑대처럼 보여요.

― 그럼요. 놀랍게도 저는 늑대인걸요.

우스갯소리가 오가는 동안 일그러져 있던 일라이저의 미간이 점차 풀어졌다. 그는 제 옆에 선 피터를 한 번 힐끔, 그리고 이엘의 얼굴을 한 번 힐끔 보고는 짤막한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체념에 가까운 허락이었다.

― 들어 보고요. 그 뒤에 결정하겠습니다.

어리둥절한 피터의 손을 잡으며 이엘은 응접실로 일라이저를 초대했다.

*

― 이종족들이 모두 동의할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 당연히 모두가 동의하지는 않을 거예요. 알고 있습니다.

― 오헬. 당신의 의도는 알겠습니다. 그 말대로라면 우리에겐…… 선택이란 게 무의미하네요. 늑대들이 정말 당신의 계획에 동의한다고요? 말도 안 되는걸요.

― 이종족들은 이기적이지 않아요.

― …….

― 그들은 자신의 안위보다 종족의 미래를 염려하고, 종족의 미래보다 생태계의 평화를 우선으로 두죠. 지금의 상황을 모든 이종족이 만족하는 건 아니란 소리예요.

물론 과거에 비하면 이종족의 처지가 좋아진 건 당연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모든 게 만족스러운 건 아니었다.

결국 이종족도 인간과 어우러져 살아가야 하는 종족이다. 인간이 만들고 인간이 꾸렸던 것들을 이종족도 함께 누리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인간이 멸종이라도 한다면, 남아 있는 이종족들이 ‘무’로 돌아가 살아갈 수 있을까? 결코 불가능하다.

― 이종족들도 차차 알게 될 거예요. 인간의 멸종으로 인해 자신들에게 들이닥칠 불행한 시간을요.

영존하는 우논들과 달리 인간의 수명은 정해져 있다. 여자와 암컷이 모두 사라져 종족 번식을 하지 못하게 된 건 인간도 마찬가지다. 해를 거듭할수록 죽는 자들만 늘어날 테고 머지않아 완전히 멸종하게 된다.

생태계에서 어느 한 종이 사라지게 되면 어떤 비극이 일어나는지, 인간보다 이종족이 더 잘 알고 있다. 인간이 이종족 없이 살아갈 수 없듯, 이종족 역시 인간이 없이는 이 세계를 살아갈 수 없다. 그러니 끝내 이종족도 양보해야만 하는 날이 올 것이다.

― 일단은 생각해 보겠습니다.

― 좋아요. 다시 말씀드리는 거지만 피터를 볼모로 잡은 건 아니에요. 그러고 싶지도 않고요. 다만 당신이 제안에 응하시면 제가 폐하께 청을 올릴 수 있으니까요.

―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 말씀하세요.

― 왜 저입니까? 저는 그저 당신들과 우연히 만난 인간일 뿐인데요. 왜 하필 제게 이런 중요한 제안을 하시는지, 솔직히 저는 납득이 안 갑니다.

― 글쎄요. 신의 안배일까요.

그녀의 뜻 모를 답에 일라이저는 입을 다물었다. 모호한 답이긴 했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그 또한 그녀를 만난 것이 신의 뜻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결국 제대로 된 답을 듣지 못한 일라이저는 아쉬운 마음을 안고 돌아서야 했다.

― 다음에 만날 땐 동업자로 만나면 좋겠군요. 기대하겠습니다.

― 큰 기대는 하지 마세요. 아시겠지만 제겐 딸린 식솔이 많습니다. 저는 어떤 것보다 그게 우선이니까요.

― 네. 알아요. 그러니 당신께 제안한 거예요. 돌아가서 시간을 갖고 신중하게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곳으로 올 때 난폭하게 잡혀 왔다는 일라이저의 말에 이엘은 늑대들에게 부탁해 돌아가는 길은 편하고 빠르게 갈 수 있도록 준비해 뒀다. 일라이저는 피터를 한 번 끌어안고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돌려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갔다.

한바탕 폭풍이 지나간 것처럼 늑대들의 영지가 뒤숭숭했다. 잡혀 왔던 건 인간 쪽이었는데 되레 늑대들의 분위기가 나빴다. 머리가 아프다며 침실에 틀어박힌 노아를 비롯해 몇몇 우논들도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이엘은 별저로 향하려다가 다시 걸음을 돌려 왕성으로 들어섰다.

“폐하께선 혼자 있고 싶다고 하셨다.”

“그래요? 무슨 일이 있으셨나요?”

“…….”

“안드로 님?”

“아마 곧 괜찮아지실 거다. 넌 그만 돌아가도록 해.”

노아가 그녀의 방문을 마다한 적이 있었던가. 정말 몸이 좋지 않아서는 아닐 것이다. 무언가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긴 건 아닐까? 밀려드는 걱정에 이엘이 미간을 좁히자, 줄곧 심각한 표정이던 안드로가 그녀의 어깨를 다독이며 달랬다.

“정말 머리가 아프셔서 그런 것이니 걱정 말고.”

“알겠습니다. 그럼 폐하께서 몸이 괜찮아지시면 제가 한번 찾아뵙겠다고 전해 주시겠어요?”

“그래.”

고개를 꾸벅 숙여 이엘이 돌아가려는데 안드로가 다시 그녀를 불러 세웠다.

“네 정원에 한번 가 보도록 해.”

“정원이요?”

“그래, 지금. 꽃이 널 기다리고 있을 거다.”

안드로답지 않은 서정적인 말에 이엘이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이상한 소린지 모르겠다. 꽃이 만개한 것은 알고 있지만,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니…….

그 순간 이엘의 머릿속을 무언가가 훅 치고 지나갔다.

“설마……,”

“다시 말하지만 폐하께서 지금 몸이 좋지 않으셔서 허락하신 일이니, 인사만 나누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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