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144화 (144/488)
  • 144화

    다소 웃긴 제안이다. 이엘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군림하고 싶은 게 아냐, 미르. 이 얘긴 그만하자며 이엘이 먼저 밀로의 손을 끌어 다시 걷기 시작했다. 밀로도 그녀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말없이 따라 걸었다.

    그냥 ‘왕’이라는 위치가 마음에 드는 것이라면 이깟 땅이 아니라 하늘 위로 데려가 용들의 왕이 되게 해 줄 의향이 있었다. 그게 더 근사하지 않은가. 또한 일그러진 복수심으로 폭군이 되겠다고 하면 몸소 이 땅을 뒤집어엎어 줄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역시 이엘은 그런 걸 원하는 게 아니다.

    “그럼 넌 내가 어떻게 해 줬으면 좋겠는데?”

    밀로의 물음에 앞서 걷던 이엘의 걸음이 멈췄다. 그녀는 여전히 제 손끝을 소중하게 움켜쥐고 있는 밀로의 커다란 손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위로 올렸다. 언제나처럼 티 없이 맑아 보이던 푸른 눈동자가 오늘따라 수심으로 얼룩져 보였다. 밀로와는 어울리지 않는 색이다.

    “그냥.”

    “그냥?”

    “응, 그냥. 어디 가지 말고 그냥 같이.”

    어쩐지 조금 허탈해지는 대답이었다. 차라리 내가 용이라고 말해 버릴까? 딱히 감출 이유도 없는데. 그러면 그녀가 제 권력에 기대 뭔가 거창한 거라도 요구하지 않을까. 그 생각에 밀로가 입술을 뗄 때였다.

    “너는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내 편이 되어 줘, 같이.”

    “당연한 소리잖아.”

    “응, 그러니까. 당연한 소리니까.”

    “…….”

    “이제 좀 철도 들고.”

    갑자기 분위기를 환기시키려는 듯, 화제를 바꿔 버렸다. 밀로가 무언가 더 말을 건네려 했지만 그녀는 못 들은 척 저 앞으로 먼저 걸어갔다. 가장 높은 위치를 바라는 사람치고는 무거운 발걸음이었다.

    *

    한낮이 지나니 무료한 시간이 이어졌다. 피터는 제 방에 들어가 낮잠을 자고 있었고, 이불 빨래 걷는 것을 도와주던 로날드도 피곤한 건지 큰 입을 벌려 긴 하품을 했다. 영지 안에 팽팽하게 감도는 긴장과 달리 후원은 잔잔하기만 했다.

    이엘과 함께 마지막 이불을 짊어지고 걷던 로날드가 갑자기 걸음을 우뚝 멈춰 선 건 무료함이 정점을 찍었을 때였다.

    “왜 그래, 로니?”

    “인간 냄새가 나는데.”

    “인간?”

    귀를 쫑긋거리던 로날드가 재빨리 별저 안에 이불을 밀어 넣고는 이엘을 뒤로한 채 왕성을 향해 달려 나갔다.

    점이 되어 사라진 늑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이엘은 급한 대로 주섬주섬 이불을 주워 들었다. 주드가 떠난 뒤로는 웬만해선 제 곁을 지키던 로날드였는데 자신을 이렇게 두고 달려간 걸 보면 위험한 일은 아닌 듯했다. 그래서 대수롭지 않게 하던 일을 마무리 짓고 있었다.

    자발적으로 저택에 갇혀 지내길 택한 지도 시간이 꽤 흘렀다. 대외적으로는 불필요한 마찰을 줄이고 싶다는 핑계였지만 사실은 오드와의 만남을 피하고 싶었던 이유가 컸다.

    오드를 볼 때면 언제나 자신의 치부가 전부 드러나는 것 같았다. 마치 신을 만난 것처럼, 속 안의 더러운 모습이 낱낱이 드러날 것만 같았다. 그래서 이엘은 늘 오드가 좋으면서도 못내 불편했는지도 모른다.

    이번 일도 오드가 알게 되면……. 아냐. 애써 고개를 내저은 이엘은 기지개를 켜며 2층 발코니로 이어지는 커다란 창문을 활짝 열었다.

    완연한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와 발그란 뺨을 간지럽혔다. 이엘은 길게 내려앉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저도 모르게 시선을 하늘 위로 올렸다. 좋든 싫든 답장이 올 때가 됐는데…….

    청명한 하늘을 가만히 응시하던 이엘은 저 멀리 별저 입구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시선을 내렸다. 누군가 별저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오헬.”

    그녀를 부르며 다가온 건 안드로였다. 이곳까지 온 적이 없는 안드로가 무슨 일로 왔을까. 약식 인사를 마친 이엘에게 안드로도 간략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안드로 님?”

    “폐하께서 잠깐 오라고 하셨다.”

    “혹시 독수리……,”

    “아니. 다른 쪽.”

    벌렸던 입을 다물고 서둘러 저택을 빠져나왔다. 대충 예상이 간다. 나중에 알아서 찾아가려고 했는데……. 이전에 피터를 노예시장에서 사 왔던 것으로 짐작컨대 이번에도 순순히 데려오진 않았을 것이다. 이엘은 안드로에게 상황을 물어보려다 입을 꾹 다문 채 노아의 성 안으로 들어섰다.

    역시나 작은 소동이 일었다. 안드로의 뒤를 따라 들어온 이엘은 미간을 좁힌 채 홀 중앙을 바라보았다. 양 손목이 결박됐음에도 검을 쥐고 여유롭게 방어 자세를 취하는 인간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머리색만큼이나 아름다운 미청년은 입이 천으로 틀어막힌 채로도 아랑곳 않고 눈을 매섭게 부라리고 있었다.

    “폐하. 오헬을 데려왔습니다.”

    이엘은 차분히 왕을 향해 허리를 숙였지만 노아의 시선은 그녀에게 닿지 않았다. 그는 넋이 나간 것처럼 멍청하게 인간 남자를 쳐다볼 뿐이었다. 다른 우논들과 늑대들은 인간 남자의 태도에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으르렁거렸는데 노아는 그저 관망하고 있었다. 인간이 무기를 손에 쥐고 있는데도.

    “폐하.”

    안드로가 거듭 노아를 불렀지만 큰 충격에 사로잡힌 것처럼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결국 이엘이 먼저 노아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작은 동요를 보이고 있었다. 그녀는 노아의 시선이 닿는 남자를 힐끔 쳐다보다가 다시 시선을 노아에게 돌렸다.

    “폐하. 저를 부르셨습니까?”

    폐하. 다시 한 번 그를 불렀다. 노아는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그의 눈에 이엘이 들어오자 비로소 안정을 되찾았다.

    노아는 마른침을 삼키더니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앤디를 향해 고갯짓을 했다. 곧장 왕의 명령대로 금발의 청년을 제압한 앤디가 그의 손에서 검을 가볍게 빼앗았다. 노아는 습관처럼 떨리는 손을 말아 쥐며 입을 열었다.

    “오헬. 네가 꿈에서 본 자가 저자가 맞나?”

    이엘의 건조한 시선이 인간 남자에게 닿았다. 입에 물린 천으로 윽윽! 신음 소리만 내던 남자가 이엘을 발견하곤 소리를 멈췄다. 쥐 죽은 듯 고요한 정적이 맴돌았다. 바싹 긴장한 우논들은 그녀의 입술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네, 맞아요.”

    “…….”

    “그 사람이에요.”

    이엘은 청년이 있는 곳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러곤 남자를 향해 수어로 대화를 시도했다.

    ― 계약을 하고 싶어요.

    ― …….

    ― 나쁘지 않을 거예요. 들어 보시겠어요?

    이전에 구해 주었던 보답을 이딴 식으로 갚냐며 성화를 부려도 모자랐다. 하지만 남자는 조용했다. 말없이 한참이나 이엘의 눈동자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 순간 이엘은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단지 꿈에서 본 얼굴이기 때문이 아니라…….

    분명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말을 못 하나?”

    드물게 안드로가 먼저 입을 떼며 말을 건넸다.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굳어 버린 노아를 대신해 집무를 본다고 하기엔 언뜻 감정이 실려 있는 말투였다. 그러나 안드로의 질문에도 청년은 시선을 이엘에게서 떼지 않았다. 처음 봤던 그날처럼 그의 눈동자엔 이엘의 모습만이 담겨 있었다.

    ― 수어로 대화할 수 있을까요?

    그녀의 조심스런 질문에 남자는 한참 만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엘은 그를 포위하듯 감싸던 우논들에게 조금 떨어져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곤 그에게 다가가 결박된 손을 풀어 주었다. 손이 자유로워진 남자는 손목을 풀듯이 몇 번 돌리다가 대화에 마주 응했다.

    ― 수어를 하실 줄 아십니까?

    ― 네. 어릴 때 배웠어요.

    이엘의 답에 청년의 다갈색 눈동자에 아주 잠깐의 기쁨이 머물렀다가 사라졌다.

    ― 죄송하지만, 저는 늑대와 한편이 될 마음이 없습니다.

    그러나 돌아온 답은 단호했다. 예의상의 거절이 아닌 진심이었다. 그는 왕좌에 앉아 있는 노아를 싸늘하게 쳐다본 뒤에 다시 한 번 고개를 저었다.

    ― 그때 도움을 드렸던 건 순전히 당신 때문이었습니다.

    ― …….

    ― 그러니 제게 이종족을 도와 달란 말씀은 하지 마십시오.

    고개를 꾸벅 숙이며 정중하게 거절했다. 수어를 알지 못하는 늑대들이 그녀에게 해석을 바라는 듯 눈길을 보냈지만 이엘은 여전히 남자와 시선을 교환할 뿐이었다. 그녀는 남자의 눈동자 속에서 진심을 읽었다. 그는 정말로 이종족과 함께할 마음이 없었다.

    ― 도와 달라는 게 아닌데도요? 제안을 하는 거예요. 들어 보지도 않고 거절하실 건가요?

    ― 네. 그 어떤 일이라도 이종족과 관련된 일이라면 손대고 싶지 않습니다.

    ― …….

    ― 당신이 여기 계신 것이 당신의 의지이듯, 제가 당신들과 손을 잡지 않는 것도 제 의지입니다. 생각 없는 이종족과 달리 당신은 인간이니 제 말뜻을 이해하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늑대들에게 말씀 부탁드립니다.

    단순히 싫어하는 게 아니라 혐오 그 이상의 감정이 담긴 걸지도 모른다. 강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엘은 짧은 한숨을 쉬며 긴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만나고 싶지 않았던 건데. 확실히 성급했다.

    하지만 이엘은 노아의 마음을 이해한다. 초조했겠지. 조급했겠지. 그의 입장에선 자신의 꿈이 쓸데없는 것이라고 증명하고 싶었을 테니. 성질 급하게 인간 남자를 데려온 것을 십분 이해한다. 그건 늑대의 조급한 애정이었다.

    “결렬입니다.”

    “왜지?”

    “원치 않는다고 하네요.”

    “그럼 네 꿈은 거짓인 건가?”

    안드로의 물음에 이엘은 모호한 웃음을 지었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사람 일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으니까.

    어느 정도 가능성을 열어 둔 이엘은 안드로에게 남자의 귀환을 요구했다. 안드로는 이도 저도 아닌 얼굴로 남자를 한 번 쳐다보고는 망토 자락을 펄럭거리며 등을 돌렸다.

    안드로가 사라진 곳을 힐끔 쳐다보던 남자는 머뭇거리다가 손을 들어, 이번엔 저가 먼저 이엘에게 대화를 걸었다.

    ― 혹시 예전에 작은 꼬마 아이 하나가 이곳에 오진 않았습니까?

    ― 꼬마라면……,

    ― 키는 이 정도 되고 체구가 작습니다. 방심한 틈에 아이가 납치돼서…… 뒤늦게야 늑대의 소굴로 갔다는 이야길 들었습니다. 당신이 여기 계셨더라면 그 아이를 보았을 것 같아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 피터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 만나셨습니까?!

    남자의 하얀 얼굴에 반가운 기색이 어렸다. 아, 그래서 어느 정도는 순순히 잡혀 온 건가? 이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피터의 안부를 전했다. 그는 피터를 꼭 만나고 싶다며 그녀에게 사정했다. 그러려면 우선 노아의 허락이 먼저였다.

    이엘은 그를 뒤로하고 다시 왕의 앞으로 다가갔다. 노아는 여전히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다.

    “노아 님.”

    “……어.”

    “무슨 걱정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니. 아니야.”

    “피터와 아는 관계라고 하는데 잠깐 만날 수 있게 해도 될까요?”

    “…….”

    “폐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