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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143화 (143/488)
  • 143화

    “그렇게 바라봐도 소용없어. 네가 늑대인 것처럼 나는 황족으로 태어났고 그건 변하지 않는 진실이야.”

    “…….”

    “너희가 싫어해도 난 우논들의 허락으로 여기 남게 됐어. 나는 돌아가지 않을 거니까 그렇게 쏘아봐도 소용없어.”

    내 고집 센 거 알지? 우스갯소리로 덧붙였지만 로날드는 여전히 아무 반응이 없었다. 이래서는 차라리 르네와 대화하는 게 편할 지경이다. 피식 웃음을 지은 이엘이 먼저 뒤로 한 걸음 물러나 자리를 떠날 준비를 했다.

    “잘 자, 로니.”

    “왜 미리 말해 주지 않았던 거야?”

    돌아가려는 그녀의 발을 붙잡은 건 울음에 먹힌 로날드의 애원이었다. 늘 초롱초롱하게 빛나던 로날드의 눈동자가 오늘은 한없이 축축하게 보였다. 그게 섭섭했던 거야? 맥이 탁 풀리면서 동시에 이엘의 마음도 물먹은 솜처럼 무거워졌다.

    “아빠가…… 더 이상 너랑 놀지 말라고 하셨어.”

    “……응, 그랬구나.”

    “근데 나는…… 우리는…… 역시 오헬이 좋아.”

    “…….”

    “전쟁 같은 거 나는 몰라. 그거 때문에 우리 엄마가 죽었지만…… 나는 잘 모르겠어.”

    “…….”

    “왜냐하면 너도 가족을 잃은 거잖아.”

    응. 그래. 이엘은 어른스럽게 대답했다. 로날드는 한참이나 울음을 삼키더니 조심스레 한 걸음, 한 걸음 딛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이젠 성체가 됐는데도 여전히 새끼 때 습관을 버리지 못한 로날드가 낑낑거리며 그녀에게 제 얼굴을 치댔다.

    “가지 마. 절대로 우릴 버리지 마…….”

    “응, 안 버려. 내가 지켜 준다고 했잖아, 버리지 않을게.”

    다 그걸 위해서니까. 이엘은 로날드를 꼬옥 끌어안으며 쓴웃음을 삼켰다. 한참이나 울먹거리던 늑대는 두리번거리더니 다시 불안한 눈동자로 그녀를 쳐다봤다.

    “근데 이 밤에 어딜 가려는 거야? 네 냄새가 불안하게 흩날려서 나왔단 말이야.”

    “잠깐 밖에 다녀올게.”

    “위험해.”

    “여기 총도 가져가는걸?”

    “총 못 쏘잖아.”

    로날드의 말에 이엘이 입을 꾹 다물고 손에 들린 총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총을 못 쏘게 됐다. 검도, 총도. 잡기가 어려워졌다.

    하지만 이 또한 극복해 내야 한다. 극복할 거야, 반드시. 이엘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괜찮다고 그를 타일렀지만 로날드는 어느새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고 몸을 낮춘 상태였다.

    “타. 데려다줄게.”

    “혼자 가도……,”

    “싫어. 불안해. 네가 떠날 것 같단 말이야.”

    쓸데없는 걱정이라고 말해도 듣지 않을 것 같다. 결국 이엘은 로날드의 등에 올라타고 말았다.

    위병의 눈을 피해 성곽을 넘으려면 성전을 통과하는 길밖에 없었다. 이엘의 부탁대로 로날드는 성전 근처에서 최대한 조용히 지나가려 했지만 성전의 주인은 잠귀가 밝은 자였다. 하얀색 외투를 걸치고 지팡이를 손에 든 오드가 이미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디 가니, 엘?”

    “잠깐 밖에.”

    “…….”

    “금방 올게. 들어가 쉬어, 오드.”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의 엘.”

    “다녀올게.”

    잡을 수 있었지만 잡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그녀의 선택이다. 저 멀리 뛰쳐나가는 커다란 늑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오드가 작은 한숨을 쉬었다. 그는 이엘과 로날드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음에도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렇게 고요한 시간이 꽤 흘렀다. 적막 속에서도 침묵을 유지하던 오드가 일순 지끈거리는 이마를 잡고 휘청거리며 신음을 흘렸다. 그와 동시에 저 멀리 미세하게 흔들리는 대지가 보였다.

    그의 푸른 눈동자에 물기가 어렸다. 결국 그녀는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것을 택했다.

    *

    “오헬. 밖에서 밀로가 불러.”

    당분간 별저에 머물겠다는 이엘을 존중해 준 노아 덕분에 이엘은 며칠째 후원에서 생활 중이었다. 우논들의 합치로 늑대의 영지에 머물게 됐지만 여전히 그녀의 거취에 반발이 심한 가문이 몇 있었다. 그로 인해 애꿎은 새끼들만 이엘을 만나지 못해 고생이었다.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며 아예 별저로 들이닥친 로날드를 제외하고는.

    밖에서 돌아온 로날드는 밀로의 말을 전하며 이엘의 발치에 푸른 꽃을 하나 떨어뜨렸다. 그녀의 정원에 심어 둔 꽃들이 만발한 지 오래였다. 매일 출근하듯 이엘을 대신해 정원 나들이를 나가는 로날드는 오늘도 마음에 드는 꽃 하나를 주워 이엘에게 선물했다.

    “고마워, 로니. 다녀올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같이 아침 먹자.”

    “응.”

    물 묻은 손을 닦은 이엘이 커다란 문을 열었다. 쏟아지듯 퍼붓는 햇빛 사이로 커다란 그림자가 스며들었다. 그리고 대뜸 무언가가 그녀의 품에 안기듯 들어왔다.

    화관이었다. 그것도 아주 잘 만들어진.

    “선물.”

    “…….”

    “화해하고 싶은 내 선물.”

    싸운 게 아니었으니 화해란 말에 머쓱해졌다. 딱히 화를 낸 것도 아니었고 돌아온 뒤로도 부러 외면했던 건 더더욱 아니었다. 당장 눈앞에 닥친 문제들을 고민하느라 밀로의 일은 뒷전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그녀의 결단에 앞장서서 지지해 주었고 끝내는 이렇게 화해의 선물과 함께 직접 찾아오기까지 했다.

    그 철부지가 이 정도 했다면 저 나름대로 반성했단 의미겠지. 이엘은 자신이 엉성하게 엮어서 건넸던 그 어설픈 화관과 비교되는 밀로의 선물을 감사히 받아 들었다. 그러곤 그를 향해 부드럽게 호를 그린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 밀로가 미묘한 표정을 짓다가 곧 그녀를 따라 웃었다.

    “들어와, 미르.”

    “아니. 잠깐만 걷자, 오헬. 할 말이 있어.”

    “그래, 잠시만.”

    들어가 화관을 잘 걸어 두고 로날드의 식사를 먼저 차려 준 이엘이 다시 밖으로 나왔다. 밀로는 언뜻 초조한 얼굴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인간들은 이럴 때 에스코트하지?”

    밀로의 커다란 손바닥이 이엘의 앞으로 다가왔다. 이엘은 물끄러미 밀로의 손을 바라보다가 그 위에 제 손을 올렸다. 어설프기 짝이 없는 에스코트와 함께 천천히 후원을 거닐었다.

    어느덧 시원한 바람이 부는 계절을 코앞에 두고 있었다. 곧 땅 위로 올라온 지 1년이 되겠지. 그러니까 밀로를 알게 된 것도 벌써 1년이 다 되어 간다는 소리였다.

    그런데도 여전히 두 사람은 서로를 잘 모른다.

    “나타니엘 리카르디스 르뷔아.”

    “…….”

    “그게 황녀 전하의 이름입니까?”

    공대가 저렇게도 안 어울리다니. 밀로의 언사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 역시 장난기가 묻은 낯이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근심이 어려 보였다. 이엘은 그의 마음을 이해한다. 자신이 정체를 숨겼듯, 밀로도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던 거겠지.

    “미르. 예전에 내가 했던 말 기억나?”

    “…….”

    “설령 네가 인간이 아니어도 변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

    그랬지. 밀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숨겨야만 했던 이유는 거창한 게 아니었다. 인간들에게 용은 기이하고 믿기지 않는 존재였다. 용의 존재를 믿는 사람들도 간혹 있었지만 아주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용이란 기피하고 싶은 허상이었으니까. 악랄하고 잔인해서 닥치는 대로 살육을 퍼붓는 악한 존재였다.

    물론 그 말에 딱히 반대하진 않는다. 실제로 용들이란 제 흥미에 취해 피를 보는 게 일상이니까. 그래서 인간들 틈에 섞여 살던 밀로는 그들이 떠드는 소리에도 그저 웃으며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대수롭지 않았다. 자신들을 무서워하고 싫어한다고 해서 특별히 달라질 것도 없으니까.

    하지만 언제부턴가 조금씩 꺼려지기 시작했다. 이엘이 자신을 싫어하면 어떡하지. 나를 경멸하면 어떡하지. 무서워하면? 보기 싫다고 하면 또 어떡하지. 그녀에게 미움을 받는 게 두려워졌다.

    이엘이 좋았다.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같이 있고 싶었다. 예전의 밀로였다면 상대방의 의사 따위 신경 쓰지 않고 그녀를 납치해 지상을 떠났을지 모른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이상해졌다. 점점 제 마음보다 그녀의 마음이 우선적으로 변해 갔다.

    “내가 용서할 수 없는 종족이라고 해도?”

    “용서할 수 없는 종족이란 게 뭐야.”

    웃음이 터졌다. 그런 종족이 어디 있겠어. 음, 글쎄. 굳이 꼽자면 뱀이려나. 우습게도 자신을 죽였던 독수리보다, 이온을 죽였던 어떤 종족보다, 주드를 죽여 버린 뱀이 몸서리치게 싫어져서.

    같잖은 복수 따위 버린 지 오래라고 말했으면서도 그 뱀만큼은 용서할 수가 없었다. 자신은 성자가 아니었다. 그 마음까지 버리긴 쉽지 않았다.

    “뱀이니?”

    “뱀 따위랑 비교하다니.”

    밀로가 충격에 휩싸인 척 익살스러운 표정을 짓자, 이엘이 작게 웃음소리를 흘렸다. 사실 그가 정말 뱀이라 해도, 자신이 밀로를 미워할 리가 없질 않는가. 그걸 알면서도 저렇게 초조해하네.

    그녀는 말없이 맞잡은 손에 힘을 더했다. 괜찮아,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그녀의 위로에 밀로가 주저하던 입술을 뗐다.

    “네가 늑대들 앞에서 말하는 모습을 보면서 반성했어.”

    “…….”

    “사실 난 다른 종족은 날 알아도…… 너만큼은 날 모르길 바랐거든.”

    “왜?”

    “그냥. 싫었어.”

    “내가 아는 게?”

    “응. 너랑 같은 종족이 아니니까.”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이엘이 미간을 좁히며 밀로를 올려봤다.

    “네가 인간이 아니어서 내가 널 싫어하기라도 할까 봐?”

    “응.”

    “넌 나를 어떻게 보는 거야? 그랬다면 애초에 늑대들과 함께하지도 않았어.”

    밀로가 그 말에 야트막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의미가 아닌데. 짐짓 미간을 찌푸리던 이엘이 밀로의 손에 살짝 힘을 주었다가 뗐다.

    “그러니까 굳이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 미르.”

    “…….”

    “내가 내 정체를 말했던 건 아주 지극히 이기적인 마음이었어. 내 속 편하자고 말한 거니까. 그러니까 너도 이기적으로 굴어도 돼.”

    물끄러미 이엘을 바라보던 밀로가 쥐고 있던 하얀 손을 앞으로 쭉 끌어당겼다. 작은 힘에 못 이기는 척 끌려간 이엘이 따뜻한 눈빛을 보냈다. 밀로는 그렇게 한참이나 그녀를 바라만 보다가 잡고 있던 하얀 손을 제 입가로 끌었다.

    그러곤 이엘의 손등 위에 짧게 입술을 묻었다가 뗐다.

    “황위에 오르고 싶어?”

    “응.”

    “땅 말고. 다른 곳에서 군림하는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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