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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142화 (142/488)
  • 142화

    거의 확신한다. 노아와 함께 습격을 받던 곳에서 그들을 구해 주었던 그 금발의 남자. 얼굴을 반이나 가렸기 때문에 확실하지는 않지만, 분명 꿈에서 보았던 남자였다. 바람에 나부끼던 천이 들썩거려 그의 얼굴을 보여 주었던 그 찰나를 분명히 기억한다. 종말이 보였던 그 꿈에서 금발의 청년은 이엘의 곁에 섰던 인간들 중 하나였다.

    그래. 그 꿈은 점차 현실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모두를 구하고 싶다. 모두의 생명의 가치가 동등하게 중요하기 때문에 나는 모두를 구하겠다. 이런 이상적인 소리를 하고 싶은 게 아닙니다.”

    물론 그게 가장 기본적인 신념이었으나 그런 차원의 성인 같은 마음은 솔직히 아니었다. 이엘은 제게 집요하게 닿는 노아의 시선을 비스듬하게 피하며 말을 이었다.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미래를 만들려고 합니다.”

    “도무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간단히 말하면 3차 전쟁을 막겠다는 말이에요.”

    “일어날지, 일어나지 않을지 모를 전쟁 따위를 네가 무슨 수로?”

    “모두 알고 계시잖아요, 죽음이 점점 가까워지는 걸. 인간인 저도 느끼는데 이종족인 당신들이 모를 리 없잖아요.”

    그 말에 침묵했다. 그들은 모두 단순한 은폐호라기엔 한 종족의 영지에 가까울 정도로 거대했던 본거지를 기억한다.

    인간들의 기술력은 점점 진보하기 시작했다. 아니. 진보라는 단어는 조금 우습고. 되찾아 가고 있다고 표현하는 게 맞겠지. 찬란했던 제국의 부흥기를 향해. 인간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위를 찾기 위해 전쟁을 준비할 것이다.

    “제가 할 수 있습니다.”

    그게 신께서 나와 이온을 남겨 두신 이유가 아닐까. 어쩌면 ‘목소리’와의 만남도 신의 계획 안에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쑥 찾아왔다. ‘그’는 자신을 찾아오면 안 됐다. 자신이 아니라 이온에게 갔어야 했다.

    신은 내가 아니라 이온을 택하신 거니까.

    “……저만 할 수 있는 일이거든요.”

    씁쓸하게 웃는 이엘을 쳐다보며 노아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불안함과 맞닥뜨린 본능적인 몸부림이었다.

    쾅―! 의자가 뒤로 넘어가는 소리가 커다란 홀에 메아리쳤다.

    “나타니엘. 내게 그런 얘기까진 하지 않았잖아.”

    “저는 제 뒷배가 되어 줄 종족을 찾고 있습니다.”

    “나타니엘!”

    “되도록 늑대가 그래 주었으면 하고요.”

    “…….”

    “그 옛날, 영광스러웠던 황실기사단의 기개를 이어 가고 있는 게 늑대니까요.”

    저런 얘기까진 하지 않았다. 그냥 무리에 자신의 존재를 밝히겠다고만 말했다. 앞으로의 미래를 어떻게 하겠다는 말 따위, 하지 않았다.

    ‘어쩌면 폐하와 다른 길을 가게 될지도 모르겠네요.’

    ‘무슨 말이지?’

    ‘그냥요. 그냥 제가 인간이고 폐하는 늑대이시니, 생각이 다르다는 말씀입니다.’

    그날 꽃밭에서의 말이 이런 뜻이었던 것인가? 그때 내가 무엇이라 답했지.

    ‘같이 하자.’

    ‘네?’

    ‘네 뜻대로, 같이 하자고.’

    노아는 이엘이 밖으로 나서는 게 극도로 두려워졌다. 언제부터 두려움으로 감정이 변질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할 수 있는 한 모든 힘을 다해 감추고만 싶었다. 그게 비뚤어진 대책이란 걸 알고는 있지만,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엔 큰 차이가 있었다.

    지금의 세계는 이엘에게 시한폭탄과도 같은 공간이었다. 그곳에 ‘드러낸다’라는 게 무슨 의미가 될지, 이종족의 왕인 노아는 누구보다 절실히 알고 있었다.

    “불허한다.”

    “폐하께서 허락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닌걸요.”

    “나타니엘!”

    “그럼 달리 방법이 있습니까? 제가 생각한 방법이 뭔지도 모르시면서 서두부터 딱 잘라 불허하시다니요. 분명 폐하께선 저를 존중해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잊으신 건 아니시죠?”

    앙칼진 건지 교활한 건지. 조금의 틈도 주지 않고 맹렬하게 대꾸하는 이엘을 바라보며 노아는 입을 다물었다. 그래. 맞아, 그녀는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괜히 제 마음이 쓸데없이 불안한 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굳이 네가 인간 여자, 그것도 전 제국의 황녀라는 사실을 밝힐 필요가 있었나? 네가 말하지 않았더라면 우린 평생 몰랐을 텐데.”

    “글쎄요. 제가 여자라는 사실은 언젠가는 드러날 일이었습니다. 그걸 막아 주던 약이 다 떨어졌거든요.”

    “…….”

    “밝혀지는 건 싫었습니다. 제 스스로 밝히고 싶었어요. 그게, 적어도 늑대와 보냈던 시간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정말로 제가 감추고 싶지 않아서 드린 말씀이에요. 그 나긋나긋한 목소리에, 우논들의 매서운 눈동자에 어려 있던 한기가 사라져 갔다. 이엘의 말대로 그녀의 눈동자엔 그 어떤 속임수도 보이지 않았다.

    “그럼 아까 말한 든든한 뒷배라는 게, 네가 암컷이란 걸 감춰 달라는 뜻인가?”

    “아니요. 그건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곧 아시게 될 거예요.”

    치열하던 논쟁이 멎고 정적이 찾아왔다. 그러나 그 정적도 얼마지 않아 깨졌다.

    “그럼 네가 하고자 하는 말의 요점이 뭐야?”

    저 멀리 앉아 있던 앤디가 사납게 구겨진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는 줄곧 우논들과 이엘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를 믿었으니까.

    여자였고, 심지어는 황녀였다는 사실에 적잖게 당황했지만 그건 앤디가 수긍하며 넘어갈 일이었다. 그는 이미 동생과 같은 이엘을 한 번 외면한 적이 있었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 이번에는 무조건 감싸 줄 생각이었다.

    그때 로빈에게서 건네받았던 그 황자의 반지. 어쩌면 어렴풋하게 느끼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저 범상치 않은 소년이 평범한 인간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걸. 요요하게 빛나는 눈동자와 밤처럼 새카만 머리카락이, 처음부터 진실을 방증하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앤디는 그런 것 따위 괘념치 않기로 했다. 그저 신분이 다르고, 종족이 다른 제 동생일 뿐이다.

    하지만 대화가 진행될수록 그의 마음엔 노아와 같은 걱정과 염려가 꽃피기 시작했다. 대체 쟤가 왜 저럴까? 뭘 하려는 건지 말을 빙빙 돌리고 은근히 화제를 바꾸는 것 같았다. 시원하게 털어놓지 않고 어딘지 모르게 감추는 것처럼 보였다. 이엘답지 않았다.

    조급함과 두려움이 동시에 피어난다. 앤디는 주드와 같은 일을 또 겪고 싶지 않았다.

    “저는.”

    긴 호흡 끝에 이엘이 입을 열었다. 또렷하고 명료한 발음이 모여 있던 우논들의 귀에 쏙쏙 박혔다.

    “저는 황위에 오를 거예요.”

    일순 녹안에 생기와 살기, 그 경계 언저리에 있는 묘한 빛이 웃돌았다.

    “그러니 늑대들은 준비를 하세요.”

    나와 함께할 마음이라면, 황제를 맞을 준비를.

    *

    “폐하. 진정하십시오.”

    “네가 나라면 흥분하지 않을 수 있겠나?”

    “그녀의 계획은 이상적입니다. 믿기지 않게도요.”

    “글쎄.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폐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오헬을 반려로 맞지 않으신다고 하셨다면, 그게 우리 종족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입니다.”

    “그렇다고 사지로 몰라고?”

    “그러니 든든한 뒷배가 되어야지요.”

    “…….”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든든한 기사단으로 그 기개를 이으면 됩니다.”

    그러나 그 안엔 생략된 뜻이 있었다. 즉,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즉각 처분.

    ‘그러니 가장 절개가 공고한 늑대들이 제 뒤에 있어 주면 됩니다.’

    ‘…….’

    ‘저를 천칭으로 생각하세요.’

    ‘나타니엘.’

    ‘조금이라도 흔들림을 보이면, 무게가 조금이라도 한쪽으로 치우친다면. 그때 여러분의 검으로 내리치십시오.’

    어떻게 그런 말을 해. 어떻게 나더러 널 내리치란 소리를 하지? 노아는 이를 악물며 두 손바닥 안에 얼굴을 파묻었다. 방법이 정말 그것밖에 없을까? 너를 황위에 꼭 올려야만 하는 건가? 그러지 않고도……. 그러지 않으면 정말 방법이 없어?

    천칭이 되겠다니, 그 무슨…….

    차라리 황위가 욕심이 난다고 하지 그랬어. 씁쓸하게 웃었다. 그랬다면 어떻게든 널 황제로 만들 마음도 있었는데. 멍청한 늑대의 왕은 기꺼이 그녀에게 황위를 안겨 주었을 테다. 아니, 그게 꺼려진다면 늑대의 알파로 인정하는 방법도 있다. 이름만 다를 뿐이지, 늑대들의 왕이라는 건 이 세계에서 꽤나 근사한 위치였으니까.

    하지만 그가 사랑하는 인간 여자는 그런 허울뿐인 자리를 원하는 게 아니었다.

    인간들은 신의 창조 이래로 이종족의 위에서 군림하며 살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자리를 찾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것이다. 인간들은 끝도 없이 생각하고 고민하고 마침내 방법을 찾아내겠지. 아무리 신의 축복이 거두어졌다고 해도, 지적인 면에서는 이종족이 그들을 이길 수 없다. 또한 보호석의 존재 역시 간과할 수 없고.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도 물 수 있다. 11년 전의 2차 전쟁에서 이종족이 그러하지 않았던가. 이대로라면 모든 종족이 멸망하게 된다. 절망뿐인 세계에서 만난 유일한 빛을 이렇게 잃고 싶지 않았다. 노아는 그녀를 놓아 버릴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놓을 수 없다.

    “나타니엘이 황제가 된다고 치면…… 그래, 우리가 그녀를 황위에 올린다고 해도 다른 종족의 반발은 막을 수 없을 텐데.”

    “그건 그녀의 몫입니다. 자신이 알아서 한다고 했으니까요.”

    그 점이 걸렸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그 부분만큼은 말해 주지 않았다. 늑대들과 달리 다른 종족은 이렇게 순순하지 않을 텐데. 무슨 다른 계책이라도 있는 걸까. 그게 아니면 숨겨진 무언가라도 있는 건가.

    안드로를 비롯한 몇몇 우논들도 그녀의 결심에 흔쾌히 수긍한 게 아니었다. 어쩌면 이엘은 이들의 의문을 해소시킬 방법으로 저런 말을 했을지 모른다. 다른 종족의 마음을 어떻게 돌릴지, 그게 늑대들이 내민 마지막 관문이 되겠지. 노아는 피로함에 짧은 한숨을 쉬며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래, 우선은……. 그 빌어먹을 꿈이 예지몽 따위가 아니란 걸 이엘에게 알려 주는 게 우선이다. 그녀가 이토록 전쟁에 연연하게 된 건 전적으로 그 꿈 때문이니까.

    그 남자의 존재 역시. 자신들이 영지로 오는 길에 만났던 그 금발의 인간 남자. 그자의 얼굴을 제대로 본 것도 아니면서 꿈에서 봤다고 단언했다. 그 꿈에서 본 전쟁을 막기 위해 저렇게 고군분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꿈이 쓸데없는 꿈이란 걸 증명하면 되겠지. 최소한 그녀의 초조함은 덜어 줄 수 있을 테니.

    “안드로. 내가 알려 준 곳으로 정찰병을 보내. 거기서 그 인간 남자를 데려와.”

    “정중하게 데려올까요, 아니면 납치를 할까요.”

    우아하게 묻는 안드로를 향해 네 마음대로 하라며 대충 손짓했다. 안드로는 정찰병을 보내기 위해 문 쪽으로 향하다가 다시 몸을 돌려 노아에게 공손히 말을 건넸다.

    “걱정 마십시오, 노아 님.”

    “…….”

    “그 종족은 멸종했으니 나타날 리 없습니다.”

    정확히는 멸종당한 거지만. 굳이 정정하지 않아도 모두가 아는 이야기니 안드로는 그쯤 하고 집무실을 나갔다. 노아는 안드로의 말을 떠올리며 애써 속을 가라앉혔다.

    이엘이 꿨던 꿈에는 그 인간 남자를 비롯해 다른 이종족도 등장했는데, 불행히도 그들은 이미 사라져 버린 종족이었다. 그러니 안드로의 말처럼 나타날 리 없다.

    그 꿈은 거짓임에 틀림없다.

    *

    “역시 안 되네…….”

    레온의 영지에서 돌아온 뒤로 몇 번이나 시도했지만 전부 실패했다. 마치 결계가 막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문득 이엘의 시선이 저 멀리 보이는 성전에 닿았다. 이엘은 한참의 고민 끝에 로브를 걸쳐 입고 성을 빠져나왔다.

    달빛이 유난히 아름다운 밤이었다. 마치 길었던 오늘 하루의 피로를 녹여 주는 것처럼 보는 것만으로도 뒤숭숭한 마음을 위로해 주었다. 넋을 놓고 멍청하게 달을 바라보던 그녀의 곁으로 누군가 다가왔다.

    “로니.”

    “…….”

    “경계하는 거니?”

    새삼 서운한 마음이 드네. 이엘이 씁쓸하게 웃으며 두 손을 감추듯 뒷짐을 지고 가만히 로날드를 쳐다보았다. 로날드는 근처까지 왔으면서도 평소처럼 꼬리를 살랑거리거나 하지 않았다. 마치 먹이 바라보듯 시선을 그녀에게 박은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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