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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141화 (141/488)
  • 141화

    “제 가문은 저 아이를 인정합니다.”

    앤디의 말에 그와 방계로 이어진 늑대들이 눈을 휘둥그레 치떴다.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이었지만 가문의 수장인 그가 허락한다는데 무슨 말을 하겠는가. 쩝, 입맛을 다시며 꼬리를 내리는 수밖에. 앤디는 고요하고 단단한 눈동자로 이엘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오헬을 제 가계에 입적하지 말라고 하신 겁니까?”

    “물론. 네 가문이 가당키나 한가?”

    노아가 피식 웃으며 맞장구치자 앤디가 미간을 찌푸렸다. 노아에게서 시선을 돌린 앤디는 이엘을 향해 전과 다를 바 없는 눈빛을 보냈다. 이제야 조각이 조금씩 끼워지는 기분이었다. 짐작대로라면 노아 역시 이엘의 비밀을 안 지 얼마 되지 않았을 것이다. 앤디는 손을 뻗어 이엘의 어깨를 다독거렸다.

    “폐하께서 네 뒤에 계시지 않는다면 내가 뒤에 있을게.”

    “앤디 님.”

    “이래 봬도 우리 가문은 꽤 영향력이 있는 편이라고. 믿기지 않겠지만.”

    나 이래 봬도 공작이거든? 그가 으스대자 이엘의 입가에도 그제야 작은 미소가 걸렸다. 노아는 그녀의 안색을 확인한 뒤 어깨로 안드로를 툭 쳤다. 왜 그러십니까, 폐하? 미간을 찌푸린 안드로의 물음에 노아는 턱짓을 할 뿐이었다. 안드로는 그의 귀찮은 상관을 못마땅하게 쳐다보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의 가문도 오헬을 인정한다.”

    “안드로 님!”

    “말도 안 돼!”

    늑대 무리들의 가장 높은 가문 두 개가 인정한다는데……. 그러나 다른 귀족들은 쉽게 수긍할 수 없었다. 결국 그들 중 하나가 손을 들고 왕의 앞으로 나아왔다.

    “귀족회의를 열고 싶습니다. 여기 계신 두 공작 각하도 참여하시는 걸로요.”

    “좋아, 허락한다.”

    그들이 이엘을 바라보는 표정은 조금 미묘했다. 씁쓸함과 미안함, 울화와 서러움이 고루 섞인 복잡다단한 낯이었다.

    *

    “소집?”

    “전쟁을 준비하는 건 아닌 듯싶습니다만, 종족 내에 문제가 생긴 건 분명합니다.”

    “무슨 일인지는 정확히 모르고?”

    “입이 무거운 종족이니 알아내긴 어려울 듯합니다.”

    로빈이 비스듬하게 기울이고 있던 고개를 바로 하고 제 앞에 선 리플을 바라보았다. 한쪽 어깨의 인대가 끊어진 리플은 있으나 마나 한 붕대로 어깨를 지지하고 있었다. 비록 한쪽 어깨는 잃었으나 여전히 그의 곁에서 충성스런 심복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아무리 납치하는 것에 집중했다고는 해도 리플은 오랜 시간을 홀로 로빈을 보좌할 만큼 문무에 출중한 자였다. 심지어 로빈을 작위에 올리기 위해 수많은 직계와 방계를 홀로 처리하지 않았던가. 그런 로빈의 어깨에 칼을 마주 꽂을 정도라니. 이러니 탐이 날 수밖에. 턱을 엄지로 쓸며 로빈이 교활한 미소를 지었다.

    “매 쪽에서 알아낸 정보는 정확한 건가?”

    “예. 늑대의 영지에 안전하게 도착한 뒤로 줄곧 영지에 머물고 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오헬을 사냥하려던 놈들은? 처리했나?”

    “말씀하신 대로 반은 먹어 치웠고, 반은 살려 뒀습니다.”

    “그래. 겁도 없이 내 먹잇감을 노리다니. 그것도 인간 주제에 말이야. 가만 보면 인간들은 참 웃겨. 동족이면서 서로에게 총을 겨누는 꼴이, 우리보다 못하잖아.”

    로빈은 집착이 심한 편이었다. 그의 사정거리에 들어온 먹잇감은 절대 도망칠 수 없을 정도로. 그는 사냥감이 자포자기하기 직전까지 궁지로 몰아넣는 것에 희열을 느끼는 종족이었다. 또한 제 먹잇감을 노리는 것들에겐 자비를 줄 마음이 없는 자이기도 했고.

    부러 놔두었다. 그가 원한다면 그깟 늑대들의 영지에서 인간 하나 빼내지 못할 게 무엇인가. 전력을 다한 게 아니었다. 기회를 엿보며 관망하고 있을 뿐이었다. 어쩌면 발악하는 꼴이 보고 싶어 틈을 준 것일 수도 있고.

    그러니 포기한 것 또한 아니다. 소년은 엄연히 자신이 먼저 발견한 먹잇감이었다. 제 것. 제 먹잇감을 함부로 노린 것들에겐 마땅한 보복이 필요하다 여겼다. 그래서 로빈은 며칠 전 노아와 이엘의 뒤를 쫓던 사냥꾼 무리의 절반을 먹어 버렸다.

    “놈들에게 수거한 보호석은 폐하의 침실에 두었습니다.”

    “아, 보호석 말인데. 늑대들이 왜 그걸 수거해 갔나 생각 좀 해 봤어.”

    “예.”

    “거기 나자르가 하나 있잖아?”

    “…….”

    “보호석은 나자르의 피와 생명으로 만들어졌어. 그러니 성력으로 변형도 가능한 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 그게 아니면 파괴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거든.”

    “확인해 볼까요?”

    “금서 구역에서 가져온 금서들을 좀 살펴봐.”

    “네.”

    “그리고.”

    “하명하십시오, 로빈 님.”

    “황족에 관한 책도 좀 가져와. 제국서 같은 것.”

    “제국서는 늑대들의 습격 때 불탄 것으로 추정됩니다.”

    불탄 게 아니다. 빼앗겼군. 로빈의 입꼬리가 위로 비죽 올라갔다.

    조금씩 가닥이 잡혀 간다. 그 믿기지 않는 녹안과 흑발. 그리고 황자의 반지. 늑대들이 훔쳐 간 제국서. 조각들을 조금만 모아도 추측이 가능하지 않겠는가. 물론 확신이 좀 필요하지만.

    “재밌는 게임을 좀 해야겠어.”

    “…….”

    “스스로 걸어오는 꼴도 제법 재밌을 듯하니.”

    “예, 폐하.”

    왕의 취향이 제법 고약하니 만반의 준비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늑대들은 보통 왕이 없이 귀족끼리만 따로 회합을 갖는 일이 적었다. 주축이 되는 우두머리 없이 일을 처리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번 귀족회의는 꽤 오랜만에 열린 단독 회합이었다. 걱정 말라며 자신을 향해 웃어 주며 들어가던 앤디의 얼굴과 단호한 안드로의 얼굴이 번갈아 떠올랐다.

    “걱정 마. 공작 둘이나 널 지지하니까.”

    “각오는 했지만…… 역시 좀 떨리네요.”

    노아가 들으면 섭섭할지 모르겠지만, 노아 혼자에게서 거절당하는 것과 늑대 무리 전부에게 거절당하는 것은 천양지차였다. 게다가 조금 전 자신을 황망히 바라보며 뒷걸음질 치던 새끼 테르들의 모습이 떠올라서 더 그런 건지도. 마른침을 삼키며 짧게 한숨을 쉬었다.

    노아는 따뜻하게 데운 우유를 담은 잔을 내밀었다. 애써 웃는 이엘의 옆에 앉아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솔직히 말하면 노아는 아주 조금 후회하고 있었다. 차라리 제 반려로 삼아 그대로 밀어붙이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저렇게 긴장하는 모습을 보는 게 자신에겐 솔직히 고역이었다.

    “폐하. 실례하겠습니다.”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안드로가 들어섰고 그 뒤로 머리를 빼꼼 내미는 앤디의 얼굴도 보였다.

    “회의는?”

    “귀족들이 오헬의 참석을 원하고 있습니다.”

    “괜찮겠나?”

    “네, 그럼요. 걱정 마세요, 폐하.”

    이엘이 옷을 툭툭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담담한 그녀와는 달리 노아의 낯은 좋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늑대들이 오헬에게 우호적이긴 했지만 그건 그녀의 신분이 평민이라는 전제하였다.

    그러나 이엘은 억지로 입꼬리를 당겨 미소를 지었다. 이건 스스로 해결해야 할 문제 중 하나였다. 자신밖에 할 수 없는 일이기도 했고.

    이엘뿐 아니라 노아의 참석까지 바라는 걸 보니 늑대들은 뭔가 제안을 하려는 듯했다. 대충 무슨 말을 할지 감이 온 이엘은 평소와 다르지 않은 표정으로 회의실로 들어섰다. 가장 상석에 노아가 앉고 나서야 우논들도 각자 자리에 다시 착석했다.

    “우선 표결 결과를 말씀드립니다, 폐하.”

    “말해.”

    “찬성 4명, 반대 4명입니다.”

    “나머지는.”

    “무효표입니다.”

    안드로와 앤디를 비롯한 두 우논 외에는 사실상 반대표란 이야기였다. 말이 무효표지, 그간 든 정을 외면치 못해 차선을 선택한 것이 분명했다. 무효표를 던진 우논들이 고개를 숙이며 왕의 시선을 피했다. 이도 저도 아닌 결과를 낸 것은 늑대답지 못했다.

    하지만 이건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가족처럼 온갖 일, 심지어는 전쟁마저 함께 한 그녀를 외면할 수 있을 리가. 이엘이 늑대 무리에 공헌한 헌신을 잊어버릴 만큼 늑대들은 단호하지 못했다. 이엘이 대중 앞에서 함께 울고 웃었던 것이 진심이었다며 고백한 것 이상으로, 늑대들도 같은 마음이었으니까.

    “그럼 너희가 낸 결과는 무엇이지?”

    “한 가지 여쭙고 싶습니다.”

    “말해.”

    “오헬…… 그러니까 저 인간 여자를 폐하의 반려로 맞으실 것입니까?”

    “…….”

    “폐하께서 그러하신다면 저희의 반대표와 무효표는 아무 효과가 없습니다. 저희는 폐하의 말씀에 순종하겠습니다. 또한 오헬을 저희의 주인으로 섬기겠습니다.”

    “그러지 않겠다면?”

    “그렇다면 오헬의 이야기를 들어 봐야겠죠.”

    노아가 짤막한 한숨을 흩뿌렸다. 이엘의 존재는 늑대에게 독이기도 했고 약이기도 했다. 아니. 그녀의 존재 자체가 이종족 모두에게 독과 약이다.

    “나타니엘을 나의 반려로 맞지 않겠다.”

    “…….”

    “하지만 내게 그녀가 소중하다는 건 변하지 않아.”

    “…….”

    “너희가 그녀를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해도, 내 마음이 변하는 일 또한 없다.”

    이 무슨 협박 아닌 협박인가. 우논들의 미간이 보기 좋게 갈라졌다. 그러나 어찌 됐든 왕께서 이 일에 관해서는 저희에게 온전히 책임을 맡겼으니, 결국 결정하는 것은 귀족들의 몫이었다. 대표 격으로 말하던 우논 중 하나가 시선을 이엘에게로 향했다. 끄트머리에 앉아 있던 그녀가 담담하게 그 시선을 받아 냈다.

    “오헬. 묻겠다.”

    “말씀하십시오.”

    “너는 왜 이곳으로 온 거지? 내가 너였다면 아무도 찾지 못하는 곳에 꽁꽁 숨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넌 네 원수인 우리의 무리에 제 발로 찾아 들어왔지. 모든 게 우연이라는 변명은 통하지 않아.”

    “…….”

    “복수를 위해서였나?”

    정적이 쏟아졌다. 근본적인 물음이었다. 오히려 아무것도 묻지 않았던 르네와 노아가 우스울 정도로, 당연한 질문이었다. 이엘은 제게 쏠린 시선들을 하나하나 마주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

    “제 모든 걸 빼앗아 간 당신들에게 복수하고 싶었어요.”

    분위기가 차갑게 내려앉은 건 당연했다. 노아조차 저런 답이 나올 줄 몰랐던 건지 딱딱하게 굳은 얼굴이었다. 안드로는 예상한 듯했다. 그는 그저 차갑게 식은 노아의 차를 버리고 다시 뜨거운 물을 내릴 뿐이었다. 졸졸졸. 물이 잘게 떨어지는 소리만 들렸다.

    “당신들을 죽이고…… 내가 숨 쉴 곳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거짓을 말하지 않기로 했다. 적어도 자신이 꿈꿨던 과거의 일만큼은 더 숨기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신뢰 관계. 그것만큼은 무너져서는 안 되니까. 어느 날의 노아가 말했던 것처럼.

    “하지만 그럴 수 없게 됐죠. 왜냐하면 당신들은 내게 전부를 주었으니까요.”

    “…….”

    “때론 친구가 되어, 또 때론 가족이 되어.”

    “…….”

    “때론, 나를 위해 목숨을 버리면서까지요.”

    돌이켜 보니 언제나 가장 큰 가치는 자신의 목숨이었다. 그 어떤 것보다 무거웠고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어서. 끝내 그토록 사랑한다던 오라비의 목숨과도 바꾸지 못했다.

    왜였을까. 왜 나는 이온이 눈을 뜨면 곧장 죽어 버릴 거라고 다짐했으면서, 정작 이온을 살리기 위해 내 목숨이 필요할 땐 입도 벙긋 못 했을까.

    답은 간단했다. 아무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제 목숨을, 자신이라도 붙잡고 싶었던 것이리라. 언제나 늘 누군가의 대용으로 살아야 했고 누군가의 마리오네트 인형이 되어야 했던 삶 속에서, 자신이라도 스스로를 붙잡지 않으면 정말 흔적도 없이 사라질까 봐.

    내가 이곳에 존재했음을 나조차도 잊어버릴까 봐. 나는 그렇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서.

    ‘지켜 주고 싶었는…….’

    그러나 죽어 가는 그 순간까지 나를 지켜 주려던 존재가 있었다. 주드는 하잘것없는 내 목숨을 위해 죽었다.

    그리고 늑대는 기꺼이 자신의 울타리가 되어 주었다.

    “저도 후회해요. 이곳에 온 걸.”

    차라리 내가 피도 눈물도 없는 잔인한 성격이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웃기게도 조금 곁을 내주었다고 그 곁에 파묻혀 지내는 생활에 익숙해져 버려서. 나는 아버지를 닮아 난폭한 성격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어머니의 성격을 닮았던 걸까. 자조하듯 미소를 그리던 이엘이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같잖은 복수심은 버린 지 오래예요. 내 복수를 위해 또 다른 희생양을 만드는 건, 결국 다른 형태의 복수를 불러올 테니까요.”

    갈림길에서 길을 정했다. 어떤 게 가치 있는 삶인지, 어떤 게 의미 있는 삶인지. 이엘은 드디어 결정을 내렸다.

    “우릴 용서라도 하겠다는 건가?”

    우논의 말에 이엘이 작게 웃었다. 아니요. 전 성자가 아니에요. 덧붙여진 그녀의 말에 늑대들은 미간을 좁혔다.

    “그럼 무슨……,”

    “곧 3차 전쟁이 발발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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