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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140화 (140/488)
  • 140화

    쉬는 동안 오드는 지쳤던 몸을 완전히 회복했다. 덕분에 꽤 빠른 속도로 이온이 잠들어 있는 곳에 도착한 이엘은 오드를 뒤로하고 먼저 이온의 방으로 향했다. 그녀의 오라비는 세상모르고 편안하게 눈을 감고 있었다. 늘 그랬듯 침대 아래 주저앉아 이온의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넘겨 주었다.

    “오빠.”

    오빠.

    “미안해.”

    고마워.

    “조금만 더 기다려 줘.”

    변한 건 없어, 오빠.

    “그러니까 걱정 안 해도 돼, 오빠.”

    꿈에 나오지 않아도 돼, 오빠. 뒷말을 삼킨 이엘은 일그러진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 올리며 다정하게 검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었다.

    어느새 자신보다 더 길어진 머리카락이 미세한 바람에 옅게 흩날렸다. 그녀는 아무것도 모른 채 잠든 오라비의 예쁜 얼굴을 바라보았다. 한때의 유혹으로 억지로 연명하는 네 목숨의 가치를 무게로 재기도 했다. 하지만 역시 난…….

    “미워하지 않아, 오빠. 그런 거 다 부질없더라.”

    애증. 증오가 더 컸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해묵은 감정은 이제 사라졌다.

    “오빠가 내게 주었던 이 삶이 얼마나 감사한 건지 이제야 알았거든. 여전히 내가 숨 쉴 곳은 비좁고 적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해. 고마워, 오빠.”

    이엘이 이온의 동그란 이마에 입술을 짧게 묻었다가 뗐다. 벌써 며칠째 이온의 꿈을 꾸고 있었다. 최근 들어 잠을 설친 탓도 있겠지만, 이렇게나 집요하게 제 꿈을 찾아온 건 처음이었다. 아니. 찾아온 게 아니라 제 의식이 그를 찾아간 거겠지.

    그러지 마― 그녀의 오빠가 그렇게 말했다. 주어가 없는 문장이었지만 충분히 유추할 수 있었다. 빙그레 웃는 그녀를 품에 안아 주며 이온이 꿈속에서 또 한 번 말했다.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런 세상을 만들고 싶었어. 내가 황위에 오르면…… 네가 새장 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그런 땅을 만들고 싶었어.’

    알고 있다. 어린 날의 이온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고 그는 동생을 위해 황도를 걷기로 마음먹었다는 걸. 폭군인 아비의 아래서 성군이 되기 위해 노력했던 건, 제 동생과 같은 약자들을 위해서였다.

    ‘나의 엘. 그러지 마.’

    ‘…….’

    ‘그러지 않아도 돼.’

    그래서 이번엔 그녀가 오라비의 황위를 단단하게 지켜 주고자 했다.

    ‘네 행복이 우선이야, 내 동생.’

    매번 꿈은 거기서 멎었다. 내 무의식이 네게 그런 답을 바랐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조금은 우스워졌다. 여전히 나는 변한 게 없나 싶어서.

    이엘이 자조하며 이온의 마른 뺨을 손등으로 쓸었다. 성장기에 잘 자라지 못한 건 그녀뿐 아니라 이온도 마찬가지였다. 푹 꺼진 볼이 이엘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세상에 하나뿐인 혈육이다. 한때는 삶의 미련이었고 또 한때는 제 전부였다. 오빠가 선물한 새 삶은 그녀에게 많은 것을 주었다. 그러나 그것들에 마음을 많이 주었다고 한들, 전부였던 오라비를 버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여전히 그 무엇보다 사랑하는 오빠이거늘.

    “엘. 괜찮니?”

    “응. 얼굴을 보니 좀 편안해지네.”

    “초조하구나.”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내가 성력을 쓸 수 있는 한. 걱정 마.”

    오드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쓸어 넘겨 주며 위로했다. 언제나 제멋대로였으니 이번에도 오빠가 날 용서해. 이엘은 오드의 품에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왜 모이라고 한 걸까?”

    노아와 이엘이 귀환하고 이틀 후의 일이었다. 저 멀리 떠났던 정찰병까지 소집령이 떨어졌다. 엄청난 수의 늑대들이 모이기까지 이틀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왕이 늑대들을 전부 소집하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이전에 뱀의 뒤를 치거나 인간들의 본거지를 소탕하던 때가 아니고서야. 또 전쟁이라도 하시는 걸까. 늑대들이 한참 수군거렸다.

    저 멀리 왕성에서 나오는 세 사람이 보였다. 노아와 안드로, 그리고 이엘이었다. 세 사람이 모습을 드러내자 앞에서 기다리던 오드와 밀로, 스완이 그들과 합류했다. 평야에 줄을 맞춰 앉아 있는 늑대들의 모습은 가히 장관이었다. 이엘이 마른침을 삼키자 노아가 그녀의 어깨를 다독거려 주었다.

    “걱정 마.”

    “걱정하지 않아요. 감사해요, 폐하.”

    안드로는 침묵으로 그녀의 편에 섰다. 그를 설득하는 것도 이틀이 걸렸다. 이곳으로 나오기 직전까지 그는 경멸과 혼란이 섞인 눈동자로 그녀를 응시했다.

    솔직히 안드로까지 설득할 수 있을 거라곤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행보에 가장 놀란 건 이엘이었다. 그는 노아나 밀로처럼 자신을 신뢰해 제 손을 들어 주는 게 아니다. 자신의 선택이 늑대들에게 이익을 가져다줄 것이라 판단한 것이리라.

    그렇다면…… 틀리지 않았어. 괜찮아.

    이엘은 의문을 담아 자신을 바라보는 늑대들을 앞에 두고 길게 심호흡을 했다. 이건 떨리고 두려운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말하는 이도, 듣는 이도 모두가 용기가 필요한 사안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스스로 내린, 첫 번째 결단이기도 했다.

    “먼저 이곳에 모인 모든 늑대들께 시간을 내 주신 것에 대한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입을 뗀 게 저희의 왕이 아니라 인간 소년이라니. 그것도 저렇게 격식을 차리는 건 처음 봤다. 늑대들의 의문이 계속해서 불어났다.

    “저는 이곳에서 세 계절이 넘는 시간을 보내며 당신들과 많은 것을 나누었습니다. 때론 친구가 되어, 또 때론 가족이 되어. 믿기지 않게도 종족을 뛰어넘는 소중한 시간이었어요. 감사합니다.”

    그러자 저 멀리 앉아서 기다리던 로날드가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섰다. 그는 몹시 불안하게 낑낑거리기 시작했다. 오헬이 떠나려고 해……. 본능적으로 몸을 움찔 떨었다. 그러나 그를 향해 다정한 녹안이 미소를 머금었다. 괜찮아, 로니. 기다려. 응? 마치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그래서 저는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어요. 제 정체가 무엇인지도 묻지 않고 마음을 준 당신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 하나만은 믿어 주세요. 제가 여기 머무르며 함께 울고 웃었던 것만큼은 진심이었다고요.”

    “…….”

    “제 이름은 오헬이 아닙니다. 제 진짜 이름은 나타니엘 리카르디스 르뷔아.”

    일순 좌중이 고요해졌다. 그들의 귀를 괴롭히는 성 때문이었다.

    “11년 전에 살아남은 제국의 황녀입니다.”

    “…….”

    “진실을 숨기고는 늑대의 무리에 온전히 스며드는 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를 받아 달라고 청하고자 진실을 밝히는 게 아닙니다. 다만.”

    울컥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눌렀다. 주드가 살아 있을 때도 이렇게 진실을 말했어야 했는데. 그의 숨이 끊어지기 직전에야 죄책감에 토해 냈던 것이 떠올라 가슴이 먹먹했다. 저 멀리 놀란 표정을 짓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앤디와 눈이 마주쳤다.

    “더는 거짓말하고 싶지 않았어요.”

    설령 당신들이 나를 밀어낸다고 해도. 이엘은 늑대들을 향해 허리를 접어 인사했다.

    “처분을 기다리겠습니다.”

    그녀는 말을 마치고 입술을 깨물며 뒤로 돌아섰다. 노아는 그녀의 모습을 놓치지 않고 눈에 담고 있었다. 저렇게까지 저자세로 나갈 필요는 없었다. 이엘은 노아가 평생을 함께하고 싶은 반려로 인식하는 존재였고, 늑대 무리는 알파가 된 암컷 혹은 알파의 암컷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종족이었으므로. 그의 말 한마디면 그녀의 존재는 모두에게 수용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엘이 그것을 원치 않았고 노아 역시 그녀의 의견을 존중했다. 평생을 누군가의 딸, 누군가의 동생으로 살아온 그녀에게 자신의 암컷으로 살아가도록 종용할 권리가 노아에겐 없었다. 비록 자처하여 가시밭길을 걷기로 한 것이 마뜩잖지만 노아는 기꺼이 그녀의 뒤를 지지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이엘은 걸음을 옮기며 조금 전에 저를 쳐다보던 늑대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충격으로 얼룩진 얼굴은 그들이 내릴 답을 예측하게 해 주었다. 설령 버려진다고 해도 괜찮아……. 이엘은 마른 웃음을 지었다. 그래, 정말 버려지는 거구나. 오랜 시간 잊고 살았던 외로움이란 감정을 다시 마주해야만 하는 시간이 오고 있었다.

    “폐하께서도 알고 계셨습니까?”

    우논 하나의 물음에 곳곳에서 수군거리는 음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노아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시큰둥한 얼굴로 이엘을 지나쳐 무리의 앞에 섰다.

    “알고 있었다.”

    “폐하!”

    “나는 그녀를 받아들였으나 너희에게 강요할 마음은 없어.”

    “…….”

    “너희의 마음과 감정이 우선이야. 스스로 잘 생각해 봐.”

    무리가 술렁였다. 이 일에 관해 왕이 정말 손을 떼겠다는 뜻일까? 솔직히 노아가 나서서 그녀를 변호하면 늑대들은 할 말이 없었다. 원래도 무리의 우두머리에게 순종적이긴 했지만, 상대가 암컷이다. 몰살된 줄 알았던 인간 여자. 왕이 자신의 여자라고 두둔하면 늑대들은 그 말에 복종해야만 하는 것이다.

    늑대들이 혼란스러운 것은 당연했다. 이엘은 유일한 인간 여자이면서 동시에 그들의 원수인 황가의 씨앗이었다. 죽일 수도, 살려 둘 수도 없는 위치였다. 한참 동안 마른침을 삼키며 눈치를 보는 늑대들 사이로 누군가 성큼성큼 걸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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