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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139화 (139/488)
  • 139화

    소년의 채근에 이엘은 하려던 말을 꿀꺽 삼켜 버렸다. 그럴 리가 없으니까. 고개를 내저으며 사다리에 발을 내려놓는데, 남자의 품에서 벗어난 소년이 불안한 눈동자로 노아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테, 테르 맞죠……?”

    “어?”

    “설마 둔이에요?!”

    우논이란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하는군. 노아가 미간을 찌푸리며 이엘을 보았다. 이엘도 살짝 당황한 건지 입술을 열었다가 꾹 다물어 버렸다. 어쩌지? 그녀는 한참 만에 노아를 향해 어색한 웃음을 짓곤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응, 테르야.”

    그녀의 말에 기분이 상한 건지 노아가 짜증을 냈다. 하지만 우논이라는 정보를 적인지 아군인지 모를 놈들에게 굳이 말할 필요도 없었고, 도망치기에도 본체일 때가 나았기 때문에 노아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이종족을 무서워하긴 하지만 신기했던 건지 소년이 눈을 커다랗게 뜨며 노아를 쳐다봤다. 노아는 검은 눈동자로 소년을 보다가 말없이 이엘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등에 타. 사다리로 어느 세월에 가.”

    사다리에 내디뎠던 다리를 멋쩍게 거두며 그의 등 위에 올라탔다. 그와 동시에 소년은 날다람쥐처럼 사다리를 빠르게 내려갔고 노아는 이엘을 태운 채 깊은 구멍의 벽을 펄쩍펄쩍 뛰어 밟으며 지하로 내려갔다. 이윽고 남자가 사다리에 다리를 걸치며 뚜껑을 덮어 버리자, 구멍 안은 완전히 컴컴한 공간이 되어 버렸다.

    상당히 깊은 곳까지 이어졌다. 노아가 완전히 땅을 밟았을 땐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였다. 먼저 내려가기 시작했던 소년도 노아의 뒤를 이어 땅을 밟았다. 마지막으로 금발의 남자가 바닥에 도착했다.

    “여기서부터는 계속 어두워요. 제가 앞장설 테니까 잘 따라오세요. 형이 뒤에서 도와줄 거예요.”

    괜찮다는데도 노아는 이엘을 내려 주지 않았다. 잔뜩 예민해진 코를 찡긋거리며 작은 냄새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노아는 소년의 뒤를 따라 걸으며 뒤를 힐끔 쳐다봤다. 여전히 천으로 얼굴을 반이나 가린 남자는 짙은 눈동자로 이엘을 응시하고 있었다.

    “근데 우릴 왜 도와주는 거야?”

    경계를 늦추지 않은 그녀의 물음에 꼬마가 고개만 뒤로 홱 돌렸다.

    “형이 그러자고 했어요.”

    “뭐?”

    “형은 원래 어려운 사람을 외면하지 못하거든요.”

    꼬마가 말하는 형은 뒤에서 따라오는 남자인 듯했다. 저 남자가 실질적인 우두머리인가? 노아는 이상하게 저 남자가 마음에 걸렸다. 찝찝하다고 해야 할까. 마주치면 불편하다고, 짐승의 본능이 말해 주고 있었다.

    “저 사람들은 마을을 떠난 사람들이에요. 최근에 이종족 사냥을 시작한 무리이기도 하구요.”

    “이종족 사냥?”

    “보호석이라고 아세요?”

    “…….”

    “그게 강을 타고 떠내려왔거든요.”

    과거 부유하고 풍요롭던 제도는 이제 가장 하층부의 사람들이 사는 곳이 되어 버렸다. 전쟁은 생명만 앗아 간 게 아니었다. 그 땅을 넉넉하게 만들어 주었던 모든 것을 앗아 갔다. 제도로 흘러들어 오던 커다란 강줄기 역시 막힌 지 오래였다.

    사람이 사는 곳에 물은 필수 요소였다. 궁지에 몰린 인간들은 이종족의 눈을 피해 수로 개발을 시도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곳에서 뜻밖의 수확을 얻은 것이다.

    “우린 이종족을 싫어해요.”

    꼬마는 노아를 힐긋거리더니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노아는 소년의 말에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인간이 이종족 싫어하고, 이종족이 인간을 싫어하는 게 어디 하루 이틀이던가. 흔하디흔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편이 나뉘어졌어요. 이종족을 사냥하자는 쪽과 그러지 말자는 쪽.”

    소년과 남자는 후자 쪽이었다. 이종족을 싫어하는 것은 어느 쪽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사냥 무리가 되자는 건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고작 보호석 몇 개에 의지하여 목숨을 담보로 나서는 게 우습기도 했다. 게다가 여기 사람들은 전부…….

    “우리는 선택권이 없어요. 함부로 나설 수도 없죠.”

    소년을 따라 급경사를 올라갔다. 비탈길이라 위험했는데도 한두 번 오간 게 아닌지, 꼬마는 제법 잘 올라가고 있었다. 그러나 숨이 달리는 건지 그 이후론 말을 잇지 않았다. 한참이나 걸어 올라간 경사 끝엔 캄캄한 돌천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꼬마는 돌을 두드렸다. 똑똑, 똑똑똑, 똑똑― 어떤 일정한 규칙처럼 돌을 두드리자, 이윽고 천장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바스러져 떨어지는 흙을 고스란히 맞으며 이엘과 노아가 밀려드는 빛에 눈가를 찡그렸다. 읏―챠! 어린아이들의 힘주는 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그리고 드디어 돌천장이 완전히 열렸다. 아침을 밝히는 햇살이 눈이 부시도록 환하게 터졌다.

    “다녀왔어!”

    해맑게 뛰쳐나가는 소년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이엘의 앞으로 하얀 손이 불쑥 찾아들었다. 아주 작고 작은 손바닥엔 흉터가 가득했다.

    “반가워!”

    화상에 얼굴 한쪽이 일그러진 소년이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엘이 타고 있는 늑대가 무서우면서도 그녀를 반겨 주었다. 이엘은 저도 모르게 꼬마의 손을 잡고 노아의 등에서 내렸다.

    땅 위는 어느새 정오였다. 따사로운 해가 내리쬐는 곳에 어린아이들이 눈을 반짝이며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긴…….”

    어린아이들, 그리고 몸이 성치 않은 사람들, 노인들. 딱 보기에도 약자들로 이루어진 무리였다. 이엘은 입을 다물었다. 노아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인지, 그녀의 곁에 선 채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뒤를 지키며 올라왔던 남자가 모여든 사람들을 향해 손짓했다.

    ― 다들 들어가세요.

    ― 하지만……,

    ― 금방 돌려보낼 거예요. 걱정 말고 들어가세요.

    늑대를 힐긋거리며 불안한 표정을 짓는 사람들을 전부 물렸다. 결국 자리에 남은 건 이엘과 노아, 길 안내를 해 준 꼬마와 얼굴을 가린 남자뿐이었다.

    이엘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이 마을은 수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꽤 되는 듯했다. 조금 전 자신들을 데려온 꼬마만 하더라도 장애가 없음에도 수어를 사용했으니까.

    한편, 사람들이 모두 들어간 것을 확인한 남자는 꼬마에게 전해 달라는 듯 수어로 대화했다. 이엘은 다 알아들었지만 짐짓 모르는 척하며 소년의 말을 기다렸다.

    “형이 나가는 길로 안내해 줄 거예요. 걱정 말고 따라서 나가세요. 조심히 가세요!”

    “저기, 궁금한 게 있어.”

    “네? 뭔가요?”

    “아까 우릴 공격하던 사람들은 원래 너희랑 같이 지내던 사람들이야?”

    “네. 맞아요. 우릴 떠난 사람들이에요. 지금은 유목민처럼 전전하는 생활을 한다고 들었어요. 아까처럼 무리를 떠난 이종족을 보면 사냥을 하면서요.”

    “왜 사냥을 하는 거야?”

    “배를 곯고 있으니까요.”

    농작 따위 하지 않으니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결과다. 게다가 보호석까지 가지고 있다면 슬슬 사냥으로 눈길을 돌렸겠지. 원래도 ‘축복의 나무’의 과실에 만족하지 못하던 인간들이었으니.

    축복의 나무는 신이 주신 나무였고 나자르인들의 성력으로 그 줄기를 이어 가던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 성력을 불어넣어 줄 나자르가 전부 죽어 버렸으니…… 어쩌면 전쟁 이전부터 예견된 결과일지도.

    그러니까 지금의 이 사냥은 단순한 보복성이 아니라 인간들의 생계와 직접적으로 연결됐다는 의미였다. 이엘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꾹 쥐고 말았다.

    어리석었다. 내 아픔에 눈이 어두워 제대로 보지 못했어. 황궁에서의 황녀처럼 내 슬픔과 아픔만 바라보느라 해야 할 일을 잊어버렸다. 세상 물정 모르고, 그저 이온의 안위만 생각했어.

    나는 그렇게 배우지 않았는데. 나는 아비 같은 자를 혐오했는데. 결국 다를 바 없었다.

    “그럼 너희는……,”

    ― 그만. 더 이야기하지 마.

    남자가 소년을 향해 작게 경고했다. 꼬마는 뾰로통한 눈동자로 남자를 응시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그만 가세요! 안녕히 가세요! 그 말을 남긴 채 잽싸게 마을로 사라졌다. 남자는 끝까지 천으로 얼굴을 가린 채 두 사람을 향해 고갯짓을 했다. 따라오라는 신호였다.

    제국이 있던 시절에 인간들 사이에 귀족이란 작위는 그저 정치에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는 위치에 그치는 정도였다. 따라서 작위가 없는 일반 백성이라 할지라도 만족스런 위치를 누리며 살아갔다.

    물론 모리아나 레타 땅과 같이 버려진 백성도 있었지만 극소수였다. 대다수는 작위 따위에 관심이 없었고 그저 유흥이나 즐기며 살아가는 게 낙이었다.

    그러니 그 오랜 시간을 황족인 르뷔아 가문이 제국을 통치하는 게 가능했던 것이다. 반란? 인간들은 그저 현재 자신들의 위치에 만족했고 오히려 평화가 깨지는 걸 원치 않았다. 인간끼리는 완벽한 균형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서로를 향해 창을 겨눌 이유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런 인간들 사이에 분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유가 뭐가 됐든 틀어지기 시작했다는 게 중요했다. 곳곳에서 생긴 균열은 머지않아 큰 파도가 되어 사방으로 번져 갈 것이다. 이엘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말아 쥐었다.

    신께서 왜 나를, 그리고 이온을 살려 두셨을까. 마음을 달리 먹으니, 이제야 조금씩 그림이 보이기 시작했다.

    “감사합니다.”

    고개 숙여 인사를 마친 이엘을 향해 남자도 고개를 끄덕이며 마주 인사했다. 곧 그의 시선이 건조하게 노아에게도 닿았다. 딱 봐도 이종족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눈동자였다. 만약 이엘이 아니었다면 그들을 도와주지 않았을 터였다. 이엘은 서둘러 남자에게서 시선을 떼고 노아의 등 위에 올라탔다.

    고개를 돌린 이엘과 남자의 시선이 한데 얽혔다. 그 순간 얕은 바람이 일렁이듯 불어와 남자의 얼굴을 가린 천을 건드렸다. 그리고 아주 찰나, 천이 펄럭거리며 남자의 단단한 하관을 드러냈다.

    이엘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그러나 남자는 여전히 천으로 얼굴을 가린 채, 처음 그들과 마주쳤을 때와 마찬가지로 기척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이엘은 남자가 사라진 쪽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서둘러 주변을 살폈다.

    정말 그 사람이라면……. 언젠가 우린 또 만나게 될 테니까. 그를 찾기 수월하게, 그녀는 예리한 눈빛으로 주변을 아로새겼다.

    “꽉 잡아. 새벽이 되기 전에 도착할 거니까.”

    “노아 님. 드릴 말씀이 있어요.”

    “뭔데?”

    “당신의 허락이 필요하지만, 제 선택이기도 해요. 허락해 주세요.”

    이엘은 언제나 순종적인 제 백성들처럼 쉽게 그러겠노라 답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대다수는 왕의 명령에 고개를 끄덕이는 쪽을 선택했다. 거절하기보다는 다른 의견을 제시하는 걸 선호했다.

    그러나 이따금 이렇게 스스로 결단을 내리고 다짜고짜 통보하듯 말할 때면 노아는 묘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제 품을 떠나려는 것 같아 섭섭하기도 했고, 못내 대견하기도 했다.

    “그래. 무엇이든 네게 허락할게.”

    가장 큰 건 제 감정 탓이다. 단 하나의 반려만을 품는 종족 특성상, 자신이 그녀의 말을 거절할 리는 결코 없을 테니까. 그녀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게 아니고서는.

    *

    “다녀오셨습니까.”

    “그래.”

    귀환한 왕의 얼굴엔 상당한 피로가 어려 있었다. 안드로는 노아의 겉옷을 받으면서 그 뒤를 따라 들어온 이엘에게도 시선을 건넸다. 이엘은 안드로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작게 미소 지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안드로 님.”

    “일이 잔뜩 밀렸다. 쉬고 오후부터 바로 집무실로 나오도록 해.”

    “네, 알겠습니다. 오늘은 시간이 늦었으니 먼저 돌아가겠습니다. 폐하, 오후에 뵙겠습니다.”

    “…….”

    돌아오는 답이 없었다. 의문스럽게 쳐다보는 안드로의 시선을 피한 채 방을 나왔다. 닫힌 문에 등을 기댄 이엘은 짧게 심호흡을 했다. 괜찮아, 할 수 있어. 분명 할 수 있을 거야. 마음을 다잡고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새벽이었는데도 그녀의 냄새를 맡은 테르들이 저 멀리서 뛰어오는 게 보였다. 하나하나 반갑게 안아 준 이엘은 오후에 보자는 짧은 인사만 남긴 채 성전으로 향했다. 성전 입구엔 잔잔한 미소를 짓고 있는 오드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녀왔니, 엘?”

    “응, 다녀왔어. 무사히.”

    “밀로는 동쪽 탑에 머무르고 있어. 폐하께서 가둔 건 아니고 스스로 들어갔어.”

    “반성은 하고 있나 보지?”

    짓궂은 이엘의 말에 오드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들고 왔던 로브를 그녀의 어깨 위로 둘러 주었다. 오랜 시간을 그녀의 곁에서 함께 보냈다. 눈빛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마음을 갖고 있는지 정도는 쉽게 알아챌 수 있다.

    “이온에게 가고 싶은 거지?”

    “응. 안 간 지 오래됐으니까.”

    이엘이 미묘하게 오드의 시선을 피했다. 오드가 씁쓸한 낯으로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이엘은 끝까지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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