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네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그 정도로 아플 시기는 이미 지났어요. 그리고 제도는 제 아픔이 되지 않습니다. 그곳은 전쟁 이전이 더 끔찍했으니까. 오히려 똑똑히 아로새겨 두는 편이 좋아요.”
과연 그럴까. 노아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가 알게 된 황녀는 인간답지 않고 황족답지 않아서, 분명 이번에도 마음 아파하겠지. 하지만 지금은 제도를 통해 영지로 돌아가는 편이 더 수월하다는 것에 동의한다. 시간이 정말 촉박하기에. 한참의 고민 끝에 노아는 방향을 왼편으로 틀어 제도 쪽을 향해 달렸다.
꾸벅꾸벅 조는 이엘을 위해 새벽엔 달리는 속도를 줄였다. 노아는 될 수 있는 한 모레 안으로 제도를 완전히 통과해 제 영지로 돌아가는 것을 목표로 두었다. 그러려면 야영을 하는 것 따윈 꿈꿀 수 없었다.
괜찮다고는 말했지만 뜬눈으로 며칠을 지새웠던 이엘은 결국 저도 모르게 간간이 수마에 빠져 꾸벅꾸벅 졸았다.
한편 노아는 그 휘황찬란했던 제국의 수도가 밑도 끝도 없이 황량한 땅덩어리가 된 것에 씁쓸함을 느꼈다. 언젠가 자신도 이곳에서 황실을 수호하는 기사단원으로 활동하던 때도 있었기에. 어쩌면 이엘을 핑계로 자신이 이곳에 오기 싫었던 것일 수도…….
새벽 여명이 얕게 깔렸다. 이엘이 잠시 눈을 붙일 수 있게 그녀를 풀숲에 내려놓은 노아가 먹을 것이라도 찾기 위해 인간의 몸으로 돌아가려 할 때였다. 그의 예민한 귀가 쫑긋 섰다. 연이어 코끝에 익숙한 냄새가 걸렸다.
인간이다.
“…….”
“…….”
어림잡아 수십의 인간들이 포위망을 좁히듯 노아와 이엘이 있는 곳을 둘러싸며 다가오고 있었다. 어렴풋하게 남아 있던 이종족의 냄새 속에 인간의 것도 섞여 있었다니. 머리를 굴려 이종족의 냄새로 눈과 코를 가리며 진을 치고 쫓았나 보군.
바르작거리는 소리에 이엘도 눈을 번쩍 떴다. 미간을 찌푸린 채 조용히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그녀의 앞엔 커다란 늑대가 땅을 단단하게 짚고 서 있었다. 그 커다란 몸뚱어리에 새벽빛이 가려져 캄캄하게 느껴질 정도로, 노아는 커다랗게 몸을 부풀리고 있었다.
여전히 고요했다. 폭풍 전야처럼 숨소리조차 오가지 않는 공간이었다. 이엘은 무기가 될 만한 것을 아무것도 쥐지 않고 있던 자신을 탓했다. 물론 거기엔 사정이 있었지만. 아무튼 그녀는 조용히 몸을 낮추어 늑대의 곁에 자리했다.
“노리고 온 걸까요?”
“글쎄. 간덩이가 부은 건 확실하군.”
“죄송해요. 제가 총을…… 못 잡게 되어서.”
“별말씀을. 살육이 싫다고 하시니 잘 피해서 돌아가지.”
노아가 피식 웃으며 고개로 그녀의 얼굴을 치댔다. 어차피 얼음 장벽을 두껍게 세우면 인간들 따위 따돌리는 건 문제도 아니었다. 다만 이엘이 불필요한 살육을 싫어하니 그걸 피하느라 애는 좀 먹겠지만.
그녀가 노아의 등 위로 올라가려 손을 뻗는 순간 타다다닥! 두 사람을 향해 내달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을 노려 노아가 최대한의 능력으로 얼음을 바닥에서부터 치솟도록 힘을 썼다.
그러나 얼음이 생기지 않았다.
“피해!”
타앙―! 공허한 땅 위에 폭발처럼 터져 버린 총성에 이엘이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노아가 그녀의 몸을 감싸듯 덮었다. 공포탄이었다. 그것도 전혀 다른 방향에서 날아온. 조금 전까지 반원을 그리며 포위했던 인간들이 난데없이 들린 공포탄에 주춤하며 자리에 멈춰 섰다.
그사이 이엘과 함께 바닥에 엎드린 노아가 다시 한 번 능력을 써 봤으나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땅은 고요했다.
“젠장.”
“노, 노아 님? 무슨……,”
“보호석이야.”
“……네?”
“놈들이 보호석을 갖고 있어.”
그렇다면 처음부터 자신을 노리고 접근한 건가. 보호석이 끝내 인간들의 손에 나돌아 다니는 꼴이 되어 버렸다. 노아는 미묘하게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희미한 인간들의 냄새조차 잡아내지 못했다. 게다가 인기척이 전혀 없던 곳에서 총성이 들리다니.
그때였다. 또 한 번의 총성이 탕탕! 연이어 두 번이나 들렸다. 역시나 이번에도 예기치 못한 곳에서 들려왔다. 서로 다른 인간들이 대치하는 건가? 두 사람을 가운데 두고 양방향에서 움직임이 미미하게 느껴졌다.
여차하면 여긴 자신이 맡고 이엘을 먼저 보내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을 읽은 건지 이엘이 노아의 옆구리에 손을 댔다. 싫다는 의미였으나 부득이하다면 그러겠다는 의미기도 했다.
“엘. 너는 먼저……,”
“잠깐만요, 노아.”
그녀가 노아의 털을 잡아당겼다.
“흐름이 바뀌었어요.”
그제야 노아가 시선을 뒤쪽으로 향했다. 저 멀리 풀숲이 아주 작게 흔들렸다. 맨 처음 포위망을 좁혀 오던 쪽이었다. 총성이 들린 곳과 정반대 방향이기도 했다. 미미하게 흩뿌려졌던 인간의 냄새가 점차 옅어져 간다. 인간들이 뒤로 진을 물렸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이엘이 노아를 흔들었다. 노아가 시선을 정면으로 돌렸다. 그러곤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혀 인상을 찌푸렸다.
금발의 청년이 천으로 코 아래를 가린 채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세 사람 사이에 거리가 꽤 있었지만 언제든 공격할 만큼 가깝기도 했다. 어느 틈에 여기까지…….
남자의 손이 조금 흔들리자 노아가 몸을 잔뜩 부풀려 성난 이를 드러냈다. 그러자 청년이 움찔거렸다. 이내 양손을 내보이며 무기를 갖고 있지 않음을 확인시켰다. 곧 그는 바닥에 내려놓았던 무언가를 가슴 가까이 들어 올렸다. 짧은 단어가 적힌 종이였다.
「따라오세요.」
믿고 안 믿고는 당신들의 선택입니다. 다갈색 눈동자를 가진 남자가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금발의 청년은 물끄러미 이엘을 쳐다보고 있었다. 노아는 남자를 노려보다가 뒤를 힐끔 쳐다봤다.
조금 전보다 옅어지긴 했으나 여전히 미미하게 인간의 냄새가 바람을 타고 전해진다. 진을 뒤로 물렸을 뿐, 아직 자신들을 주시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가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돌려 남자를 가만히 쳐다봤다.
인간이라면 어느 쪽도 믿고 싶지 않다. 둘 다 같은 편일 수도 있고, 저쪽이 보호석을 갖고 있는 쪽일 수도 있지. 독수리가 아닌 이상, 보호석이 누구에게 있는지 알 수가 없으니. 따라오던 놈들이 뒤로 물러난 틈을 타 이곳을 벗어나는 게 최상의 선택이다.
남자의 시선이 이상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집요하게 그녀를 좇았다. 이엘은 남자의 시선을 가만히 받아치며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이제 곧 해가 뜰 테고, 숨어 있는 자들과 자신들의 위치는 서로에게 노출될 것이다. 그건 공격권을 가진 자에겐 기회겠지만 도망을 쳐야 하는 입장에겐 독이 된다.
그때였다. 쐑― 허공을 가르는 바람 소리와 함께, 뒤에서부터 화살이 홱 날아들었다. 순간적으로 세 사람이 바닥으로 몸을 바짝 엎드렸다. 오발인지, 아니면 위치 파악을 위한 용도인지는 모르겠지만 두 번째 화살은 날아오지 않았다. 게다가 화살이 떨어진 곳도 완전히 다른 곳이었다.
“저흴 믿고 오세요, 어서!”
다급히 들려오는 목소리에 처박고 있던 시선을 올렸다. 저 멀리 남자가 바닥을 향해 무언가 손짓을 하고 있었다. 남자 목소리치곤 상당히 미성이었는데……. 이엘이 미간을 좁히는 새에 남자의 뒤쪽에서 뭔가가 팟! 튀어나왔다. 작은 머리통이었다.
“그러다 죽는다구요!”
열두어 살 됐을까. 꼬마가 눈을 부릅뜨고 다급하게 소리쳤다. 금발의 남자는 당황해서 소년을 향해 계속 손으로 모양을 만들었지만, 소년은 듣지 않았다. 그러나 이엘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 위험하게 왜 나왔어? 어서 돌아가!
그건 수어였다.
아, 빨리 오라구요! 꼬마가 빽 소리를 지르자 뒤에서 또 한 번 화살이 날아들었다. 이번엔 꽤 가까운 곳에 꽂혔다. 점점 거리를 좁히고 있다. 남자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허리에서 총을 꺼내 하늘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듣기 싫은 총성에 꼬마가 귀를 틀어막았다. 함께 귀를 틀어막았던 이엘이 노아를 붙잡으며 소리쳤다.
“가요!”
“뭐?”
“이대로면 곧 날이 밝을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불리해져요. 보호석이 작동하는 범위 내에 있는 한, 폐하의 능력도 무용지물이잖아요.”
사실 도망치는 게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러려면 불가피한 피를 봐야 할지도 모른다. 그걸 원치 않았다. 어느 쪽이든 어린아이가 있다면 그곳은 절대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되니까.
“따라가는 척하다가 틈을 보이면 바로 도망치는 걸로 해요.”
“알겠어. 그럼 내 옆에서 절대 떨어지지 마. 보호석의 범위를 벗어나면 곧장 달아날 테니.”
이엘과 노아는 몸을 낮춘 채 순식간에 내달려 소년과 남자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 남자는 소년을 품에 안아 올리더니 땅바닥을 가리고 있던 거대한 뚜껑을 밀어 냈다. 커다란 구멍의 한쪽 벽엔 긴 사다리가 놓여 있었다. 사다리는 캄캄한 바닥 아래로 끝도 없이 이어져 있었다.
“여기로 들어가라고요?”
이엘의 물음에 남자를 대신해 꼬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가만히 이엘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지척에서 느껴지는 남자의 시선에 이엘이 그를 힐끔 쳐다봤다. 얼굴의 반 이상이 천으로 가려져 무슨 표정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다갈색 눈동자가 이상하리만큼 다정하고 온화하게 느껴졌다. 남자는 계속해서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이엘은 그의 묘한 시선에 입술을 뗐다.
“혹시……,”
“어서 들어가요! 내려가서 이야기해도 늦지 않잖아요!”